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이는 그 개를 무척이나 사랑했다구요. 잘 때도 품고 잘 정도였어요. 그런데 그게 무슨 짓이에요? 개는 팔아버리고 판 돈은 버려버렸으니······ 얘는 다른 애들과 달라요, 선생님. 이 아이의 핏속에 무슨 광기 같은 게 흐르는 게 아닐까요?"
"안심하세요. 로자 부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요"
순간, 나는 울기 시작했다. 나 역시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공공연하게 그런 말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 P34

하밀 할아버지가 했던 말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할아버지가 틀린 것 같았다. 내 생각에는,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이 더 편안하게 잠을 자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남의 일에 아랑곳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정의로운 사람들은 매사에 걱정이 많아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정의로운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 P43

"하밀 할아버지, 저를 증명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제가 모하메드이고 회교도인지 알죠?"
하밀 할아버지는 신의 뜻이라고 말하고 싶을 때는 늘 그렇듯이 한 손을 들었다.
"로자 부인은 네가 아주 어렸을 때 너를 맡아 키웠단다. 하지만 출생증명서는 받지 못했어. 부인은 오래 전부터 많은 아이들을 돌보아주었고, 또 떠나보냈지. 그런 직업에는 지켜야 할 비밀이란 게 있단다. 비밀을 지켜달라고 부탁하는 여자들이 있거든. 부인이 너를 맡을 때 모하메드라는 이름을 함께 받았단다. 그러니 당연히 회교도인 게지. 너를 맡기고 간 사람은 그후론 연락이 없구나. 모하메드, 너를 낳아준 사람이 있다는 유일한 증거는 너 자신뿐이란다. 하지만 너는 참 좋은 아이야. 네 아빠는 알제리 전쟁에서 죽었다고 생각하렴. 그건 훌륭한 일이란다. 독립의 영웅이지." - P46

아메데 씨는 넥타이에서도 다이아몬드가 번쩍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가짜라고 했지만, 로자 아줌마는 진짜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가 잘못 알았을 리가 없다. 로자 아줌마의 외할아버지가 다이아몬드 상인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진짜 다이아몬드를 가려낼 수 있었다. 은다 아메데 씨의 얼굴도 넥타이 위에서 번쩍였다. 물론 그 둘이 번쩍이는 이유는 각기 달랐다. 로자 아줌마는 아프리카에 있는 아메데 씨의 부모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 뭐라고 썼었는지 기억하지 못했지만, 별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이 가진 것이 없으면 없을수록 점점 더 믿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더구나 은다 아메데 씨는 그런 사소한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그의 부모가 행복하기만 하다면 그 외의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 P53

은다 아메데 씨는 일요일마다 편지 대필을 부탁하러 오곤 했다. 일요일에는 몸 파는 여자들도 일을 하지 않는데, 그것은 성탄절이나 정초에 전투를 중단하는 전통과 같은 것이다. 맡긴 아이를 만나러 오는 여자들도 한둘 있었다. 그 여자들은 아이를 데리고 공원으로 바람을 쐬러 가든가 외식을 나갔다. 장담하건대, 몸 파는 여자들도 때로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다. 손님들은 매번 바뀌지만, 아이들은 그녀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애를 맡겨놓고는 소식 한 장 없이 사라져버리는 여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여자들은 죽었을 수도 있고, 또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여자들은 가능한 한 오래 아이와 함께 있으려고 다음날 일을 시작하기 직전까지 같이 있다가 정오가 다 되어서야 데려오기도 했다. - P56

은다 아메데 씨는 침대에 한쪽 발을 얹어놓고 입에는 굵은 시가를 물고 있었는데, 아무 데나 담뱃재를 털어대면서 편지에 쓸 내용을 지껄여댔다. 그는 머지않아 나이지리아로 돌아가서 부와 명예를 누리면서 살게 될 것이라고 쓰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정말로 그렇게 되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사람이란 자기가 한 말을 스스로 믿게 되고, 또 살아가는 데는 그런 것이 필요한 것 같다. 철학자 흉내를 내느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 P61

그녀는 독일인들을 아주 무서워했다. 그건 이미 아주 오래된 이야기고 각종 신문에도 다 나왔던 얘기니까 내가 여기서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로자 아줌마는 아직도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 일이 계속되고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특히 한 밤중엔 더욱 그랬다. 아줌마는 과거 속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들이 모두 죽어 땅속에 묻혀버린 지금까지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게 바보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유태인들은 끈질기다. 특히 몰살당한 사람들은 더욱 끈질겨서 자꾸 망령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아줌마가 종종 나치의 친위대원에 대해 말해줄 때마다, 나는 내가 너무 늦게 태어나서, 무기며 짐 보따리를 든 나치 친위대원들에 대해 알지 못하게 된 것이 유감스러웠다. 좀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적어도 왜들 그랬는지 그 이유라도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이제는 알 수가 없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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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밀 할아버지, 왜 대답을 안 해주세요?"
"넌 아직 어려. 어릴 때는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게 더 나은 일들이 많이 있는 법이란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 P12

나는 개 가게에 들어가서 푸들을 한번 만져봐도 되냐고 물었다. 여주인은 내게 개를 넘겨주었다. 나는 개를 받아서 쓰다 듬다가 냅다 도망쳐버렸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뛰어 달아나는 것이다. 그걸 못 하면 살아가는 데 지장이 많으니까. - P25

로자 아줌마는 자신이 경찰서장을 잘 아는데, 그 사람도 창녀의 자식이기 때문에 사정을 잘 봐준다는 것. 그리고 아주 감쪽같이 위조서류를 만들어주는 유태인을 한 사람 알고 있다는 말 등으로 그녀들을 위로했다. 난 한 번도 그 유태인을 본 적이 없다. 로자 아줌마는 그 유태인을 함부로 소개해주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독일의 유태인 거주구역에서 알게 된 사이인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후에 다시는 체포되지 말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 유태인은 프랑스인 거주구역 어딘가에서 미친 듯이 위조서류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로자 아줌마가 그렇고 그런 여자가 아니라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증명하는 서류를 지니게 된 것도 다 그 사람 덕택이었다. 그녀는 그것만 가지고 있으면 이스라엘 사람들조차도 자기에게 불리한 증거를 전혀 찾아내지 못할 거라고 했다. 물론, 죽기 전까지 백 퍼센트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인생에는 원래 두려움이 붙어다니게 마련이니까.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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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서 길을 건너면 브롱크스강에 둑을 대 생긴 작은 호수와 폭포가 나온다. […] 테라스 끝에는 반원 모양으로 벤치들이 여러 개 놓여 있다. 벤치는 매년 연두색 페인트로 덧칠했다. 벤치에 앉아 어떤 각도에서 보면 호수는 끝이 안 보이고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다. 그 호수에 못해도 백 번은 갔기에 어떤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얼마나 작고 막혀 있는지도 잘 알았다. 그럼에도 벤치에 앉아 있을 때마다 물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저 굽이진 곳 끝까지 가면 호수에 갑자기 신비로운 수로가 나타나고 내가 가본 적 없는 세상으로 통할 거야. 나는 벤치에 앉아 물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전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할 거라고, 벤치는 원래 몽상가들이 앉는 곳이라고, 사람들은 꿈을 꾸기 위해 이 호숫가 벤치에 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 P144

73번가에서 렉싱턴애비뉴로 꺾어 휘트니미술관으로 향했는데 최근에 열린 특별 기획전을 한 번 더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술관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근처 갤러리에 걸린 독일 표현주의 그림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갤러리에 들어서니 가장 먼저 보이는 벽에 에밀 놀데의 커다란 수채화 두 점이 걸려 있었다. 그 유명한 꽃 그림이었다. 나는 놀데의 꽃 그림을 전에도 여러 번 본 적이 있지만 이건 난생처음 보는 그림들 같았다. 발산하듯 넓은 붓질로 두껍게 칠한 강렬한 색채의 꽃에 어떤 의도가 있음을 그제야 느닷없이 깨달았다. 놀데의 의도는 꽃이 선사한 타오르는 열정을 진지한 인내로 바꾸는 것이었다. 그 안에는 자신의 주제에 명확하고 완고하게 천착하는 예술가가 있었다. 그림의 의미가 그제야 보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작품에 힘을 주는 건 집중력이구나. 내 안의 공간이 넓어진다. 내 안의 직사각형 공간 속으로 빛과 공기가 들어오기 시작하고 그곳에서 사고가 명징해지고 언어가 풍부해지고 지성이 작동을 개시한다. 외로움, 불안, 자기연민으로 가득했던 내면의 공간이 놀데의 꽃을 보며 점점 확장된다. - P157

다시 한번 내 안의 공간이 기대치 않게 확장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 공간이란 뭘까. 내 이마 한복판에서 시작돼 가랑이에서 끝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 공간은 내 몸만큼 넓기도 하고 화살구멍만큼 좁아지기도 한다. 생각이 자유롭게 흐르는 날이면, 그리고 더 깊이 생각할수록 명확해지는 날이면 감사하게도 이 공간은 무한히, 아름다운 날씨처럼 확장된다. 그러나 불안과 자기연민이 치고 들어오는 날이면 쪼그라든다. 얼마나 삽시간에 쪼그라드는지! 이 공간이 넓어져 완전히 자리를 잡으면 나는 그 안의 공기를 맛보고 또 느낀다. 나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호흡한다. 마음은 평화롭고 기대감에 차서 사는 게 즐겁고 어떤 영향력이나 위협에서도 놓여난다. 그 어떤 것도 나를 건드릴 수 없을지니. 나는 안전하다. 나는 자유롭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 생각과의 전쟁에서 지면 경계선은 좁아지고 공기는 오염되고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사방이 수증기와 안개뿐이다. 숨쉬기가 어려워진다. - P159

나는 열일곱이었고 엄마는 쉰이었다. 나는 아직 스스로를 감히 엄마와 대적할 만한 인물로 여기진 않았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은 상대였고, 엄마는 타고나길 게임의 승자여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이제 우리 사이에는 선이 그어졌고 우린 단 한 번도 서로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항상 서로가 던진 미끼를 물었다. 싸움은 폭풍처럼 집 안을 뒤흔들고 벽에 칠해진 페인트에 금이 가게 하고, 바닥의 리놀륨 장판을 찢어지게 하고 창 유리를 덜컹이게 했다. 우리에겐 단 한 번도 휴전이 없었고, 대재앙이 닥칠 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 P168

한번은 내가 당시 사귀던 남자애랑 잤다고 단단히 확신한 엄마가 내 팔을 너무 아파서 눈이 엇뜨일 정도로 세게 꼬집었다. "너 그 남자 맛봤구나, 그런 거지?" 힐난과 낭패감이 서린 까칠하고 낮은 목소리다. 엄마가 삽입 성교를 비유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말이었다. "너 그 남자 맛봤지? 그랬지?" 이 문장은 들을 때마다 충격적이었다. 이 말은 나의 신경종말을 자극했다. 억압의 멜로드라마. 악의에 찬 수동성, 힘의 부재에 대한 분노, 이 모든 것이 저 문장에 압축되어 있었고, 처음 들었을 때부터 알 수 있었다. 엄마가 그 말을 할 때면 우리는 이름은 없지만 떡하니 존재하는 무인지대를 가로질러 서로를 마주했다. - P17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적인 여자의 삶이라는 개념은 우리를 절대 놓아주지 않고 매년 다달이, 날마다 우리를 더 깊은 갈등과 혼란 속으로 밀어 넣을 뿐이었다. 삶에 대한 확신이 약하면 약할수록 자기 방식이 옳다고 독단을 부리게 된다. 우리 각자는 자기가 특별하다고, 다르다고, 더 숭고한 목적에 헌신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서로를 분리시키면서 연민도 함께 거둔다. 남몰래 다른 사람들에게서 마음에 들지 않는 특성을 수집하기 시작하고 그들과 자신을 더욱 열심히 분리하면서 마치 나와 너의 이 차이가 구원이라도 되는 줄로 착각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는 안 저러니 다행이야‘ 타인을 보며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혼잣말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렇게 판단을 한댔자 삶이 개선되는 건 아니다. 우리는 환상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분노에서도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단단한 껍질 아래서 노여움에 차 조용히 부글부글 끓고 있을 뿐이다. 이 억제되지 못한 노여움이 우리를 고갈시키고 죽이기도 한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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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가 다시 나에게 인사했다. 그때서야 나는 뛰노는 아이들과 비둘기 때와 파란 지붕을 보지는 못했지만 마을이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귀에 들리는 것은 정적뿐이었는데, 이는 내가 아직 그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 머릿속이 이미 세상의 소음으로 가득 차 있는 탓일지도 몰랐다. - P21

문이 없었다. 우리가 들어왔던 통로가 방문이었다. 그 여인이 초에 불을 붙이자, 텅 빈 공간이 보였다.
- 여긴 잠을 청할 만한 곳이 아니군요.
- 걱정 마요. 졸음이 가장 좋은 침대가 아니겠어요? 먼 길을 오느라 고단했을 테니 오늘은 여기서 눈을 붙이도록 해요.
침대는 내일 들여놓을 테니까. 젊은이가 이해해요. 혼자 사는 늙은이가 이것저것 챙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모친이 조금만 더 빨리 알려줬어도 이렇지는 않았을 거예요. - P23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로 모래 마당에 물구멍이 나게 만들고, 돌담 사이에 낀 월계수 이파리를 부르르 떨게 만들던 사나운 비바람이 물러간 뒤끝이다. 간간이 이는 바람에 석류나무 가지에 달려 있던 물방울이 허공에 빛을 발하며 흩어지는데, 마당에는 여태껏 구석에 틀어박혀 졸고 있던 암탉들이 몰려나와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쪼아댄다. 그사이 비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 오색찬란한 햇살은 소담스러운 돌멩이 위에 내려앉아 물기를 빨아올리는가 하면, 산들바람에 나풀대는 나무 이파리에 가만히 다가가 살랑인다. - P25

‘너를 생각하고 있어, 수사나. 그 푸른 언덕을. 바람이 이는 계절이었지. 우리가 마을에서 올라오는 생생한 소리들을 듣고 있을 때, 바람이 연출을 끌어가고 있었지. 수사나, 도와줘!" 연출을 잡은 손에 겹쳐지던 부드러운 손. "실을 더 풀어!" 그 바람은 우리를 웃게 만들었지. 그 바람에 손가락 사이로 풀려나가던 연줄이 마치 날아가던 새의 날개에 걸려 부러지기라도 한 것처럼 툭 소리를 내며 끊어질 때까지, 우리의 눈길은 하나로 모아졌지. 헝클어진 연줄을 매단 종이 새가 허공에서 빙빙 돌다 떨어져 초록 들판으로 사라질 때까지.
너의 입술은 촉촉이 젖어 있었어, 수사나. 마치 이슬에 젖은 듯한 그 입술······. - P26

‘저 하늘, 저 구름 위에,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너는 숨어 있어, 수사나. 하느님의 거대한 공간에, 당신의 섭리 뒤에, 결코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곳에, 내가 찾을 수 없는 곳에 너는 숨어 있어. 나의 간절한 소망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곳에······.‘ - P27

한 번은 내가 몸이 성치 않아서 집에 있는데, 그자가 나타나더니 대뜸 "원기가 회복되려면 맥을 한번 짚어봐야 되겠소."라고 하면서 내 몸을 만지더군. 처음에는 손가락과 손바닥을 만지고, 그러다가 팔다리도 만지고, 나중에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손대지 않은 곳이 없었어. 그런데 웃기지도 않는 게, 손길이 닿는 곳마다 응혈이 풀리면서 몸이 뜨거워지는 거야. 생각해 보게, 예언자로 행세하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집시 같은 인간이 눈알을 뒤집고 게거품을 무는데, 깜빡 넘어가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나. 그 바람에 홀라당 옷을 벗은 여자들도 많았지. 그때마다 그 인간은, 여자의 마음속에는 불같은 욕망이 감춰져 있다고 둘러댔어. 딴은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모르지. 여자란 때때로 누군가에게 온몸을 내맡기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히니까. - P32

"이삭을 흔들며 불어오는 바람. 그 바람에 솟았다가 가라앉는 지평선과 겹겹이 굴곡을 이루며 출렁이는 오후의 푸른 들판을 바라보아라. 흙 내음, 그리고 밀과 알팔파 내음. 온통 달콤한 꿀 향기로 가득한 마을······."
[…]
"······그곳에서 세월의 온기를 품고 있는 오렌지 나무 향기를 느껴보아라."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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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와 내가 여행 다닌 장소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가고 싶어한 곳이었다. 우리의 마지막 여행이 병원 격리 생활로 변해버리기 전에 엄마가 나를 데려가려 한 곳이었다. 엄마가 나와 함께 만들려던 마지막 추억이고, 엄마가 나를 키우며 내가 사랑하도록 만든 것의 원천이고, 내가 기억했으면 하는 맛이고, 내가 절대 잊지 않았으면 하는 감정이었다. - P344

대체로 나는 꽤 잘 적응했다. 대도시에서의 새로운 삶이며 어른의 제대로 된 직업이며 모든 게 너무 낯설었지만, 바꿀 수 없는 일에 너무 연연하지 않고 생산성을 높이는 데만 몰입하려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가끔씩 나도 모르게 지난날이 떠올라 괴로웠다. 뜬금없이 고통스러운 생각의 고리에 불이 붙으면 그동안 억누르려 애쓰던 모든 기억이 내 마음 맨 앞자락으로 훌렁 삐져나오기 일쑤였다. 엄마의 희뿌연 혀, 보라색 욕창 자국, 내 손에서 빠져나가는 엄마의 무거운 머리, 저절로 번쩍 떠진 눈. 하지만 내면의 비명이 텅 빈 가슴을 뚫고 나와 온몸을 소용돌이치며 뒤흔들 뿐, 그 감정이 제대로 해소되지는 않았다. - P353

내 기억을 곪아터지게 놔둘 수는 없었다. 트라우마가 내 기억에 스며들어 그것을 망쳐버리고 쓸모없게 만들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 기억은 어떻게든 내가 잘 돌봐야 하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공유한 문화는 내 심장 속에, 내 유전자 속에 펄떡펄떡 살아 숨쉬고 있었다. 나는 그걸 잘 붙들고 키워 내 안에서 죽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했다. 엄마가 가르쳐준 교훈을, 내 안에, 내 일거수일투족에 엄마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를 언젠가 후대에 잘 전할 수 있도록. 나는 엄마의 유산이었다.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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