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트램에서 나는 한 경찰관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북쪽의 용사‘ 같은 거대하고 밝은색의 콧수염이었다. 그는 경찰관이었다. 여러 장비를 갖추고 무장을 한 건장하고 강한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는 그가 나보다 젊다는 걸 알았다. 가정이 있고 가슴과 어깨가 잘 발달했고 땀이 찬 장화를 신은 성인인데 나보다 젊다니!
그런데 나는 서른한 살인데도 불구하고 내 외모와 몸에서 벌써 노화의 육체적 특징들을 발견한다. 나는 아직까지 스스로를 성인이라고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는데 말이다. - P118

약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참나무로 만든, 조각이 새겨진 구식 문이었다. 문에는 유리가 끼워져 있었고 손잡이 역시 유리로 된 것이었다. 꼬인 형태의 그 손잡이는 해가 나는 날이면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문은 간신히 움직였다. 그래서 문을 열려면 마치 술이 가득 든 맥주잔을 들 듯 손잡이를 꽉 잡고 온 힘을 다해 자기 쪽으로 잡아당겨야 했다.
그 문 뒤에는 두 번째 문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는데 두 번째 문은 항상 열려 있었다.
그렇게 해서 두 개의 문 사이는 개폐기가 달린 일종의 통로가 되었는데, 계절에 따라서 먼지, 아니면 습기가 가득했고 맞바람이 심하게 불기도 했다. 혹은 외부의 오래된 유리를 통과하면서 마치 객차의 긴 나무의자를 비추는 해처럼 노랗게 된 햇빛이 가득 차기도 했다.
그럴 때면 문의 유리에 붙여 놓은 십자가의 검은 그림자가 계단 하나하나에 꺾이면서 계단 위에 누워 있었다. - P122

이 사람은 거지였다.
밤이 왔다. 갈수록 문 열리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약국에서는 불필요한 전등을 껐다.
거지가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그는 약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이제 곧 계단에 있는 자신을 발견해서 쉴 곳을 잃게 될 거라고 예상하는 모양이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졸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윗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발끝으로 자꾸만 서는 모습이 귀 기울여 듣는 것 같았다.
갑자기 그가 손잡이를 움켜쥐었는데 도망갈 준비를 한 게 분명했다.
사람들이 그를 쫓아냈다. 그는 거리에 나앉았다.
[…]
길섶에서 물이 졸졸거렸다. 그는 물이 돌 밑에서 마치 물고기처럼 떠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몸을 데우려고 춤추듯 종종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한바탕 웃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이 사람을 늙은 큐피드로 상상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형체가 둥글둥글하고 작은 날개도 있는데다가 맨발이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더군다나 살짝 춤까지 추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바로 이렇게 차분하게, 사실주의적인 스타일로, 또한 구식으로 장편소설 「거지」를 시작하고 싶었다. - P125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장편소설을 쓰는지 나는 모른다.
졸라E. Zola는 아주 정확하기 짝이 없는 계획을 세웠고 마지막 마침표를 찍을 날짜와 시간을 아주 정확한 방식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실수하지 않았다.
그는 소설의 각 장들이 몇 월 며칠에 끝을 맺을 것인지 미리 알고 있었다. 나는 그런 마법의 달력을 작성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내 서류철에는 숫자 ‘1‘이라고 적힌 종이가 최소한 삼백 장은 있다. 이 삼백 장이 「질투」를 시작했다. 그리고 삼백 장 중 단 한 장도 최종적인 시작이 되지 못했다.
작가의 테크닉은 매일매일의 체계적인 (마치 근무처럼) 글쓰기로 연마된다. 그런데 슬프게도 우리는 일할 줄을 모른다. - P126

초점이 맞춰졌다. 식물은 현미경 앞에 놓인 표본처럼 선명한 모습으로 내 앞에서 있다. 식물이 아주 커졌다.
나의 시력이 현미경 같은 능력을 획득했다. 나는 거인국에 도착한 걸리버가 된다.
가냘픈 (풀잎 한 가닥의 가치) 꽃 한 송이가 자신의 모습으로 나를 뒤흔든다. 무시무시한 모습이다. 풀잎은 미지의 장엄한 기술로 지어진 축조물처럼 우뚝 솟아 있다.
나는 강력한 구체와 관, 접합부, 마디, 지렛대를 보고 있다.
그리고 사라져버린 꽃의 줄기 위에 비친 태양의 흐릿한 반영이 내게는 지금 눈부신 금속성 섬광으로 보인다.
시각현상이란 이런 것이다.
이런 시각현상을 야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떤 관찰자도 할 수 있다. 문제는 눈의 특수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과 사물, 시각의 결합이라는 객관적인 조건에 있다.
에드거 포Edgar A. Poe는 이와 비슷한 현상에 관한 테마를 다룬 단편소설을 썼다. 열린 창문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멀리 위치한 언덕을 따라 움직이는 괴물의 환상 같은 형상을 보았다. 신비로운 공포가 관찰자를 사로잡았다. - P128

에드거 포Edgar A. Poe는 이와 비슷한 현상에 관한 테마를 다룬 단편소설을 썼다. 열린 창문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멀리 위치한 언덕을 따라 움직이는 괴물의 환상 같은 형상을 보았다. 신비로운 공포가 관찰자를 사로잡았다.
그 지역은 콜레라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콜레라의 본질을 보고 있다고, 콜레라의 무시무시한 체현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뒤, 미증유의 크기를 가진 그 괴물이 다름 아닌 아주 흔해 빠진 벌레 한 마리에 지나지 않으며 관찰자가 착시현상의 희생물이 되었음이 밝혀졌다. 멀리 위치한 언덕을 배경으로 투사하면서 벌레가 관찰자의 눈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거미줄을 기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착시현상이었다.
새롭게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작가에게는 그런 마법 같은 사진을 연구하는 것이 대단히 유익하다. 덧붙이자면 이것은 기벽이 아니며 전혀 표현주의가 아니다! 반대로 가장 순수하고 가장 건강한 사실주의이다. - P129

이번에는 할머니가 아주 대놓고 고생물학자로 나선다.
"바다는 그 후에 생겼어. 예전에 여기는 육지였거든? 그녀가 말한다.
"그 육지도 우리 거였어요?" 손녀들이 묻는다.
"그래? 내가 말한다.
"전부 다 너희들 거였단다! 몇몇 학자들은 달이 언젠가 혜성에 의해 지구에서 떨어져 나간 지구의 일부라고 주장해. 떨어져 나간 그 자리에 태평양이 생겼지. 지금 보듯이 달은 독자적으로 존재해. 하지만 그건 아무 의미도 없어. 달도 너희들 것이었단다!" - P133

"그런데 갑자기 비가 내리면?" 보헴스키가 말했다.
"안 올 겁니다." 쯔비볼이 말했다.
그들이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맑았다. 푸른 하늘이었다.
"비는 연인들의 적이지요." 노인이 말했다.
"비는 연인들을 정원에서 쫓아버립니다. 도덕을 지키는 악한 파수꾼이지요."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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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명명일에 제도기 세트를 선물로 받았다.
도샤에게 제도를 시키자.
그런데 나는 제도기라는 단어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창조의 고통을 맛보며 제도를 하게 되었는데 그 고통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우울하며 절대로 성공으로 보상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왜냐하면 미래의 엔지니어라면 제도를 향한 열정과 재능이 집중되어 있을 뇌의 영역이 내 경우에는 맹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작동하게 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불가능함을 감지했다. 이런 자각은 이마의 통증으로 , 이마뼈를 짓누르는 고통으로 변했다. - P104

사람들은 공정함에 대해서 나에게 많이 이야기했다. 내게 말하길, 가난은 미덕이고 덧대고 기운 옷은 아주 좋은 것이다. 공정해야 한다고들 했다. 선하게 대해야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 혁명이 일어났을 때 내 눈앞에서 가장 위대한 인류의 공정함이 제기되었다. 억압받은 계급의 대승리였다. 그때 나는 덧대고 기운 모든 옷이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 모든 가난이 미덕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때 나는 억압받은 계급의 해방을 돕는 것만이 공정하다는 걸 깨달았다. 나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쳤던 사람들은 이 공정함에 대해서 내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이성으로 공정함을 깨달아야 한다. - P105

나는 나의 낙천적인 지인을 미워한다. 그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나의 그림자이다. 나는 나아갔고, 경계선이 된 그해에 이르렀다. 도달한 다음 사라졌다. 그리고 그 경계에 다가갈 때의 나는 이제 없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갑자기 그림자가 나타난 것을 본다! 나의 그림자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나는 그림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나를 그림자로 취급하고 나는 무게가 없고 공기와 같다. 나는 추상적인 관념이다. 하지만 나의 그림자는 홍조를 띠었고 낙천적이 되었으며 멸시를 담고 나를 흘긋거린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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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알파고가 확률을 계산하는 기계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수를 본 순간에 생각이 달라졌어요. 알파고는 분명 창의적입니다. 그 수가 알파고에 대한 나의 시각을 바꾸었어요. 바둑에서 창의성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단순히 좋은 수, 위대한 수, 강력한 수를 두는 능력이 아닙니다. 의미 있는 수를 두는 능력이죠." - P370

허사비스와 그의 팀은 컴퓨터가 최고의 바둑 기사를 이기려면 인간이 바둑을 두는 방식, 그 고도로 창의적이고 조금은 신비로운 방식을 최대한 모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최상위권 아마추어 바둑 기사들의 데이터베이스에서 대국 데이터 십오만 건을 뽑아 인공 신경망에 저장했다. 인공 신경망은 인간 두뇌의 신경망을 모방하는 복잡한 수학 모델로, 서로 연결된 다층 알고리즘으로 구성되며, 각 알고리즘은 특정한 패턴과 특징들을 인식하게끔 설계되었다. 모든 알고리즘이 동시에 작동하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수백만 개의 매개변수로 이뤄진 방대한 모델이 생성되는데, 이를 미세하게 조정하면 네트워크의 전반적인 행위를 바꿀 수 있다. 알파고의 첫 신경망은 대국 수천 판을 분석해 특정한 상황에서 아마추어 바둑 기사가 어떤 수를 두는지를 조금씩 모방하고 복사하고 예측하게 되었다. 이 최초의 인간 기반 데이터 세트가 알파고의 ‘상식‘을 형성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초보가 책을 읽고 얻는 지식과 선생에게서 직접 받는 가르침에 해당한다. 딥마인드 사람들은 이를 정책망Policy Nework이라 불렀다. […] 알파고도 게임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기 위해 바둑판 위치 하나하나의 가치를 가늠할 줄 알아야 했고, 승리에 가까워지고 있는지, 아니면 패배로 끌려가고 있는지 시시각각 판단할 줄 알아야 했다. 자기 자신을 상대로 경기를 치러야 했다. - P373

알파고는 주저하지 않았고 두 번 생각 하지도 않았다. 지치는 일도 없었다. 자기 의심 따위는 알지도 못했다. 스타일이나 아름다움 따위에 무관심했으며 프로 바둑 기사들처럼 서로 속고 속이며 치밀한 심리전을 벌이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상대가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에 철저히 무관심한 채로 그저 이기는 것에만 몰두했다. 알파고에게는 단 한 집 차이로 이긴다. 해도 그저 똑같은 승리일 뿐이었다. 이따금 알파고가 모두의 눈에 형편없고 평범해 보이는 ‘게으른‘ 수를 두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한국의 어느 해설자가 지적한대로 알파고의 게으른 수는 철저히 계산된 결과였다. 각각의 게으른 수는 감지되지 않을 만큼 아주 조금씩 최종 목표를 향해 판을 끌고 갔고, 그 수들의 진정한 가치는 종반에야 비로소 드러났다. - P377

훗날 판후이는 이렇게 썼다. "그건 마치 블랙홀처럼 조금씩 당신을 빨아 들인다. 벗어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다. 알파고는 아직 증상이 발현되지 않았으나 기필코 목숨을 앗아갈 질병처럼 스멀스멀 다가온다. 첫 고통을 느낀 순간 당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다." - P378

이런 식의 행동이 처음은 아니었다. 알파고는 특정한 바둑판 배열과 마주할 때면 갑자기 위치와 가치 감각을 잃고 정신을 놓아버리곤 했다. 눈이 멀기라도 한 것처럼 명백히 죽은 영역에서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면, 자신과 상대를, 흑과 백을, 아군과 적군을, 삶과 죽음을 분간하지 못했다. - P386

이후에 그는 말했다. "알파고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사람들이 기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유는 분명했다. 그전까지 사람들은 무력감과 공포감을 느꼈던 거다. 인간이란 존재가 너무나도 나약해 보였으니까. 이 승리는 우리가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증거다. 시간이 지나면 AI를 이기기가 훨씬 더 힘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 한 번의 승리······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느꼈다. 한 번으로 충분했다." 자리에 앉아 진지하게 바둑판을 보던 이세돌을 향해 데미스 허사비스가 다가와 어깨를 살며시 두드리며 축하와 존경의 마음을 전했다. - P390

컴퓨터가 무한한 연산 능력을 가동해 끝없는 확률의 선을 살피는 동안 데이비드 실버가 팀원들에게 물었다. "그 수가 나올 확률이 얼마나 된대?"
"0.0001." 주니어 연구원이 대답했다.
침묵이 흘렀다. 만분의 일. 두번째 대국에서 알파고가 획기적인 37수를 두며 바둑계에 존재감을 알렸을 때 자신의 수에 부여한 확률과 정확히 똑같았다. 결국엔 알파고 네트워크도 중국 프로 기사 구리가 이세돌의 수에 붙인 이름을 인정한 셈이었다. 그것은 실로 신들린 움직임, 신의 손길이 닿은 한 수였다. 인간은 만 명 중에 단 한 명만이 떠올릴 수 있었던 수. 이세돌의 끼움 수에 알파고가 허둥댄 것은 그래서였다. 인간의 경험치를 훌쩍 뛰어넘은 것은 물론. 알파고의 무한해 보이는 능력조차 초월한 수였으므로.
서로 마주한 이세돌과 컴퓨터는 바둑의 한계를 뛰어넘어 낯설고 끔찍한 아름다움을, 이성보다 강력한 논리를 펼치며 머나먼 곳까지 파문을 일으켰다. - P393

보통 인간 바둑 기사는 얼마만큼의 영토를 장악하느냐로 판세를 가늠한다. 이 간단명료한 논리에 따르면, 영토를 많이 차지할수록 승률이 올라간다. 반면 알파고는 이기려면 영토가 정확히 얼마만큼 필요한지를 극도로 정밀하게 계산했고, 그 이상의 영토는 넘보지 않았다. 인간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컴퓨터로서는 압도적 승리이건 간발의 차이이건 다를 게 없었다. 필요도 없는데 뭐하러 굳이 영토를 먹어치우려 한단 말인가? - P396

이세돌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속절없이 무력한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해 다시 한번 팬들과 전 세계 사람들에게 사과했다. 다만 굴욕적인 패배는 자신의 개인적인 약함 때문이지 컴퓨터가 근본적으로 더 우월하기 때문은 아니라고 힘주어 말했다. "알파고가 나보다 반드시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인간은 인공지능을 상대로도 할 수 있는 게 많다고 믿습니다. 더 보여줄 수 있었는데 그게 참 아쉽습니다. 바둑은 아마추어이건 프로이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게임입니다. 즐거움이 곧 바둑의 본질이지요. 알파고는 분명 막강하지만, 바둑의 본질은 알지 못합니다. 나의 패배는 인류의 패배가 아닙니다. 이번 대국으로 드러난 것은 나의 약점이지 인류의 약점이 아닙니다." - P397

데미스 허사비스와 데이비드 실버는 그대로 남아 팀을 대표해 한국 기원이 알파고에게 수여하는 명예 9단증을 받았다. 9단은 그랜드마스터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위치로, 바둑 실력이 신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에게만 주어졌다. 알파고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단증에는 001이라는 일련번호가 붙었고, ‘귀하는 평소 기도 연마에 정진하고 기사로서 인격도야에 힘써 기품이 입신의 역에 이르렀으므로 9단을 면허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 P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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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스는 가족 중 유일하게 특이한 아이, 수백만분의 일의 확률로 태어난 별종이었다. 특출나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운 적은 없었다. 평범한 소년처럼 구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그의 두뇌가 다들 지루해하고 심지어 고통스러워하는 생각을 즐기는 이유가 무언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진짜 그를 괴롭힌 것은 자신의 우월한 정신이 아니라, 그것에 못 미치기는 해도 그의 주변을 둘러싼 그 수많은 정신들이었다. 우리 인간은 왜 이런 식으로 진화했는가? 이 행성의 다른 생명체들은 다들 무지하여 행복한 상태로 존재한다. 그들의 고통과 쾌락은 오직 현재 속에서만 느낄 수 있고, 우리가 느끼는 고통이나 영광과 달리 다음날까지 이어지지 않으니, 인간처럼 모두를 무한 고통의 사슬에 얽어매지 않는다. 그런 에덴동산적 의식의 결여 상태로 다들 살다가 죽어가는데, 왜 우리 존재는 의식으로 고통받는가? - P336

허사비스에게 말을 거는 투자자는 단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허사비스는 몇 주 동안 피터 틸이라는 인물을 연구해 캘리포니아의 어느 북적이는 행사장에서 그에게 접근했다. 틸이 체스 팬이란 사실을 알았던 허사비스는 체스가 왜 그렇게 매력적인지 아느냐고 대뜸 물었다. 호기심이 일어난 틸은 불안하게 앞뒤로 몸을 흔들고 있는 키 작고 안경 낀 청년에게 시선을 주었다. 허사비스는 몇 초 후면 억만장자의 관심이 딴 데로 돌아가리란 것을 알았기에, 체스판의 어느 위치에서건 비숍과 나이트가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기 때문이라고 냉큼 덧붙였다. 현저히 다른 두 말의 움직임이 역동적이고 비대칭적인 긴장감을 만들어내어 게임을 좌우한다는 것이었다. 틸이 넘어오고 나서부터는 돈이 쏟아졌다. - P340

이 프로그램들은 인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체스를 둔다. 창의력이나 상상력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어마어마한 고속 처리 능력과 가차 없는 연산 능력으로 최상의 수를 선별한다. 보통의 프로 선수가 열 개에서 열다섯 개 수를 내다볼 수 있다고 한다면, 알고리즘은 일 초에 이억 개, 사 분에 무려 오백억 개가 넘는 수를 계산할 수 있다. 이렇게 컴퓨터가 수마다 발생하는 가능성을 모조리 검토하는 방식은, 참 적절하게도, 무차별 대입brute force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인간 선수는 기억과 경험, 고도로 추상적인 추론, 패턴 인식, 직관을 활용해 판 위에 자기 정신을 투영 해내지만, 체스 기계는 게임 자체를 이해한다기보다 그저 계산 능력을 사용해 프로그래머가 설계해둔 복잡한 규칙에 따라 결정을 내린다. - P346

바둑의 복잡함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바둑에서는 모든 말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비숍, 폰, 나이트, 룩, 킹, 퀸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같은 등가의 흑돌과 백 돌만이 쓰인다. 나이트, 비숍, 폰과 구분되는 퀸만의 가치를 구분하도록 체스 컴퓨터를 프로그래밍하기란 비교적 쉽다. 하지만 바둑에서는 각 돌의 무게가 위치에 따라 달라지고, 다른 돌 들과의 관계와 돌 사이 공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무엇이 좋고 나쁜 수인지를 판단하는 건 철저히 주관적인 영역이다. 프로 기사들은 위치를 찬찬히 살피며 직관과 본능으로 다음 돌을 어디에 둘지 정한다. 판 전체를 읽고, 오르내리는 패턴을 감지하고, 거의 모든 바둑 게임에서 공통되게 나타나는 돌들의 배열을 구분하기 위해 수년간 훈련한다. 초보는 판 앞에 앉기 전 일단 그런 분류부터 숙달해야 한다. - P348

기사들은 판을 읽고 머릿속으로 앞일을 내다보며 돌 무리가 살지 죽을지를 판단해야 한다. 높고 낮은 공격을 번갈아 하며 조화로운 자리를 구축할 줄도 알아야 한다. 대형이 얼마나 두텁고 얇은지를 잘 분간해 보강해야 할지 아니면 공격을 버텨야 할지를 정해야 하며, 침범하고 반격하고 포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돌 하나하나의 잠재력을 의미하는 맛을 가늠하고, 응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타며 포위되는 상황을 피하고, 선수와 후수의 타이밍을 익히고, 정면으로 맞붙어 자리를 차지해야 할 때와 손빼기를 구사해 판 구석으로 슬쩍 빠져나가야 할 때를 익혀야 한다. 진짜와 가짜 눈을 구별해야 한다. 화점, 천원, 소목, 고목, 외목을 둘 줄 알아야 한다. 비이성적인 탐욕에 눈멀지 않고 경기 흐름을 지배할 수 있게 기세, 즉 투지를 길러야 한다. 비마끝내기. 들여다보기, 협공, 어깨짚기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 희생으로 판을 살리는 선수활용도 터득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돌을 계속 내려놓으면서 상대 영토를 줄이고 나의 영토를 최대로 넓히며 승리를 가져와야 한다. - P349

서울 포시즌스호텔에서, 아니면 인터넷 중계로 대국을 보던 사람들은 자신들을 향해 무섭게 달려드는 미래를 그 순간 부지불식간에 일별했다. 아직은 멀리 있어 희미해 보여도 이미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현재에 영향을 떨치는 미래. 희망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미래. 누군가는 두 팔 벌려 환영해야 한다고 믿지만, 대다수는 이 광기 어린 꿈이 우리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영원히 머무르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야 한다고 확신하는 미래. 하지만, 언젠가 우리와 우열을 다툴 지능의 지시에 따르는 인간의 손으로 바둑판 위에 점판암 하나가 올려지는 순간, 그 미래의 첫 메아리는 이미 울려퍼진 후였다. - P360

이세돌은 아주 충동적인 유형의 바둑 기사로 유명했다. 판단을 내리기까지 보통은 일 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언뜻 터무니없어 보이는 알파고의 수 앞에서는 십이 분이 넘게 고민했다. 눈을 끔뻑이며 엄지와 검지 사이의 살을 꼬집었고, 낯선 것을 보고 어리둥절해하는 개처럼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생각이 고스란히 얼굴에 묻어났다. "초반에는 실수가 잦다 싶었어요. 알파고가 계속 우위를 점하 고는 있었지만 나도 만회하고 있었지요. 이후로도 알파고가 계속 실수하길래 ‘승산이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이 기계도 아직 불완전하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바로 그때 그 수가 나온 겁니다. 실제 대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에요. 흑돌이 거의 사방을 포위하고 있었거든요. 거기에 돌을 둘 이유가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37수를 그렇게 둔 거죠. 그때 나에게 기회가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때 알파고는 일부러 공간을 내준 것이었어요. 머릿속에 이미 그 수를 생각해두었기에 다른 곳에 여지를 허용한 것이죠. 그냥 내가 갖게 내버려둔 거예요. 알파고가 나를 속였습니다. 그 수가 놓인 순간, 나는 끝난 겁니다. 승리는 이미 알파고의 것이었어요." - P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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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 노이만이 침묵에 빠져 친구들이나 가족들과의 대화조차 거부하기 전, 그는 컴퓨터나 기타 기계가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려면 무엇이 필요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설계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해야 한다고.

언어를 이해해 읽고 쓰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고.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놀 줄 알아야 한다고. - P303

국제적인 명성과 자국 내 영웅적인 지위로 사람들 앞에서 말할 자신감을 얻은 이세돌은 이후 이런 말을 남겼다. "나의 바둑 스타일은 남다른 것, 새로운 것, 나만의 것. 누구도 이전에 생각 못한 것이었으면 한다." 그 무렵 그의 재능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 P326

이세돌은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이었으나 겸손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최연소로 바둑 최고 단수인 9단에 오른 기사였다. 번뜩이는 기교, 대국을 앞두고 상대를 놀리고 도발하는 버릇, 상대의 자신감을 꺾으려 드는 가시 돋친 말들("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스타일을 어떻게 알겠어요?"), 계속되는 잘난 체("이번 게임은 자신이 없다. 질 자신이"),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허세는 적뿐만이 아니라 팬을 끌어모았다. 세계 최고의 바둑 기사가 누구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세계 최고다. 나는 누구의 그늘에도 가려진 적이 없다. 기술에 있어서 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나는 살아 있는 전설로 남고 싶다. 바둑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나의 대국이 오래 살아남기를, 예술작품으로 연구되고 회자되기를 바란다." 그의 대국 방식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위험이었다. - P327

그는 무척 성실하게 훈련했으나 무엇보다 자기 창의력에 가장 의존했다. "나는 생각하지 않고 바둑을 둔다. 바둑은 게임도, 스포츠도 아닌, 하나의 예술이다. 체스나 쇼기 같은 게임은 판 위에 모든 말을 두고 시작하지만, 바둑은 빈 판으로 시작한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흑돌과 백돌을 추가하며 두 명의 기사가 하나의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결국 바둑의 무한한 복잡성은 무에서 비롯된다." - P328

지금껏 눈 뜨고 깨어 있는 모든 순간을 바둑에 바치느라 놓친 것들이 아쉽지는 않은지, 사실상 정규교육이란 걸 받지 않았고 초등학교조차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은퇴를 앞두었는데 곧 닥쳐올 일에 맞설 준비는 되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바둑이야말로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대답했다. 바둑의 무한한 복잡성은 인간 정신의 내적 작동 방식을 거울처럼 비추며, 바둑의 전술과 수수께끼와 풀 수 없어 보이는 난해함이 바둑을 우리 우주의 아름다움, 혼란, 질서와 유일하게 비견할 인간의 창조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누군가 바둑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면, 그러니까 돌의 위치와 관계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형세에 숨겨진, 거의 감지할 수조차 없는 패턴을 이해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게 신의 정신을 들여다보는 것과 다르지 않으리라 본다." 이세돌에게는 승패보다도 바둑의 가장 심오한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따라서 모든 수를 전부 이해하기 전까지는 절대 게임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 P329

허사비스는 체스 상금으로 코모도어사의 아미가 Amiga 컴퓨터를 장만한 뒤 그걸로 코딩을 독학했다. […] 열한 살이 되어서는 처음으로 인공지능 에이전트를 만들었다. 능력은 아주 제한적이어서 바둑을 극도로 단순화한 버전인 리버시 게임을 겨우 할 정도 였으나, 데미스는 자신의 디지털 피조물이 동생을 다섯 판 연속으로 이기는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물론 동생은 겨우 다섯 살이었으므로 유의미한 상대라 할 수는 없었으나, 데미스는 자신이 창조한 작은 AI가 자기 정신의 일부를 외면화한 듯 보인다는 사실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의 프로그램은 버그가 너무 많아 자꾸만 충돌을 일으켰고 컴퓨터를 과열시켰는데, 바로 그 점이, 독자적인 생명까지는 아니더라도 말하자면 약간의 개성을 프로그램에 부여한 듯했다. 스스로 판단해 수를 두며 게임을 진행한다는 사실보다는, 데미스가 아무리 노력해도 풀 수 없고 완벽히 없앨 수 없는 이상한 루프에 논리 회로가 엉키면서 나타나는 여러 결함과 변덕과 이해할 수 없는 실수들,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멈춰버리는 버릇이 그러한 인상을 주었다. - P332

왜 그렇게 졌지? 덴마크 남자보다 실력은 한 수 위였는데. 정신이 조금 딴 데 팔렸던 게 문제였다. 몇 달씩이나 맹훈련하고 대회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긴 했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날이 갈수록 체스보다 더한 강박관념에 잡아먹혀 가끔은 한밤중에도 잠을 못 이루고 근본적인 질문을 고민했다. 불면증에 시달리며 어둠 속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아 작은 손전등을 들고 과학소설을 읽었다. 여동생과 남동생이 각자 침대에서 곤히 잠자는 동안 데미스는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집에서 설거지할 때나 숙제할 때. 핀칠리 센트럴 지하철역에 있는 아버지 가게에서 고장난 장난감을 조립할 때, 언제나 그는 자기 생각에 관한 생각을 했다. 그의 별난 지능의 뿌리는 어디서 시작 됐을까? 어떻게 그렇게 빨리 배울 수 있었지? 왜 그리 숫자를 잘 이해하는 걸까? 체스판에 펼치는 수와 전술을 어떻게 다 생각해냈을까?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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