나는 한글학교 밖에서는 한국인 친구가 없었다. 저녁식사 시간이면 겉도는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그래서 30분 동안 쉬는 시간마다 우리 놀이터가 되어준 주차장만 뱅뱅 돌았다. 농구대도 하나 있었는데 거긴 늘 나이 많은 남자아이들 차지였다. 나머지 아이들은 연석 위에 앉아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 애썼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가 다 한국인이었다. 나는 그들이 두 이민자의 합동작전으로 갖추게 되었을 순종이라는 덕목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고군분투했다. 그들은 자기 엄마가 사준 선캡 모자를 군말 없이 쓰고 다녔고, 일요일이면 온 가족이 함께 교회에 갔다. 기독교는 좁은 한국 지역사회에서 사실상 구심점 역할을 했지만, 엄마는 일찌감치 교회 에서 빠져나왔다. 십중팔구 내가 혼혈아로 태어나 자란 탓이었을 텐데, 어쨌든 나는 자꾸만 내 자신이 나쁜 아이처럼 느껴져 더 말썽을 피웠던 것 같다. 내가 버릇없이 굴면 선생님은 다른 아이들이 계속 수업을 듣는 동안, 나를 한쪽 구석에서 손 들고 서 있게 했다. 아무튼 꾸준히 한글학교에 다닌 덕분에 나는 한국말을 잘 알아듣지도 말하지도 못하지만 어찌어찌 읽고 쓸 줄은 알게 됐다. - P140
병원 문을 나서는데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나는 차에 온전히 혼자 있게 되자 그제야 하루종일 받은 충격이 몰려와 눈물을 쏟아냈다. 내가 살면서 해온 모든 일이 터무니없이 이기적이고 하찮게 느껴졌다. 내 자신이 미웠다. 은미 이모가 아팠을 때 이모에게 날마다 편지를 쓰지도, 더 자주 전화하지도 않고, 나미 이모가 보호자 역할을 하느라 고생한 것을 충분히 헤아리지도 못한 내가 미워 죽을 것 같았다. 유진에 더 일찍 오지도, 진료 예약날에 같이 따라가지도 않고, 진작 주의를 기울여야 했을 증상들도 까맣게 몰랐던 내 모습도 미웠다. 어떻게든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겠지만, 내 증오는 이제 슬금슬금 아빠에게로, 여러 가지 경고를 귓등으로 흘린 아빠에게로 향했다. 처음 증상이 나타났을 때 우리가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가기만 했어도 이런 고통은 피할 수 있었을 지 모르니까. - P147
나는 이제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바랐다. 부디 내가 대신 고통받을 방법이 있기를, 내가 얼마나 엄마를 사랑하는지 엄마에게 증명할 수 있기를, 엄마의 병상에 기어들어가 엄마에게 바짝 몸을 밀착시키기만 하면 그 무거운 짐을 내가 송두리째 흡수해버릴 수 있기를. 인생이 공평하려면 자식 된 도리를 다할 기회가 주어져야 할 것 같았다. […]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가까이에 누워 있는 것밖에 없었다. 엄마의 지원군이 될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규칙적으로 느리게 울리는 기계 신호음과 나지막이 쌔근거리는 엄마 숨소리를 들으면서. - P149
아빠는 리스크가 크고 승산이 희박한 게임에서 전혀 달갑지 않은 파트너였다. 이 사람은 내 아빠였고 나는 아빠가 침착하게 나를 안심시켜주기를 바랐다. 나를 들들 볶아대서 이 절망스러운 길을 외롭게 걸어가도록 하는 게 아니라. 나는 아빠 앞에서 울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하는 순간 아빠는 분명 내 슬픔에 자기 슬픔을 얹을 터였다. 누가 엄마를 더 사랑하는지, 누가 더 상실감이 클지 경쟁이라도 하듯이 호소하면서. 게다가 아빠는 절대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말까지 집이 떠나가라 말해서 내 속을 있는 대로 뒤집어놓았다. 엄마가 이 병을 이겨 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어쩌면 이제 엄마 없이 우리 둘만 달랑 남게 될 수도 있다고. - P154
나는 엄마 옆에 쭈그리고 앉아, 덜덜 떨고 있는 엄마를 감싸안았다. 나 또한 몰라볼 정도인 거울 속 모습에, 우리 인생에 들어온 이 거대한 악마의 물리적 현현에, 나도 엄마와 같이 엉엉 울고 싶었다. 그러는 대신 나는 몸이 뻣뻣해지고, 심장이 단단해지며, 감정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내 안의 목소리가 명령했다. ‘울면 안 돼. 네가 울면 지금 우리가 위험한 상황에 빠졌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말아. 네가 울면 엄마는 울음을 멈추지 않을 거야.‘ 그래서 나는 울음을 삼키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의의 거짓말로 엄마를 달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 스스로도 진심으로 그걸 믿게 하려고. "그냥 머리카락이잖아, 엄마. 금방 다시 자랄 거야." - P158
사춘기란 그런 것이었다. 중학교라는 사회화 훈련 시설에서 시작되는 하나의 거대한 자학적인 농담. 중학교는 아이들이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민감한 3년이라는 시간을 견디는 곳이다. 이미 D컵 브라를 입을 정도로 가슴이 커지고 오럴 섹스를 아는 여자아이들이, 갭에서 산 어린이 브라를 입고 아직도 만화 캐릭터와 사랑에 빠져 있는 여자아이들 옆에 앉아 있는 곳이다. 우리의 독특한 부분은, 다수가 생각하는 전형적이고 일반적인 아름다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부분은 고통스러운 마맛자국이 되어 자기부정이 유일한 치료법이 되는 때다. - P163
최악은 내가 ‘정미‘라는, 엄마의 이름을 딴 미들 네임이 없는 척했다는 점이다. 미셸 자우너 같은 이름은 서류상으로 보면 전혀 튀지 않는다. 나는 그 생략이 세련되고 현대적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극단적인 상황이라도 피하려는 듯이, 이를테면 사람들이 실수로 정미를 ‘차우멘‘이라고 발음하기라도 하면 또 다시 느끼게 될 굴욕감을 피하려는 듯이.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그냥 한국인이 되는 게 곤혹스러워진 것이었다. "학교에서 달랑 나 혼자 한국 사람이라는 게 어떤 기분인지 엄마는 몰라." 나는 엄마한테 불평을 쏟아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근데 너는 한국 사람이 아니야. 너는 미국 사람이잖아." - P166
"난······원숭이를 끝까지 데리고 갈래." 마침내 내가 결정을 내렸다. "재밌네." 이모가 말했다. "음, 각 동물은 우리가 인생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상징해. 그러니까 네가 맨 처음에 버리는 것이 너한테 가장 덜 중요한 거지. 가장 마지막까지 버리지 않는 것이 네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거고. 사자는 자존심을 상징해. 넌 그걸 가장 먼저 버린 거야." "그거 말 되네." 내가 말했다. "난 그게 다른 동물들을 몽땅 잡아먹어버릴까봐 걱정됐어. 자존심이 다른 중요한 것들을 잡아먹어버리듯이. 자존심이 너무 강하면 다른 사람을 제대로 사랑할 수가 없잖아. 모든 게 자기 발밑에 있다고 느끼면 자기 일도 더 발전하기 어렵고." - P189
은미 이모는 유언으로 엄마가 교회에 나가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지만 엄마는 그 유언을 따르지 않았다. 엄마는 가족 중 유일하게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었다. 더 높은 차원의 힘이 있다고는 믿었지만 조직화된 종교에서 어떤 대상을 무작정 숭배하는 분위기는 좋아하지 않았다. 유진의 한인사회 대부분이 교회를 중심으로 강하게 결속돼 있었는데도.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데 어떻게 신을 믿는단 말이니?" - P195
우리를 묶어줄 엄마가 사라지고 나면 아빠와 나는 거의 남남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우리는 암암리에 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엄마에게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아빠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고,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면 우리 두 사람은 계속 티격태격할 게 뻔했다. 가족이라는 닻이 올려지고 완전히 해체되어버릴 가능성이 다분했다. 나는 엄마가 나를 꾸짖어주길 기다렸다. 그분은 내 아빠라고, 내 핏줄이라고 뚝 잘라 말하길 기다렸다. 내가 이기적이라고, 평생 우리를 먹여 살린 사람에게 그러면 못쓴다고 말하길 기다렸다. 하지만 엄마는 그런 말을 하는 대신 내 등에 가만히 손을 대고, 우리가 차마 서로 말 못 하고 있는 부분은 자기도 어쩔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너는 네 도리를 다할 거야." - P212
그때까지 나는 살아가기와 죽어가기는 명백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엄마와 나는 식물인간으로 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본 터였다. 하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이미 찢겨나간 육체적 자율성의 조각들은 하루하루 누더기 꼴이 되어갔고, 이제 살아가는 일과 죽어가는 일은 그 차이를 분 간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엄마는 병상에 묶여 혼자 걸을 수도 없었고 각종 장기도 더는 잘 움직이지 않았다. 음식도 팔에 연결된 수액 주머니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로 섭취하다가 이제는 기계의 도움 없이는 숨도 혼자 못 쉬는 지경에 이르렀다. 살아간다고 할 수 있는 모습에서 하루가 다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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