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고 말고는 너가 정하라우. 군인들이 널 데려가면 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이러는 기야. 네 말이 맞다. 내 너를 몰라. 너도 내를 모른다. 기래두 알 수 있는 기가 있잖아. 너가 이렇게 가버리면 내는 불행해질 기야. 되돌릴 수도 없이 고통스러워질 기야. 내를 믿지 않는 것이 옳다. 내는 너가 지금처럼 사람들을 의심하며 살았시면 좋갔어. 내를 온전히 믿구 따라오기를 바라는 기는 아니다. 내랑 개성으로 간다면, 너이 어마이를 돌봐줄 동무를 너이 집에 보낼 기야. 내일 이 시간, 여기로 그 동무와 함께 오갔어. 어마이에게 인사드릴 시간이 필요 하니. - P43

증조부가 당숙의 친구가 하는 방앗간에 일을 구하고 방을 얻은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증조모는 고조모의 부음을 열흘이나 뒤에 들었다. 어머니를 버리고 떠나지 않았더라도 군인들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 당연한 상황을 알면서도 그녀는 당연해 할 수가 없었다. 나도 데리고 가라. 그녀의 치마를 꼭 붙들고 있던 엄마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떼어내던 그녀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때 증조모는 고작 열일곱 살이었다. - P46

열일곱은 그런 나이가 아니다. 군인들에게 잡혀갈까봐 두려워하며 잠들지 못하는 나이, 아침마다 옥수수를 삶아 한 광주리를 이고 팔러 다녀야 하는 나이, 죽음을 목전에 둔 엄마의 공포와 노여움과 외로움을 지켜봐야 하는 나이, 영영 자기 혼자 남겨질 것이라는 예감을 하는 나이, 백정이라는 표지 때문에 길을 지나갈 때면 언제나, 어김없이 조롱당하고 위협당하는 나이, 엄마를 버려야 하는 나이, 엄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고 멀리서 소식을 들어야 하는 나이. 그렇지만 증조모의 열일곱은 그런 나이였다. 할머니는 증조모가 그 나이의 자신을 버리지 못한 채 계속 붙들고 살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 P47

할머니는 증조모가 고조모에게 느낀 감정이 죄책감일 거라고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시간을 지나면서, 고조모에 대한 증조모의 감정이 오로지 깊은 그리움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어리광 부리고 싶고, 안기고 싶고, 투정 부리고 싶고, 실컷 사랑받고 싶고, 엄마, 엄마, 하고 부르고 싶은 마음을 차곡차곡 접어둔 채로 살아 왔을 뿐이라고. 증조모가 할머니를 보며 엄마라고 불렀을 때. 할머니는 고조모가 증조모에게 했다는 말을 떠올렸다. 기래, 가라. 내레 다음 생에선 네 딸로 태어날 테니. 그때 만나자. 그때 다시 만나자. - P47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빠르게 포기하고 체념하는 게 사는 법이라고 가르쳤다. 삶에 무언가를 기대한다고? 그건 사치이기 전에 위험한 일이었다.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같은 의문의 싹을 다 뽑아버리라는 말이었다. 아무 잘못도 없는 나를 왜 때리는 거지? 왜 내 남편은 치료도 받아보기 전에 그렇게 빨리 떠난 거지? 어떻게 나와 함께 울어줄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지? 그런 질문을 하는 대신에 이렇게 생각하라고 했다.
오늘 지나가는 길에 맞았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내 남편이 이유도 모르는 병으로 죽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혼자 슬퍼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부정 탄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런 식으로, 일어난 일을 평가하지 말고 저항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게 사는 법이라고. - P54

개성 사람들은 내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래, 그런 일이 있다. 그건 항상 그랬던 일이다.
엄마의 말대로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그런 식의 생각은 오히려 그녀를 더 화나게 할 뿐이었다. 그녀에게는 그런 재능이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속이지 않는 재능. 부당한 일은 부당한 일로, 슬픈 일은 슬픈 일로, 외로운 마음은 외로운 마음으로 느끼는 재능.
그래, 개성 사람들은 내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런 일이 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그녀는 두 눈을 꼭 감고 주먹을 쥐었다. - P55

나를 백정의 딸이라고 경멸하는 눈빛이 나는 여전히 아프고 익숙해지지 않는다. 나는 억울하다. 나는 화가 난다. 나는 외롭다. 나는 상황이 변하기를 원한다. 사람들이 내게 마음을 여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지만, 적어도 경멸받고 싶진 않다. 아니다. 나는 사람들이 내게 마음을 열어주기를 바란다.
그녀에게는 희망이라는 싹이 있었다. 그건 아무리 뽑아내도 잡초처럼 퍼져나가서 막을 수 없었다. 그녀는 희망을 지배할 수 없었다. 희망이 끌고 가면 그곳이 가시덤불이라도 그저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 말대로 그건 안전한 삶이 아니었다. 알지도 못하는 남자를 따라 기차를 타고 개성으로 가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람들의 경멸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체념하지 못하는 마음은 얼마나 질기고 얼마나 괴로운 것이었을까. - P56

증조부가 데려간 성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신심 깊은 바오로가 세례도 받지 않은 여자에게 미쳐서 부모와 고향을 등졌다는 이야기가 개성의 성당에 퍼지지 않을 리 없었다. 증조모는 순진한 남자애를 꼬드긴 죄인이었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죄가 있다면 그건 여자로 태어나고, 여자로 산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때 그 사실을 알았다. - P57

– 새 밥을 해왔십니다. 반찬이랑 드시라요.
그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숟가락을 들어 밥을 먹었다. 그녀도 같이 숟가락을 들었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밥을 먹으며 그녀는 처음으로 체념이라는 걸 배웠다. 발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아팠지만 그걸 남편에게 말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피가 배어든 버선발을 뻔히 보고서도 아프냐고 단 한 번도 묻지 않는 사람에게 무슨 기대를 할 수 있을까. 어쩌다 밥을 쏟았는지, 복구네 아이가 무슨 짓을 했길래 그랬는지 물어주기를 바란다는 건 욕심이었다. 장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별다른 말과 행동이 없었던 사람이니까. 남편은 나의 고통에 관심이 없어. 그녀는 생각했다. 일말의 관심조차 없어. 그런데 왜 그랬을까. 왜 내가 군인 들에게 잡혀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말했던 걸까. 그것이 그녀 평생의 의문이었다. - P6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증조부가 열아홉 살이었고 혼담이 오고갈 때였다. 증조부는 고조부에게 혼인할 사람이 따로 있다고 말했다. 그 상대가 백정 집 자식이라는 걸 알고 고조부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기만 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웃을 일이 아니었다. 증조부는 교회당 지붕 아래에서 인간의 귀함과 천함은 타고나는 데 있지 않고 그가 하는 행동에 달려 있다고 배워왔던 것이다. 백정 집 여자애가 개나 말보다 못한 취급을 받던 시절에.
어떻게 백정의 자식과 혼인을 할 수 있느냐는 고조부의 말에 증조부는 백정도 천주의 자식이며 인간은 귀천이 없다는 것을 교회에서 배워 알았다고 되받아쳤다. - P33

– 같이 가자.
고조모가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잡으며 말했다.
– 나도 데리고 가라.
병자에게 무슨 힘이 있었는지, 중조모는 치맛자락에서 고조모의 손을 떼어내기가 어려웠다. 그녀가 겨우 손을 떼어내자 고조모는 한 동안 침묵하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기래, 가라. 내레 다음 생에선 네 딸로 태어날 테니. 네 딸로 다시 태어나서 에미일 때 못다 해준 걸 마저 해줄 테니. 그때 만나자. 그 때 다시 만나자.
증조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왔다. 잠시라도 뒤돌아보면 떠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십칠 년 동안 살던 집, 누린내가 가시지 않던 집, 똥지게꾼도 상대해주지 않아 스스로 오물을 퍼내야 했던 집. 해질녘 구석에 핀 꽃이 예뻐 바라보다 아무 이유도 없이 날아온 돌에 머리를 맞아야 했던, 무엇 하나 좋은 기억이 없던 집. 그 집을 떠나 기차역으로 가는데 그 짧은 길이 천릿길 같았고, 걸음걸음이 무거워 납으로 만든 신발을 신은 것 같았다. - P34

할머니는 증조부가 중조모에게 왜 미쳤었는지 조금은 이해한다고 말했다. 증조모의 눈 속에는 아이들에게서나 보일 법한 호기심과 장난기가 있었다. 타고난 기질이 그랬다. 백정 딸 주제에 뭐가 당당하고 즐거워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그런 이유로 어린 시절에는 맞기도 했다. 고개 숙이고 걸어. 감히 양민과 눈을 마주치려 해?
그러나 증조모는 고개를 숙이고 걸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숙이려다가도 저절로 머리를 들게 됐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무리 지어 날아가는 하늘의 새들을 쳐다보느라 넋을 놓았다. 만사를 궁금해했다. 세상이 궁금하고 사람이 궁금했다. - P34

증조부는 처음 열차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달리는 모습에 어지러울 지경이었고 가슴이 뛰었다. 멀리서 울려오는 경적과 바퀴가 철로의 이음매에 닿아 덜컹거리는 소리를 그는 사랑했다.
기회가 될 때마다 그는 동네에서부터 두 시간을 걸어 역사까지 갔고 철로를 따라 걸었다.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리면 가만히 서서 열차를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자리를 피했다. 열차는 귀청을 찢을 듯한 천둥소리 같은 핑음을 내며 지나갔고, 그 진동이 땅을 타고 그의 몸에 전해졌다. - P36

이 철길은 몇 리나 이어지는 기라요? 그때, 이상하게도 그는 그 순간을 이전에도 경험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분명, 그곳에서 그렇게, 얼굴이 검붉게 탄 여자애와 서 있었는데, 이어서 기적 소리가 들리고 까치 한 마리가 서쪽으로 날아갔던 것 같은데······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정말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려오고 마른 까치가 하늘을 날았다. 철길 아래로 내려가면서 그에게 내려오라고 손짓하는 그녀를 보며 그는 그 순간이 순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이상한 직감이었다. - P36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는 그 여자애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떻게 백정 여자아이가 양민 남자에게 태연하게 말을 걸 수 있는지,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볼 수 있는지, 어떻게 양민이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을 수 있는지, 어째서 그에게 그 순간이 처음이 아니었는지, 어째서 붉은 볼의 여자애가 그를 바라보던 그때 기적이 울리고 까치가 날았는지, 왜 그 순간이 마지막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던 건지. 그애는 백정의 자식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그는 어쩐지 괴로워졌다. 백정의 자식이라는 말에 그애의 존재를 구겨 넣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백정의 자식이라는 말로 자신이 그애에게서 받았던 모든 느낌을 부정하려 했다는 사실에 그는 한없이 쓸쓸해졌다. - P37

그녀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다. 바람을 가르며 넓은 보폭으로 걸어가는 모습에 그는 눈길을 빼앗겼다. 억울하고 창피한 기분이 들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어쩐지 그저 슬프기만 했다. 그녀에게는 자신이 위협적인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대체 어떤 일들을 겪었을까, 저애는. 그는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에 빠졌다. - P39

그와 헤어지고 집에 가니 일본 군인 한 사람과 동네 아저씨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동네 아저씨가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일본 사람들이 운영하는 공장에 취직을 시켜주겠다고. 가면 돈도 많이 벌고, 그 돈으로 호강하며 살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고 했다. 그제야 그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세상은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곳이 아니었다. 양민들의 껍데기까지 벗겨 먹는 일제가 인간 취급도 못 받는 자신에게 그런 좋은 기회를 줄 리 없었다.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나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 어마이가 아프시니, 두고 갈 수 없십니다.
그러자 아저씨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그녀에게 다른 선택은 없으며, 나흘 뒤에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말했다. 그날 그녀는 잠들 수가 없었다. 역사 앞에서 사람들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녀는 살고 싶었다. 걷고 싶으면 걷고, 노래 부르고 싶으면 노래 부르고, 웃고 싶으면 웃고, 울고 싶으면 펑펑 울고 싶었다. 백정의 표지 따위는 집어던 져버리고 세상을 보고 싶었다. - P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트릭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티가 바에 팔꿈치를 기대고 앉은 여자와 수다에 빠져 있었다. 암소 꼬랑지처럼 물들인 머리를 화려하게 틀어 올린 여자였다. 티에리는 지칠 줄 모르고 맥주 펌프를 누르며 사람들에게 잔을 돌렸다. 가만히 둘러보면 웃음과 주름살과 그 밖의 모든 것이 놀라웠다. 그리고 여전히 기운이 빠질 정도로 시끌시끌했다. 파트릭은 한 손을 머리카락 속 깊숙이 담갔다. 관자 놀이와 뒷덜미가 흠씬 젖어 있었다. 아이 하나가 테이블에 턱을 고이고 시럽이 담긴 유리잔 속에 갇혀 허우적대는 말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인생은 악의 없이 흘러갔다. 뭉친 것이 있으면 악착같이 풀고 언제든 다시 시작해야 한다. 파트릭은 술잔을 입술로 가져가 단숨에 비웠다. 배 속에 무시무시한 평화가, 납골당 같은 침묵이 찾아왔다. - P439

스테파니가 허리를 안자, 소년은 바로 출발했다. 오토바이가 지방 도로에 들어서자 소녀가 외쳤다.
"미친놈처럼 운전하면 안 된다, 알지?"
둘은 미지근한 저녁 공기를 가르며 지방 도로의 완벽한 속도를 느끼며 달렸다. 얼마 안 가 스테프의 몸이 떨려 왔다. 허벅지와 배를 타고 속도가 밀려 올라왔다. 커브를 돌 때 스테파니는 몸을 잔뜩 숙이며 양토니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두 눈을 참고 한쪽 뺨을 앙토니의 등에 기댔다. 수줍고 희미한 빛을 지평선에 던져 버리며 시골 풍경 속으로 하루가 점점 지워져 갔다. 둘은 산업 지대와 숲, 들판을 가로질렀다. 달리는 내내 소녀는 소년에게서 나는 시큼한 냄새를 맡았다. 양토니는 술을 마셨고, 달렸고, 땀을 흘렸으며, 지금은 그녀를 느끼고 있었다. 그건 그의 몸에서 나는 냄새, 어렴풋이 불쾌한 냄새였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그 냄새가 지표가 되어 주었다. 밤이 스테파니의 몸속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 P446

앙토니는 발로 문을 닫은 다음, 머리 위에서 두 손을 깍지 끼고 손바닥을 바깥으로 해서 위로 쭉쭉 밀었다. 엘렌은 앙토니가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복근이 잎맥처럼 빽빽했고, 승모근은 삼두박근으로 솟구치기 전에 어깨와 만났다. 엄마가 보기에는 모든 것이 잠재적인 난폭함에 지나지 않았다. 앙토니의 근육에서 그녀는 언젠가 터져 나올 폭력을 그렸다. 살면서 그런 일을 너무 많이 보아 왔고, 이제 바라는 건 충돌도 후회도 없는 편안한 낙원뿐이었다. - P465

어머니가 두 손에 마카로니 상자를 든 채 뒤로 돌더니, 이번엔 헌신적이고 완벽한 어머니의 표정으로 앙토니를 바라보았다. 덜 고통받으려고 그토록 애썼으나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던 시간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마침내 엘렌은 남들이 일하는 방식, 세계의 상충하는 기능, 평화에 대한 원대한 꿈을 방해하는 장애 요소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 P469

앙토니는 누릴 만큼 누렸다. 넌 미성년이라서 참 좋겠다는 말을 들은 게 몇 번이었나. 말썽만 일으키고, 마리화나 거래에 연루되고, 스쿠터를 훔치고, 장난삼아 시내 담벼락에 낙서를 하며 돌아다니고, 빈둥대고, 학교를 땡땡이치던 시절. 미성년은 이처럼 모호한 미덕을 지녔고 그로 인해 보호받았으나 끝나기가 무섭게 그때껏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은 잔인한 세상이 전속력으로 달려들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자신의 행동이 현실이 되어 얼굴을 강타했고, 두 번째 기회는 오지 않았으며, 사회는 더 이상 인내심을 보여 주지 않았다. - P477

생활이 당황스러울 만큼 단순해졌다. 점심을 먹고 나선 천 의자에 앉아 자는 둥 마는 둥 했다. 햇살이 침묵처럼 쏟아졌다. 사람들은 그걸 시에스타라고 불렀다. […]
한낮의 숨 막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즐거움, 그 무감각한 느낌을 하신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기는 모로코하고 전혀 달랐다. 프랑스인들은 온몸을 던져 바캉스를 즐길 뿐이었다. 그들의 치밀하게 계획된 나태에는 어딘지 가식적인 데가 있었다. 냉방 시설을 갖춘 슈퍼에서, 해변에서, 아니면 샤워하러 가거나 설거지를 하는 모습이 하신에겐 지나치게 꼼꼼하고 성공이라는 목표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런 겉모습의 이면에는 돌아갈 곳이 있다는 확신이 무슨 위협처럼, 무사안일이란 모름지기 권총의 안전장치가 허락한 일시적인 행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 웅크리고 있었다. - P486

귀환은 하신을 더욱 놀라게 했다. 가족과 함께 모로코에서 돌아왔을 때 하신은 여전히 두 나라 사이에 끼인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코랄리와 A7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전혀 다른 우울을 느꼈다. 길게 늘어진 정체 행렬에서, 주유소에서, 톨게이트에서, 휴게소에서 하신은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허락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근본적으로 휴가 때만 벌어지는 대이동, 끝없는 자동차들의 물결은 거대한 통일성을 형성했다. 일상으로의 복귀라는 씁쓸함, 항구에서 보낸 파티의 향수, 플라타너스에 대한 그리움, 반바지를 입은 수백만 시민들을 통해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기분 좋은 허상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들은 학교나 기표소에서보다 더 확실하게 프랑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느꼈다. 처음으로 하신은 그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 P487

스테프는 웬만한 야심과 타협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뒤늦게 나마 사회의 일반 원리를 이해하게 되었다. 학교는 조차장 역할을 했다. 누군가는 학교를 일찍 떠났고, 그런 이들은 벌이가 시원치 않거나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육체 노동자가 되었다. 물론 그중에 백만장자 정비공이나 배관공이 없다고 말할 순 없지만, 전반적으로 주어진 운명의 길이 그리 멀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또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한 반에서 80퍼센트 정도는 바칼로레아를 마치고 대학에 진학해 철학, 사회학, 심리학, 환경 경영학 등을 전공했다. 첫 학기 말 시험 결과에 따라 냉혹한 여과 과정을 거치고 나면, 끝없는 구직과 지루한 전쟁처럼 이어질 공무원 시험, 교육 우선 지역의 교사나 행정구역 홍보 담당등 다양하고도 절망적인 직업들을 약속해 줄 초라한 졸업장을 기대할 여지가 생겼다. 그렇게 해서 그들도 가방끈 길고 직장을 잡기 힘든, 머리로는 잘 이해해도 실전에서 할 일이 거의 없는 신랄한 시민 계급의 대열을 살찌우게 될 것이다. 그들은 실망하고 분노하고 점점 자기 야심 속에서 무뎌지다가, 마침내 와인 창고를 짓거나 아시아 종교로 개종해 마음을 달래며 새로 운 삶을 시작할 것이다. - P515

"불면증의 진행은 주목할 만한 것으로, 다른 모든 일의 진행을 정확히 따른다."
-폴 발레리

문득 목구멍이 조여들었다. 벌거벗은 이 문장, 너무나 명징한 느낌.
스테프는 지금껏 자신이 얼마나 많은 행운을 누리며 살아 왔는지 깨달았다. 세계사의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에,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배고픔이나 추위, 폭력으로 고통받은 적이 없다. 이상적인 집단(유복한 가정, 요령 좋은 친구, 큰 어려움 없는 학생, 꽤 괜찮은 여자)에 속했으며, 자잘한 보살핌과 늘 찾아오는 쾌락과 함께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미래란 스테파니에게 일종의 무관심한 남자 같은 것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에일랑주에서 멀리 떠나온 스테파니는 버릇없이 자라 갑옷마저 너무나 얇은 초등학생 수준의 순진한 생각만 트렁크에 담아 왔을 뿐, 기본적인 준비가 안 된 사회 부적응자였다. - P519

통화를 마치고 파트릭은 와인을 한 잔 더 따랐다. 그리고 설거지를 했다. 앙토니가 온대서 빈병들을 모아 담고 보니 쓰레기봉투 다섯 개가 꽉 차 컨테이너에 내다 버렸다. 아파트는 흠잡을 데 없이 깔끔했다. 그러고 나서 창문을 열고 침대에 걸터앉아 가슴팍에 재떨이를 올려놓고 담배를 피웠다. TV는 무음으로 계속 켜 놓았다. 바깥에서는 아름다운 여름날이 흘러갔다. 그런 여름을 수도 없이 보낸 듯했다. 그는 눈물 흘리지 않았다. 투명한 하늘에 아주 드물게 구름이 떠가고, 실구름이 바람의 방향을 알려 주었다. 오늘은 어제와 같고, 내일은 오늘과 같을 것이다. 그는 유년의 여름들을 기억했다. 개학하기 전 형제들, 친구들과 만들고 놀던 그들만의 세상을. 아르바이트, 여자애들, 오토바이의 흔적을 굵직굵직하게 남기며 여름들은 해마다 이어졌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맞은 여름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삼 주간의 유급 휴가로 축소되었다. 그 휴가들은 거의 언제나 엉망으로 끝났으며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실업과 더 불어 파트릭은 이제 다른 여름을 알게 되었다. 죄책감으로 가득한 느린 여름, 애태우는 여름. 그리고 지금, 파트릭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건 안심이자 분노였다. - P535

지금 파트릭은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신세가 되었다. 해가 저물면 피콘 맥주를 홀짝이며 쓸쓸 한 저녁을 보내다가 TV 앞에서 입을 벌린 채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새벽 3시에 화들짝 놀라 깨어나면 허리께로 차가운 막대가 뚫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곤 했다. 다음 날 그는 간신히 일어났다. 어김없이 밝아 온 또 하루의 의미를 찾아야 했다. 집에 돌아가는 것 말고는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또 반복이었다. 술 한잔, 고독, 스스로에게 했던 약속 곱씹기. 그의 의지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헐렁해지고 맥주 캔만 하나씩 둘씩 늘어 갔다. 집 안 생활은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명료한 부분이었다. 이따금 소파에 궁둥이를 꼭 붙이고 두 손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있다. 손은 두툼하긴 해도 그럭저럭 곱게 남아 있었다. 손등에 검버섯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텅 빈 느낌, 기진맥진한 느낌이었다. 밖에 나가기도, 사람들을 만나기도 싫었다. 어쨌든 파트릭은 거의 모두에게 화가 나 있었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두 손에 할 일을 주고 싶었다. 곡괭이 손잡이라도. 그의 두 손은 작업 도구를 만지고 재료를 주무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자 흥분과 비탄이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며 살인 욕구마저 일었다. - P53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창의 임신 얘기, 그 아기의 아빠가 누군지에 관한 얘기, 몇 년 동안이나 둘이 내연 관계였다는 얘기, 아내만 불쌍하지, 그런데 정말 바보 아냐,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잖아, 이런 얘기를 이미 지칠 때까지 했고, 복습까지도 다 끝났으니 이제 모두가 불안해지기 시작해 천장만 바라본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 대해 할 얘기가 없다는 건 다들 자신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뜻이고 안뜰과 수영장과 마당까지 이미 집을 다 구경시킨 마당에, 피부와 머릿결과 샌들과 조카가 만들어줬다는 예쁜 목걸이와 훈제연어파이의 맛까지 칭찬하고 나면, 할 만한 얘기가 별로 남아 있지 않으니까. - P173

누군가 그 침묵을 깨야 한다. 기껏해야 몇 초 정도 지속될 침묵이지만 마치 목구멍에 대양의 바닷물이라도 억지로 부어 넣은 것처럼 목이 꽉 막혀 답답하기만 하다. 말하면 안 될 것들, 모두가 그런 것을 갖고 있는데, 그중 어떤 것이 새어 나갈지 모른다. 게다가 침묵이 좋지 않은 이유는 생각할 여지를, 이렇게 오후에 함께 모여 여자 친구들끼리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썰고 토막 내는 일이라는 것, 그런 뒤 토막 낸 그를 자기 눈앞에 울타리를 쳐 가두고 그의 더러운 부분을 들여다보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지금 바로 이 행위, 다음 희생자를 찾는 일은 수십 개의 문, 금속이나 호두나무 목재로 만든 양쪽으로 열리는 거대한 문들 너머에서 똑같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정확히 똑같이 벌어지고 있다. 다른 집들의 거실에, 아마도 네 이야기를, 바로 너를 떠올리고 있는 다른 여자들이 있다. 너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다른 여자들이 있다. - P173

나티비다드 코로소, 다른 이름으로는 코로 […] 가 마치 도마뱀붙이처럼 신중한 걸음으로 거실로 들어온다. 그녀와 같은 몸집과 너비를 가진 여자에게는 있을 수 없는 걸음걸이다. 자연의 법칙에 맞지 않는 이런 몸짓은 몇 년, 몇십 년에 걸친 집안일 때문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데, 마치 옛날 중국 소녀들에게 작은 신발을 신겨 발의 성장을 막고 발을 망가뜨렸던 풍습인 전족처럼, 오랜 집안일이 그토록 이상한 변형을 일으켜 나티비다드 코로소 같은 정말 몸집이 큰 여자를 투명인간으로 만든 것이다. - P174

코로가 나가자 모두가 그녀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 이상하지는 않아? 그러니까 집 안에서, 어떻게 말해야 할까, 저렇게 새까만 흑인 여자가 일한다는 게? 냄새가 다르지는 않아? 흑인들은 우리랑 냄새가 다르잖아, 저 두건 쓰니까 진짜 사람 좋은 아주머니 같기는 하다, 제미마 아주머니랑 닮았어, 팬케이크에 뿌리는 시럽 브랜드 있지, 그 시럽 통에 그려진 흑인 아주머니 모델 있잖아, 그나저나 마리아 델 필라르는 요즘 사람이구나, 일하는 여자들이 액세서리 하는 것도 뭐라고 안 하고, 잘 어울리는걸 뭐, 이국적이잖아, 월급은 얼마 주니, 아이고 우리 집 일하는 여자한테 내가 더 주고 있잖아, 아, 나를 물로 본 거네? - P176

안뜰의 센서등이 깜빡이고 누군가 했던 얘기를 또 한다. 누구 얘기인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자기네 집에서 일하는 여자 중 하나가 낮잠을 자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얼굴에 물을 한 컵 뿌렸는데도 그 여자가 잠을 깨기는커녕 돌아눕더니 5분만 더 자겠다고 했다는 이야기. 신경 쓰이네 저거, 센서등이 너무 민감한 거 아냐, 계속 깜빡거리잖아, 여기 벌레가 그렇게 많은가, 동물이 많은가, 쉴 새 없이 깜빡깜빡, 잠을 잘 수가 없다니까. 아마 다들 저런 문제 겪어봤을걸, 끔찍하다니까. 등은 꺼졌다가 잠시 후 다시 켜진다. 일곱 번이나 반복되니 나가봐야 할 것이다. 칵테일의 취기와 예기치 않은 모험에 다들 배꼽을 쥐고 웃으며 밖으로 나간다. 나가서 무엇 때문에 센서등이 자꾸 켜졌다 꺼졌다 하는지 보려고 한다. 마리아 델 필라르는 수영장에 뜬 낙엽을 건져내는 데 쓰는 뜰채를 집어 창을 쥐듯 거꾸로 잡는다. 모든 것이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통굽 샌들에, 새하얀 리넨 상하의를 세트로 갖춰 입고, 손가락에는 반지를 잔뜩 낀 채 뜰채를 무기처럼 쥐고 있는 모습이라니. 누군가는 사진을 찍는다. - P178

쫓던 무언가가 일하는 여자의 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들도 따라 들어간다. 처음으로 느껴지는 것은 냄새다. 그곳에서는 오래된 낡은 동전의 냄새, 곰팡이 냄새, 낡은 가죽들이 쌓여 있는 가죽 공방 냄새, 습기를 머금은 열대 지방의 옷장 냄새, 그런 쉰내가 난다. 그 방은 정말 옷장이나 마찬가지다. 창문도 없고 크기도 딱 버스만 하다. […] 그들의 ‘투어‘에 여기까지 들어와보는 것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흥분된 감정이 그들을 아이처럼 만들었고, 서로 한마디 말도 없이, 그들은 전에는 되어본 적 없는 존재가 되어보기로 한다. 타인이 되는 것. 서랍을 열어 코로의 옷, 나티비다드 코로소의 옷을 꺼내 자기 옷 위에 걸쳐 입고, 누군가는 베개를 바지 뒤쪽에 넣어 커진 새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고, 또 다른 이는 빨간색 티셔츠를 집어 들더니 머리에 두건처럼 만들어 쓴다. 모두가 코로를 흉내 내며 사진을 찍는다. - P179

센서등은 조그마한 두 눈처럼 보이는 붉은 표시등과 함께 쉼 없이 켜졌다 꺼지길 반복한다. 야자나무는 흔들리는 제 그림자를 물 위에 드리운다. 괴물들이 수영장에서 헤엄치는 것만 같다. 멀리서 소리가 들려온다, 클럽에서는 파티가 열리고 있고 이제 신나는 트로피컬 리듬이 울려 퍼지는 시간이다. 모든 것들이 이 짓궂은 장난에 함께하는 듯 보인다. - P182

바깥에서는 여자들이 놀고 있다. 베로니카는 헤엄을 치려고 하지만 그들은 베로니카를 가두듯 에워싸고 있다. 수가 많아서 수영장의 귀퉁이마다 빠져나갈 틈 없이 지키고 서 있다. 자, 가자, 네 쪽으로 간다, 거기 조 심해, 놓치지 마. 센서등은 마치 취조실 불빛처럼 강력 한 힘을 가진 듯 느껴지고, 센서등이 그렇게 금속성 소리를 내며 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하고 첨벙첨벙 소리가 계속되는 와중에 베로니카의 신음, 이제 그만, 친구들아, 장난 아니야, 라고 하는 것 같은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 P183

누군가가 ‘깎아서 꽉 채워‘ 아래쪽에다 남자 성기 모양의 그림을 그려놓았다. 세 장의 안내문에 모두. 이 일을 할 때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생각을 하면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그냥 일을 하고 하고 또 해야 한다. 이 옥빛의 수영장 물이 깨끗해질 리 없다고 해도. 이 물이 티 없이 맑은 물이 되는 일은 절대로, 결코, 절대로, 없다. 돌아서면 벌써 귀뚜라미 한 마리가, 꽃 한 송이가, 담배꽁초 하나가, 종이 한 장이, 꿀벌 한 마리가 떨어져 있다. 가끔은 죽은 새도 있다. 항상 쌍으로 날아다니던 노란색 작은 새들 중 한 마리다. 죽은 한 마리는 날개를 활짝 펼친 채 물 위에 떠 있고, 다른 한 마리는 수영장 가에서 종종거린다. 자연은 불완전하다. - P188

금박의 호텔 로고가 박힌, 눈처럼 하얗고 올이 촘촘한 가운은 꼭 얼음물에서 막 몸을 헹구고 나온 북극곰의 모피 같고 그 품속 에서라면 모든 게 다 괜찮다는 환상 속에서 살아도 될 것 같다. 이렇게 티 없이 깨끗한 욕실 안, 포근한 눈 같은 수건은 유칼립투스 향이 은은하게 나는 곰 인형 같고 욕조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새것처럼 보이며 아름답고 티 없이 맑고 반짝반짝한 표면만을 비추는 거울이 있는 그런 욕실 안에서라면, 세상의 종말을 생각 하기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잘 정돈되어 있고 깨끗한 냄새, 쾌적한 냄새만 나서 신경안정제 같은 건 필요하지도 않고, 발은 강아지 털 같은 카펫의 털 속에 잠겨 보이지도 않는 데다가 그 털은 어찌나 부드러운지 거의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여행 가방은 바깥세상의 더러움을 끌고 들어올 것만 같아서 풀지 않았는데, 가방 안에는 속옷, 잠옷 바지, 책 몇 권, 그리고 반쯤 남은 땀 냄새 제거제와 컨실러와 선크림과 이런 저런 안티에이징 제품과 카카오버터 립밤과 바이브레이터가 든 비닐 파우치가 있다. 이것들 중 그 어느 것도 이 방엔 어울리는 자리가 없다. 핸드폰 충전기도 있는데, 저런 깨끗한 벽에 꽂으면 무슨 기다랗고 까만 내장처럼 징그러워 보일 것이다. 안 된다. 이곳은 신세계니까. 죄를 사하여 주는 곳. - P190

거울을 잠시 보다가 자기 얼굴이 비치는 곳을 손으로 가린다. 기계 태닝을 하라는 말을 듣는 게 아니었다. 얼굴에 얼룩이 생겼고 얼룩진 얼굴은 지금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걸맞지 않는다고 느낀다. 피부색이 진주조개 같았던 자신, 순수 설화석고에 조각한 것 같았던 자신의 얼굴을 분명 기억하고 있지만, 지금 자신의 피부색은 당근색에 가까운 분홍색 마분지 색깔이다. 무슨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갑자기 크게 들어 구역질이 난다. 빛나는 시절이 다 가고 나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남는 거지? 그렇게 고독함이 밀려온다. 예전에 아름다움은 언제나 곁을 지키는 동반자였다. 훼손할 수 없는 단단한 외피이자 애정을 보장 해주는 보증수표. 그 무엇도 아름다움에 저항할 수 없었다. 그게 바로 아름답다는 것의 의미이다. 누구도 네게 아니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 P1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식탁 위에 켜진 초 근처로 다가갔을 때 둘은 남은 닭고기 조각들을 싸고 있는 껍질 같은 것이 수십 마리의 바퀴벌레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바퀴벌레들은 마른 잎처럼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식탁 위로 흩어져 달아났다. 둘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마르타는 이런 경우, 딱 이런 경우에만 집에 남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마리아는, 이미 의자 위에 올라가 치맛자락을 허리까지 뭉쳐 올리고 선 마리아는 귀신이라도 씐 것처럼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하더니 아니라고, 바퀴벌레가 낫다고, 집에 남자 하나 있느니 세상 모든 바퀴벌레를 들이겠노라고 말했다. - P128

마르타에게 믿음이란 단어는 이미 혀 속에서 똥 맛이 났다. - P136

어느 날 남자는 죽었다. […] 그가 고독 속에서 단말마의 고통으로 신음하도록 두었다, 오빠가 뼈만 남아 앙상한 손을 그녀를 향해 뻗었음에도, 아마도 같이 가자는 듯이, 아니면 손을 잡아달라는 듯이. 그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손 위에 마치 작은 새가 날아와 앉듯 그녀의 살아 있는 손을 올려놓아 달라고, 땀을 닦아달라고, 다만 그의 이마 위에 눈물 몇 방울이라도 흘려달라고, 작은 다이아몬드와도 같은 눈물 두 방울만이라도, 죽음 저편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곳에 가져다 바칠 수 있게. 단말마의 고통을 겪는 자들은 신음하고 몸부림치고 운다. 천국과 지옥에 대해 사람들이 했던 모든 말들이 다 거짓말일까 봐. 아니면 오히려 모두 진실일까 봐. - P138

테레사 여사의 운전기사가 와서 알리 아가씨를 일으키는 걸 도왔는데 그 남자가 등장하자 마치 악마라도 본 것처럼 광기 어린 발작을 일으켰어. 모두를 할퀴고 물어뜯고 울고불고 난리였지, 알리 아가씨가 그 남자를 보더니 미쳐 날뛰기 시작하는데 꼭 공포에 질린 황소 같았어, 성난 백 킬로의 거구가 그렇게 날뛰니까 말이야. 결국 욕실로 데려 가기 위해 그녀를 묶어야만 했지. 운전기사가 돌아가고 나니까 그제야 알리 아가씨는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어, 우리도 그 이유를 알겠는데 왜 어머니면서, 테레사 여사는 그걸 모를까 몰라, 왜 항상 아가씨한테 올 때 남자를 데려오냐고. - P151

가라고. 문 좀 닫아줘요, 제발, 다시 못 들어오게. 문이란 문은 다 닫고 자물쇠를 채워요, 애들한테 못 가게 해요, 알리시타 근처에는 얼씬도 못 하게 해요, 나는 다 보여, 나는 다 보여, 다 들려, 내가 다 안다고. 뭘 안다는 거예요, 아가씨? 뭐가 보여요? 갑자기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어. - P155

어머니 테레사 여사가 오면 알리 아가씨는 벽 쪽으로 돌아누워버렸고 가끔은 그 자세로 오후를 다 보내곤 했어. 여사님은 혼자 오면 심심할까 봐 그랬는지 친구들을 데려오곤 했어, 자기 딸이 사람들 오는 걸 싫어하는 게 분명했는데도 말이야. 아가씨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가만히 누워만 있었어, 마치 흰 천을 덮어놓은 시체처럼. 우리들은 쉬지 않고 커피를 내리고 물잔을 갖다 나르고 다이어트 콜라를 내가고 과자를 내가고 백화점에 있는 카페에 디저트를 주문했지. 테레사 여사의 친구들은 자기들이 찾아와 수다나 떨고 남들 험담이나 하는 게 알리 아가씨에게 좋을 거라고 믿기라도 했나 봐. 그런데 우리가 가끔 아가씨 방에 들어가보면 말이야, 아가씨가 꼼짝도 안 하고 비참하게 누워만 있어, 마치 줄 묶인 짐승처럼. 또 어떤 때는 붕대를 감지 않은 얼굴 한쪽에 눈물 자국이 가득했지. 사모님들이 다 돌아가고 나면 어찌나 살 만하던지. - P157

알리 아가씨는 그저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고. 아가씨 어머니가 와서 같이 지냈는데 아가씨는 입을 닫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우리랑만 있을 때에나 가끔 눈을 뜨고 알리시타의 안부를 물었어. 우리가 알리시타는 잘 지낸다고 하면 우리에게 딸을 보게 해달라고 부탁하곤 했지. 그러고는 울음을 터뜨리곤 했는데 그러면 어머니가 우리에게 약을 먹이라고 시켰어. 어머니의 의사 친구가 약을 줬거든, 눈이 풀린 채 침만 질질 흘리게 만드는 약. 우리는 아가씨가 그냥 우는 것이 낫지 않나, 알리 아가씨는 평생 울어도 모자랄 만큼 울 일이 많아 보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머니 생각은 달랐는지 무슨 사탕 먹이듯 약을 먹였어. 시도 때도 없이. 우리는 아가씨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게 마음이 아팠어, 괴물처럼 변해가는 모습을. - P160

말을 해야 할 때가 있고 행동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이 여자들은 오래전에 행동하기를 그만두었다. 험담은 마치 유령처럼 그들의 안방을 드나든다. - P167

그녀들은 자기 자신은 보지 못하는데, 만약 볼 수 있다면, 만약 실제로 육신에서 빠져나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한 일이라면, 새하얀 소파에 앉아 호화로운 물건들에 둘러싸인 채 슈퍼마켓에서 만나면 애정을 담아 인사를 건네곤 하는 여자를, 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를, 남자애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자기 자식들의 반 친구를 그렇게 뜯어 먹는 모습을 보고는 분명 혀를 자르게 될지 모른다, 아니 반드시 잘라야 할 것이고 그렇게 자르고 나서는 자른 혀를 카카오 말리듯 잘 말려 목에 걸고 다녀야 할 것이다. 썩어빠진 스스로의 모습을 기억하게 하는 목걸이 장식. 하지만 모든 건 전과 다름이 없다. 사람들은 자신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없고 바로 그것이 모든 공포의 근원이다. - P17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