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나는 침대에 누워 〈인사이드 디 액터스 스튜디오〉를 시청했다. 〈법과 질서〉에 출연하는 마리스카 하지 테이가 게스트로 나왔다. 진행자 제임스 립튼은 이 배우에게 어머니의 때 이른 죽음에 대해 물었다. 우리는 아름답고 냉정한 성인 여자가 곧장 눈물 터뜨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얼추 40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엄마라는 말 한마디의 파급력은 그 정도였던 것이다. 나는 몇 년 뒤에 똑같은 감정과 맞닥뜨릴 내 모습을 상상했다. 엄마의 죽음이라는 벌에 쏘이는 그 순간부터, 나란 존재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남은 평생을 벌침이 박힌 채로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 내 얼굴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엄마도 울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으며 서로의 티셔츠에 얼굴을 파묻고 한바탕 서럽게 흐느꼈다. 우리는 둘 다 〈법과 질서〉를 본 적이 없고 이 배우가 누군지조차 몰랐지만 마치 나의 미래를, 평생 내 안에 가지고 다닐 고통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렸을 때 넌 우리가 어딜 가건 주야장천 내 옆에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었어." 엄마가 힘겹게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속삭였다. "근데 이리 나이를 먹고도 여기 이렇게 나한테 찰싹 달라붙어 있네." - P247

얼굴을 향해 달려든 햇살에 나는 눈을 찡그렸다. 꼭 약을 한 기분이었다. 방금 일어난 일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도 혹시 내 얼굴에 다 쓰여 있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을 땐 어쩐지 그 역시 잘못된 것 같았다.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다시 누군가와 이야기 나누고 미소를 짓고 웃고 먹는다면 그것도 잘못된 일일 것 같았다. - P266

나는 우리집에서 시내로 가는 길에 있는 묘지를 골랐다. 언덕을 절반쯤 내려가다보면 나오는, 철문이 있는 긴 담장으로 둘러싸인 묘지였다. 아빠는 매장을 하는 것에 두려움이 좀 있다고 고백했다. 해충 구제업자로 몇 년을 일했으니 벌레들이 앙갚음할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엄마의 재를 땅에 묻는 일은 나에게 중요했다. 꽃을 가져와 놓아둘 공간이 필요했다. 쓰러질 수 있는 땅이, 주저앉을 바닥이, 아무 철이고 와서 눈물을 흘릴 풀밭과 토양이 필요했다. 마치 은행이나 도서관에 찾아간 것처럼 진열장 앞에 똑바로 서 있어야 하는 곳이 아니라. - P268

그토록 잘 아는 누군가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은 어려웠다. 고르고 고른 단어마다 초라하기 짝이 없고 허식만 가득했다. 오직 나만이 드러낼 수 있는 엄마의 특별한 부분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엄마는 단순히 주부나 엄마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특별한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엄마가 가장 자랑스러워한 두 역할을 독선적인 태도로 얕잡아보았다. 양육과 사랑을 택한 사람에게도, 돈을 벌고 창작 활동을 하려는 사람이 얻는 만큼의 성취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엄마의 예술은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고동치는 사랑이었고, 노래 한 곡 책 한 권만큼이나 이 세상에 기여하는 일, 기억될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사랑 없이는 노래도 책도 존재할 수 없으니까. 어쩌면 나란 존재가 엄마가 세상에 남기고 간 자신의 한 조각에 가장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그냥 겁이 났던 건지도 모르겠다. - P269

이모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모는 언제나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그런 이모가 엄마의 취향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집, 엄마의 부재가 그득한 집안을 보자 감정이 있는 대로 폭발했다. 나는 이모가 어떤 기분일지, 세 자매 중 장녀로 두 동생이 몇 년 사이 같은 병으로 죽는 걸 지켜본 심정이 어떨지 헤아려보려 했다. 세상이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뉜 것만 같았다. 이미 고통을 느껴본 사람들과 앞으로 느낄 사람들로. 이모는 우리와 같은 부류였다. 이런 고통을 너무도 잘 알았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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