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있었고, 골짜기가 있었고, 냇물이 있었다. 그녀는 산을 오르고, 골짜기를 배회했고, 냇가 언덕 위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언덕을 성벽이나, 비둘기 가슴이나, 암소 옆구리에 비유했다. 그녀는 꽃을 에나멜에 비유했고, 잔디는 닳아버린 터키 양탄자에 비유했다. 나무는 시들어버린 추한 노파였으며, 양은 회색의 둥근 돌이었다. - P127

그녀는 자연이 아름다운가, 아니면 잔인한가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관해 자문해보았다. 아름다움이란 사물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녀 내면에만 존재하는 것인가. 이와 같이 그녀는 실재의 본질에 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이어 그 생각은 진리에, 그다음으로는 ‘사랑‘, ‘우정‘, ‘시‘에 이르렀다(고향에 있는 높은 언덕에서 그랬던 것처럼). - P129

도시들은 그보다도 못한 의견의 차이 때문에 약탈당하고, 그리고 무수한 순교자들이 여기서 다툰 논쟁거리의 어느 하나에서 한 치의 양보를 하느니 차라리 화형을 감내했다. 인간의 가슴속에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갖게 하고 싶은 것만큼 큰 욕망은 없다. 자기가 높이 평가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깎아내리는 느낌만큼 우리의 행복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우리를 분노로 채우는 것은 없다. - P163

"맙소사‘, 마침내 그녀는 놀라움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고, 차양 아래에서 기지개를 켜면서 생각했다."이건 확실히 유쾌하고 나태한 생활 방식이다. 그러나", 그녀는 다리를 걷어차면서 생각했다. "발꿈치를 휘감는 이 치마는 성가신 물건이다. 그러나 옷감은(꽃무늬가 있는 튼튼한 비단이었는데) 예쁘기 그지없다. 내 피부가 지금처럼 돋보인 적은 결코 없었다(여기서 그녀는 손을 무릎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내가 난간을 뛰어넘어 이런 옷으로 헤엄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지! 따라서 나는 수부들의 보호에 몸을 맡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싫다는 건가? 정말로 그런가?" 지금까지 술술 풀리던 논의의 실타래가 처음으로 엉키자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 P137

"저항하고는 양보하고, 양보하고는 저항하는 것만큼 멋진 것은 없다. 확실히 그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정신을 황홀하게 만든다. 따라서 내가 단순히 수부에게 구조되는 기쁨 하나 때문에 난간 너머 몸을 던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어" - P138

"여자의 발목을 보았다고 해서 돛대 꼭대기에서 떨어지거나, 여자의 칭찬이 듣고 싶어 가이 포크스처럼 차려 입고 길거리를 행진하거나, 조롱받기가 싫어서 여자에게 글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거나, 약하디 약한 계집아이한테 절절매는 주제에, 밖에서는 마치 창조주 같은 얼굴을 하고 돌아다닌다–맙소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저들은 우리를 얼마나 우습게 아는가!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 P140

"내가 여자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녀는 소리치고, 하마터면 자기 성에 대해 자만하는, 극도로 바보 같은 짓을 할 뻔했는데–남녀 간에 이보다 더 한탄스러운 것은 없다–그녀는 이상한 단어 하나 때문에 주춤했다. 그 단어는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슬며시 빠져나와 앞 문장 끝에 들어왔다. ‘사랑‘. "사랑"이라고 올랜도가 말했다. 그러자마자–사랑은 그처럼 성급하다–사랑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는데–사랑은 그처럼 자존심이 강하다. 다른 관념들은 추상적인 상태로 불만 없이 남아 있는데, 사랑은 살아 있는 인간이 되어 케이프와 페티코트, 그리고 스타킹과 가죽조끼를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랜도의 모든 애인들이 여자였고, 인간의 몸은 관습에 익숙해지는 것이 괘씸할 정도로 느리기 때문에, 비록 그녀가 여자이긴 했으나, 올랜도가 사랑한 것은 여전히 여자였다. 동성이라는 의식이 오히려 그녀가 남자였을 때 가졌던 감정을 한층 더 활기차고 깊게 만들었다. 남자였을 때는 알지 못했던 무수한 암시나 수수께끼가 지금은 분명해졌다. 남녀를 구분하고, 무수한 불순물들을 어둠 속에 고이게 만들던 애매함이 사라졌다. 그리고 진리와 아름다움에 대해 시인이 하는 말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올랜도가 여자에 대해서 느끼는 이 애정은 거짓 속에서 잃었던 것을 아름다움 속에서 얻은 것이다. - P142

다행히도 오래 떠나 있던 고국 땅의 모습을 보고, 펄쩍 뛰고 감탄했노라는 것이 납득이 되었다. 아니었으면 그녀는 지금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분노하고 갈등하는 감정들을 바터로스 선장에게 설명하기가 궁했을 것이다. 지금 그의 팔에 안겨 떨고 있는 자신이, 한때 공작이었고, 대사였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겹으로 된 비단으로 백합처럼 싸여 있는 자기가, 한때 사람의 목을 쳤고, 백합이 피어나고 벌들이 윙윙거리는 여름 날 저녁, 와핑 올드 스테어스의 앞바다에서 해적선 창고의 보물 자루들 사이에서, 막된 여자들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선장의 단호한 손이 영국 섬의 절벽들을 가리켰을 때, 왜 그처럼 크게 놀랐는지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었다. - P144

그 많은 여행과 모험과 깊은 명상과 이런저런 모색에도 불구하고 올랜도는 여전히 자기 형성의 도상에 있을 따름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변화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아마도 그칠 날이 없을 것이었다. 높다란 사고의 성벽, 돌처럼 단단해 보이던 습관들이 다른 정신이 와 닿자마자 그림자처럼 무너져내리고, 뒤에는 벌거벗은 하늘과 반짝이는 별들만이 남았다. - P156

"우리 마음은 주마등인데다, 비슷하지도 않은 것들의 잡동사니인가! 한순간 우리는 자신의 출생과 신분을 한탄하고, 고행자의 기쁨을 그리워하는가 하면, 다음 순간엔 오래된 정원의 산책길 냄새에 겨워하고, 지빠귀 소리를 듣고는 운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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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보스니아 작가 이제트 사라일리치(Izet Sarajlie)은 「2176년에 보내는 편지」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뭐라고? / 아직도 멘델스 존의 노래를 들어? / 아직도 데이지를 고르니? / 아직도 어린이날을 축하해? / 도로명을 아직도 시인의 이름을 따서 지어? / 2세기 전, 1970년대엔 아이들의 놀이, 별 헤기, 로스토브 씨 집에서 춤추기가 사라지듯이 시의 시대가 저물 것이라고 했는데. / 나는 바보같이 그걸 믿을 뻔했어!" - P404

책등이 지붕처럼 펼쳐지고, 책갈피가 없으면 쪽 모서리를 접어두고, 언어로 만든 석순처럼 세로로 쌓아두는 우리의 책은 약 2000년의 역사를 지녔다. 책은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는 익명의 발명품이다. - P404

문자가 발명된 이후로 우리의 선조들은 어떤 표면(돌, 홈, 나무껍질, 갈대, 가죽, 나무, 상아, 천, 금속 등)이 글자의 자취를 가장 잘 보존할 수 있는지 궁금해했다. 그들은 완벽하고 휴대 가능하며 내구성 있고 편안한 책을 만들어 망각의 힘에 맞서고자 했다. 중동과 유럽에서 이 초기 단계의 주인공은 파피루스나 양피지 두루마리, 견고한 서판이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종이가 발명되기 전까지 그들은 그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했다. - P404

우리는 코덱스를 발명한 누군지 모를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들 덕분에 텍스트의 기대 수명이 늘어났다. 새로운 방식의 제본은 두루마리보다 내구성이 강하고 훼손도 덜했다. 또 평평했기에 선반에 편리하게 보관할 수 있었다. 크기도 작고 운송도 편리했다. 게다가 각 시트의 양면을 사용할 수 있었다. 코덱스의 용량은 두루마리의 여섯 배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재료의 절약으로 가격이 조금이나마 낮춰졌으며 유연성 덕분에 오늘날의 작은 수첩의 모태가 만들어 질 수 있었으며 크기도 소형화되었다.(키케로는 호두 껍데기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본 적이 있다고 한다.) - P405

한밤중에 담요를 뒤집어쓰고 손전등을 켠 채 책을 읽다가 누군가 오는 것 같으면 불을 끄던 어린 시절의 우리는 그 은밀한 독자의 직계 후손이다.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형태의 책이 승리할 수 있었던 건 박해 속에서 은밀한 독서를 선호한 결과다. - P411

우리가 ‘긴‘ 책을 언급할 때,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두루마리를 지시하는 행위이다. 우리는 구어에서 코덱스를 라틴어의 volvo(돌다, 회전하다)에서 유래한 volumn(권, 책, 크기)이라고 부르고 있다. 더 이상 되감을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구어에서 지루한 무언가를, 절대 끝나지 않고 펼쳐지고 또 펼쳐지는 무언가를 rollo(장광설)라고 말한다. 오늘날 영어의 scroll은 마치 두루마리를 볼 때 그랬듯 화면 위의 글을 상하로 움직이는 동작을 일컫는다. 또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회사들은 사용하지 않을 때 말아서 보관할 수 있는 TV 스크린을 개발하고 있다. 형식의 변화사를 보면 하나의 형식은 다른 형식으로 대체되는 게 아니라 공존하고 전문화되었다. 최초의 책은 멸종되기를 거부했다. - P413

마틴 스코세이지는 「휴고」(2011)를 통해 그 같은 상황을 재현했다. 특히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alies) 영화의 셀룰로이드가 신발 뒷굽을 만드는 데 재사용되는 장면은 우울하기 그지없다. 영화를 개척한 사람들의 마음에 깃들어 있던 아름다움이 결국엔 빗이나 힐로 재활용되었다. 1920년대, 익명의 사람들이 예술 작품 위를 밟고 지나갔다. 그들은 예술 작품을 신고 길 위의 물웅덩이를 디뎠다. 예술 작품으로 머리를 빗었다. 그 위에 머리 비듬이 붙었다. 자신이 쓰고 있는 도구들이 실은 조그만 무덤이라는 것, 파괴의 일상적인 추모비라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 P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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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지론은, 콕 집어 이름 붙이기 어려운 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식이었다. 그러니 겉모습이 유지되고 있는 한 굳이 파고들 필요가 없었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 P52

스물네 살의 오빠는 이미 과묵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이 되어 있었고, 그런 성격을 스스로 혐오스러워했다.
"나는 조숙한 노인이야." 그는 거울을 보며 면도를 하면서 역겨움에 중얼거렸다. 그는 별로 관심도 없는 데다 의구심이 생기기조차 하는 아버지의 사업을 여러 해 동안 보좌해 왔고, 자기가 몸담은 환경에서 마치 침입자가 된 기분으로 가라앉지 않고 떠 있으려고 애를 썼다. 자신과 같은 조건의 사람들과 관심사나 이상을 공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P59

오늘날은 모두가 실제보다 더 괜찮은 사람인 척하고, 실제보다 더 가진 게 많은 사람인 척한다. - P64

모든 인간이 법 앞에서 평등하다거나 신이 보기에 평등하다는 이야기는 사기란다, 카밀로. 나는 네가 그것을 믿지 않기를 바란다. 법도 하느님도 우리 모두를 똑같이 대하지 않는다. 이 나라에서는 그게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면 억양의 미세한 차이, 식탁에서 포크와 나이프를 쥐는 방식, 또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수많은 사회 계층 중 어느 계층에 속하는 사람인지 단 1초 만에 알아챌 수 있다. - P68

둘째 날에는 호세 안토니오와 다른 오빠들도 시위에 가담했다. 정치적인 신념 때문이라기보다는 좌절감을 쏟아내고 싶어서였다. 또 친구들이나 지인들도 시위에 같이하고 있으니 뒤로 물러나 있고 싶지 않았다. 넥타이에 모자를 쓴 관리들, 가난한 노동자들, 남루한 차림의 노숙자들이 하나가 되어 거리에 모여들었다. 그렇게 많은 군중이 나란히 행진하는 모습은 이전에 본 적이 없었다. 과거 실업이 최악이던 시기, 비참에 빠진 사람들은 시위행진을 하고 중산층과 상류층은 저택 발코니에서 내다보던 때와는 정말 달랐다. 감정을 잘 통제하고 정돈된 생활을 유지하는데 익숙한 호세 안토니오에게 그것은 자유로운 경험이었다. 몇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이 한 집단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조밀하게 붙어 대열을 만든 채 몽둥이와 총으로 대응하고 있는 무장 경찰대를 향해 고함을 지르며 자극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광기에 빠진 사람 같다는 걸 스스로 깨닫기는 쉽지 않았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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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그날 오후 홀리안과의 관계는 그런 게 아니었다. 사랑이 결여된, 단순하고 순수한 욕망만이 있었다. 모호함이나 자책감이 없는 난폭하고 적나라한 욕망,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배려하지 않는 욕망. 절대적인 쾌락에 빠진 우리는 우주의 유일한 남자와 유일한 여자였다. 오르가슴의 폭발은 내 안에 숨겨진 여자, 거울 속의 그 낯선 여자, 뻔뻔스럽고 반항적인 여자, 도전적이지만 행복하고 부정한 여자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강렬했다. - P186

나는 돈을 충분히 벌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고 결혼 생활 때처럼 집안 살림을 꾸렸지만, 파비안은 내게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을 가르쳐주었다. 돈을 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돈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지금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여겨지지만 젊은 시절에는 그 깨달음이 참 새로웠다. 우리 여성은 처음에는 아버지, 나중에는 남편의 부양을 받는 존재로 여겨졌다. 상속을 받든 스스로 벌든 자기 소유의 재산이 있는 경우에도 이를 관리할 남자가 필요했다. 투자는 고사하고 돈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돈을 버는 것은 여성적이지 않았다. 나는 훌리안에게 내가 돈을 얼마나 갖고 있으며 어떻게 쓰고 있는지 말하지 않았다. 저축한 돈이 있다거나, 그의 도움 없이 사업을 하고 있다는 얘기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결혼한 상황이라면 불가능했을 독립성을 나에게 안겨주었다. 기혼 여성은 남편의 동의와 서명 없이는 은행 계좌를 개설할 수 없었다. - P205

밖에서 보면 맞는 말이지만 보이는 것처럼 단순한 것은 하나도 없다. 부부의 내밀한 관계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왜 다른 사람 눈에는 용서받지 못할 일을 누군가는 견디는지 아무도 모른다. - P209

반면에 홀리안은 어디든지 쏘다녔다. 그는 죄가 없었다. 오직 나만이 부정한 여자이자 첩이었고, 애인의 아이를 임신한 채 겁 없이 뽐내고 다니는 제멋대로인 여자였다. 나를 너무나 사랑해 주고 키워준 이모들조차 내 행동이 도덕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으니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판단할지는 안 봐도 뻔했다. - P210

욕망의 예속은 얼마나 긴 것인가! 거울 속의 여인에게서 50년간의 투쟁의 흔적과 몸과 마음의 피로가 보이던 그때 나는 내 반평생 그 어느 때보다 굴욕적인 기분이 들었다. 반면 홀리안에게 나이는 선택 사항이었다. 그는 항상 서른 살로 살기로 마음먹은 남자였고 실제로 거의 늘 그랬다. 다른 사람들이 냉혹한 죽음을 응시할 나이가 될 때까지도 그는 여전히 젊고, 평온하고, 명랑하고, 바람둥이였다. "결국 마지막에 후회할 일은, 미처 저지르지 못한 죄들이야." 그게 그의 말이었다.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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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언덕 위의 참나무 아래 혼자 있게 되자마자, 1초 1초가 부풀어 오르고 속이 차서, 절대로 흩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 시간들은 가장 이상하고 다양한 물체로 자신들을 채웠다. 왜냐하면 올랜도는 지금까지 가장 현명한 현자들마저 괴롭혔던 문제들, 이를테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우정이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따위의 문제에 스스로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이런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자마자 터무니없이 길고 다양하게 생각되었던 그의 과거 전부가 흩어지는 시간 속으로 돌진해 들어가, 그것을 본래 크기의 12배로 부풀리고, 갖가지 색으로 채색하고, 우주의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채워놓았기 때문이다. - P89

그는 잔디는 푸르고, 하늘은 파랗다고 말해, 비록 아주 멀어지기는 했으나,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엄격한 시의 정신을 달래보려고 했다. "하늘은 파랗고, 잔디는 푸르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늘은 그와 반대로 마치 천 명의 마돈나가 그들의 머리칼을 늘어뜨린 베일과 같았고, 풀은 마법의 숲에서 털투성이의 호색한 사티로스 신의 포옹에서 도망친 소녀들처럼 어두워지다 사라진다. - P91

"명성이란 말하자면"이라고 그가 말했다(이제 닉 그린의 만류도 없고 보니, 그는 마음 놓고 이미지를 차례로 주워섬겼는데, 그중 얌전한 것으로 한두 개 예를 들면) "사지의 자유로운 운신을 방해하는 끈 장식이 달린 코트, 가슴을 옥죄는 은 재킷, 허수아비를 가리는 색칠한 방패다" 등등. 그가 하려는 말의 요점은, 명성은 우리를 방해하고 구속하는데 비해, 무명은 우리를 안개처럼 둘러싸며, 무명은 어둡고, 넉넉하며, 자유롭다는 것이다. 무명은 우리로 하여금 갈 길을 거침없이 가게 해준다. 무명인의 머리 위에는 어둠의 자비가 풍족하게 내린다. 그가 어디로 가고 오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는 진리를 탐구하고,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만이 자유롭고, 그만이 진실되며, 그만이 평화롭다. 그리하여 그는 참나무 아래서 조용한 기분에 잦아들 수 있었으며, 땅 위로 노출된 참나무의 단단한 뿌리가 그에게는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 P93

그는 오랫동안 깊은 바다로 되돌아오는 파도처럼,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것의 가치와 무명의 즐거움에 대해 생각했다. 무명은 인간의 시샘과 앙심의 짐을 벗겨주고, 우리의 혈관 속으로 관용과 아량이 자유롭게 흘러넘치게 하며, 고맙다는 말이나 칭찬하는 말없이도 주고받는 것을 가능케 해준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모든 위대한 시인들이 틀림없이 그처럼 살아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비록 그의 그리스어 지식이 이를 뒷받침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셰익스피어가 틀림없이 그렇게 작품을 썼을 것이고, 교회를 짓는 사람들도 그렇게 지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모르게, 고맙다는 말을 듣거나, 이름이 알려질 필요도 없이, 오로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아마도 약간의 맥주를 마시고–"얼마나 멋진 인생인가"라고 그는 참나무 아래서 사지를 뻗으면서 생각했다. "그렇다면 당장 이런 생활을 즐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라는 생각이 총알처럼 그의 머리를 스쳤다. 야망은 다림추처럼 떨어져나갔다. 사랑이 배신당하고, 허영심이 비난당했을 때의 쓰린 가슴을 비롯해서, 그가 명성에 대한 야망으로 들떠 있을 때, 그를 찌르고 괴롭혔던 인생의 쐐기풀 묘판- 영광 따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더 이상 괴롭힐 수 없는–이 사라지자, 올랜도는 눈을 크게 뜨고–눈은 줄곧 크게 뜨고 있었으나, 생각만을 바라다보고 있었는데–발밑의 우묵한 곳에 놓여 있는 그의 집을 내려다 보았다. - P94

이때보다 더 이 집이 고상하고 인정미 있어 보인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는 왜 그들보다 앞서려고 했던 것일까? 지금은 사라진 무명의 사람들이 힘들여 이루어 놓은 창조물을 능가하려고 애쓰는 것은 극도로 허망하고 교만하게 보였다. 유성처럼 빛나고, 먼지 하나 남기지 않는 것보다 무명인채로 살고, 뒤에 아치문 하나 남기거나, 헛간을 하나 남기거나, 복숭아가 영그는 담 하나를 남기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는 발아래 잔디밭에 자리 잡고 있는 집을 내려다보면서, 결국 저기 살았던 무명의 영주와 귀부인들은 자손들을 위해, 비가 샐지도 모를 지붕을 위해, 쓰러질지도 모를 나무를 위해 뭔가 남겨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부엌에는 늘 나이 든 양치기를 위한 따뜻한 모퉁이가 마련돼 있었고,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서는 언제나 먹을 것이 있었다. 그들의 술잔은 그들이 병들어 누워 있을 때도 반들거리게 닦여 있었고, 그들이 죽어가고 있을 때에도 창엔 불이 켜져 있었다. 영주이면서 그들은 두더지잡이나 석공들하고 어울려 무명으로 살아가는 것에 만족했다. 무명의 귀족들이여, 잊혀진 건축가들이여–라고 올랜도가 그들을 불렀다. 그 목소리는 올랜도를 냉정하다, 무관심하다, 게으르다고 했던 비평가를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었다(사실 사람의 품성이란 우리가 찾는 반대편에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이처럼 그는 그의 집과 혈족을 더할 나위 없이 감동적으로 유창하게 불렀다. - P96

‘사랑‘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어, 하나는 희고 다른 하나는 까맣다. ‘사랑‘은 몸도 두 개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는 매끄럽고, 다른 하나는 털투성이다. 또 손도 둘이고, 발도 둘이고, 발톱도 둘이다. 사실 모든 기관이 둘이고, 각각은 정확하게 상대방의 정반대이다. 그러나 철저하게 연결돼 있어, 서로 떼어놓을 수 없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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