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토니는 한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어진 눈길로 호수의 물결을 응시했다. 게으름이 딱지처럼 눌어붙은 듯 오른쪽 눈꺼풀이 반쯤 감긴 얼굴이 어딘가 망가진 것 같고 늘 주눅 들어 보였다. 눈은 앙토니의 콤플렉스 중 하나였다. 온몸에 엉겨 붙는 무더위처럼. 땅딸한 몸집, 꾀죄죄한 행색, 265 사이즈 발과 얼굴을 뒤덮은 여드름처럼. 수영이나 할까······. 사촌은 왜 죄다 멀쩡한 걸까. 앙토니는 잇새로 침을 뱉었다. - P15

실종된 녀석의 엄마는 병원에 입원해 진정제를 맞는 중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또 이미 목매달아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밤중에 잠옷만 입고 이 거리 저 거리 헤매는 모습을 봤다는 사람도 있었다. 녀석의 아빠는 경찰이었다.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사람들은 자연히 아랍인들이 복수 차원에서 저지른 짓이라고 의심했고, 경찰인 그가 어떤 식으로든 사건을 해결할 거라고 기대했다. 수색 보트에 탄 작고 다부진 체격의 남자가 실종자의 아버지였다. 뜨겁게 내리꽂히는 햇살 아래 그의 벗어진 머리가 반짝거렸다. 호수 기슭에 모인 사람들은 그의 부동자세를, 그 참을 수 없는 차분함을, 시간이 흐를수록 서서히 벌겋게 익어 가는 그의 대머리를 지켜보았다. 이 아버지의 인내심은 모든 사람에게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차라리 무슨 짓이라도 해 주었으면, 몸을 살짝 뒤척이든가 모자라도 썼으면 하고 사람들은 바랐다. - P17

사촌은 언제나 대담했고 자존감이 넘쳤다. 사촌과 함께라면 지옥이라도 따라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두 집 사이에 복잡한 문제가 얽히면서 앙토니와 사촌은 점점 멀어졌다. 앙토니가 보기에 사촌네는 규모나 상황, 희망, 심지어 경기 여파로 여기저기 만연한 절망마저 너무나 작고 볼품없었다. 사촌이 보는 앙토니네 집은 회사에서 잘리고 부모가 이혼하는 한심하거나 암적인 집안이었다. 그런데 당시 앙토니 주변에서는 그런 일이 대체로 정상이었으며, 그런 범주 밖에 존재하는 모든 일은 상대적으로 용인되기 어려운 것으로 간주되었다. 가족들은 파스티스 몇 모금만 마셔도 연회가 한창 무르익은 순간 언제고 폭발해 버릴 만큼 단단히 뭉쳐, 지하 세계에 간신히 억눌러 담아 온 고통과 분노를 육중한 보도블록 위로 밀어내며 꾸역꾸역 살아갔다. 앙토니로 말하자면 이 모든 것보다 훨씬 우월한 자기 모습을 상상했다. 멀리 떠나기를 꿈 꾸었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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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압축기로 책들을 압축하노라면, 덜컹대는 고철의 소음 속에서 20기압의 힘으로 그것들을 짓이기고 있노라면, 인간의 뼛조각 소리가 들리곤 했다. 마치 고전 작품들의 뼈와 해골을 압축기에 넣고 갈아댄다고나 할까. 탈무드의 구절들이 딱 들어맞는다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올리브 열매와 흡사해서, 짓눌리고 쥐어짜인 뒤에야 최상의 자신을 내놓는다." - P25

단 한 권도 더는 올려둘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서야 내 방의 침대 둘을 합쳐 그 위로 관 뚜껑처럼 닫집 형태의 선반을 짜 넣었고, 거기에 지난 삼십오 년 동안 찾아낸 2톤의 책을 쌓아두었다. 잠이 들면 끔찍한 악몽처럼 나를 짓눌러오는 책들이다······ 나는 잠결에 돌아눕거나 잠꼬대를 하거나 몸을 뒤척이다가 책들이 미끄러져내리는 소리에 질겁하곤 한다. 몸이 살짝 스치거나 소리만 질러도 눈사태처럼 책들이 선반에서 와르르 떨어져 나를 덮칠 것이다. 풍요의 뿔에 담겨 있던 희귀한 책들이 쏟아져내려 나를 한 마리 이처럼 뭉개놓고 말 것이다. - P29

변두리 구역으로 돌아온 나는 그곳에서 소시지 하나를 샀다가 깜짝 놀랄 일을 겪었다. 소시지를 입으로 가져갈 필요도 없이, 그저 턱을 내리기만 해도 소시지가 내 뜨거운 입술에 와닿는 게 느껴졌다. 소시지를 내 허리 높이에 잡고 있었는데 말이다······ 나는 바닥을 내려다보고 경악했다. 소시지 한쪽 끝이 신발에 닿을락 말락 했다. 양손으로 잡고 보면 그저 보통 크기의 소시지였다. 결국 내 키가 줄어들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내 몸이 찌부러진 거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주방 문틀을 가린 백여 권의 책을 치웠다. 내 키를 날짜와 함께 잉크로 표시해둔 문틀이었다. 문설주에 등을 붙이고 책을 갖다대어 키를 잰 뒤 돌아서서 선을 그었다. 팔 년 새에 9센티미터가 줄었다는 걸 맨눈으로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침대 위로 솟은 책들의 천개를 올려다본 순간 나는 알아차렸다. 2톤짜리 닫집이 불러일으키는 상상의 무게에 짓눌려 내 몸이 구부정해진 것이다. - P33

어쨌거나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는 단연 하수구 청소부들이다. 아카데미 회원이었던 두 사람은 프라하의 하수구와 시궁창에 대한 책을 쓴다. […] 그런데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인간의 전쟁만큼이나 전면적인 회색 쥐들과 검은 시궁쥐들의 전쟁과 관련해 그들이 쓴 기사였다. 그 전쟁 중 하나가 회색 쥐들의 완벽한 승리로 막을 내린 참이었다. 쥐들이 지체 없이 두 개의 무리, 두 개의 종족, 두 개의 조직화된 사회로 나뉘어 싸웠던 것이다. 프라하의 하수구와 시궁창에서는 쥐들이 생사를 건 대전쟁을 벌이는데, 승리하는 쪽이 포드바바까지 흘러가는 배설물과 오물을 전부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 변증법의 논리대로 승자가 다시 두 진영으로 나뉜다는 것도 그 고매한 하수구 청소부들이 내게 알려주었다. 기체나 금속을 비롯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투쟁을 통해 생명 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분열을 겪듯이 말이다. 이처럼 상반되는 것들에 균형을 부여하려는 욕구에 의해 조화가 이루어지며, 세상이 통째로 휘청대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정신의 투쟁 역시 여느 전쟁 못지않게 끔찍하다, 라고 한 랭보의 말이 적확하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이해하게 되었다. - P36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은 내가 헤겔에게서 배운 것들을 생각하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서 단 한 가지 소름 끼치는 일은 굳고 경직되어 빈사 상태에 놓이는 것인 반면, 개인을 비롯한 인간 사회가 투쟁을 통해 젊어지고 삶의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야말로 단 한 가지 기뻐할 일이라는 사실 말이다. - P37

수도의 하수구에서 두 패로 나뉜 쥐들이 서로 밀어내며 어이없는 전쟁을 벌이는 동안, 추락한 천사들이 각자의 지하실에서 일하고 있다. 전투에서 패한 교양인들이다. 한 번도 이 전투에 가담한 적이 없지만 세상을 완벽히 설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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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토니는 호숫가에 우두커니 서서 정면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호수는 기름처럼 묵직했다. 간간이 잉어나 곤들매기가 지나갈 때마다 벨벳 같던 수면이 우그러졌다. 소년은 코를 킁킁거렸다. 공기에서 열을 잔뜩 품은 흙과 진창 냄새가 났다. 7월이 이미 떡 벌어진 소년의 등짝에 주근깨를 뿌려 놓았다. 소년이 걸친 건 낡은 축구 유니폼 반바지와 짝퉁 레이밴 선글라스가 전부였다. 날씨가 까무러칠 듯 무더웠지만 그게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 P13

사촌은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다. 그의 피부 아래로는 근육이 울퉁불퉁 불거져 나와 정확히 따라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가끔씩 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 사촌의 접힌 겨드랑이 틈에 앉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말이 귀찮은 등에를 쫓듯 피부가 움찔움찔했다. 앙토니는 군살 하나 없이 날씬하고 근육도 탄탄한 사촌의 몸이 부러워 저녁마다 방에서 윗몸 일으키기며 팔 굽혀 펴기를 해 봤지만 아무리 해도 사촌 같은 근육은 생기지 않았다. 앙토니의 몸으로 말하자면 여전히 두툼하고 둔탁한 스테이크 덩어리 같았다. 언젠가 학교에서 축구공을 펑크 내는 바람에 자습 감독 보조 교사한테 한 소리 들은 게 억울해서 학교 수업이 다 끝난 후 잠깐 보자고 했지만 사촌의 덩치를 익히 아는 교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사촌이 쓰고 다니는 레이밴 선글라스는 짝퉁이 아니었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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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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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지독히도 시끄러운 고독을 원했던 한탸 씨의 우여곡절 인생 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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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거의 다 왔어." 펄롱이 기운을 돋웠다. "조금만 가면 집이야."
두 사람은 계속 걸었고 펄롱이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을 더 마주쳤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 P119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펄롱은 자신의 어떤 부분이, 그걸 뭐라고 부르든–거기 무슨 이름이 있나?–밖으로 마구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가를 치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갓난 딸들을 처음 품에 안고 우렁차고 고집스러운 울음을 들었을 때조차도. - P119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결국 그곳에 가고 말았을 것이다. 더 옛날이었다면, 펄롱이 구하고 있는 이가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었다. 이걸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펄롱이 어떻게 되었을지, 어떻게 살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 P120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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