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는 매일 어김없이 호수로 나가 삽질을 했다. 엑스레이의 말이 맞았다. 세 번째 구덩이가 가장 힘들었다. 아니, 네 번째가, 아니 다섯 번째가, 아니 여섯 번째가······.
스탠리는 흙 속에 삽을 쑤셔 넣었다.
얼마 뒤 스탠리는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신경도 쓰지 않게 되었다. 구덩이를 몇 개 팠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거대한 구덩이 하나를 1년 반 동안 파는 느낌이었다. 몸무게가 최소한 3킬로그램은 빠진 것 같았다. 1년 반 뒤면 몸이 아주 좋아지거나 아니면 죽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았다. - P89

그날 밤, 스탠리는 간지럽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간이침대에 누워 낮에 자기가 달리 행동할 수는 없었나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 말고는 별도리가 없었다. 행운과는 거리가 먼 인생에서 딱 한 번 올바른 시간에 올바른 장소에 있었지만,그것도 결국 허사였다. - P95

"음, 사실 우리 아빠는 헌 운동화를 새 운동화로 바꾸는 방법을 발명하고 싶어하셔.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늘 고약한 냄새가 나. 아빠가 항상 헌 운동화를 삶고 있으니까. 엄마는 신발 속에 사는 난쟁이 할멈이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든대. 냄새가 얼마나 지독하겠니?"
제로는 멍한 표정으로 스탠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 P110

"신발 속에 사는 난쟁이 할멈 나오는 자장가 못 들어봤어?"
"못 들어봤어." 스탠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어떻게 부르는 건데?"
"「쎄서미 스트리트」도 안 봤어?"
제로는 멀뚱멀뚱 스탠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스탠리는 저녁을 먹으러 발걸음을 옮겼다. 초록호수 캠프에서 자장가를 불러봤자 바보 같은 기분밖에 더 들겠는가. - P111

스탠리는 고개를 들어 먼지 구름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흩어진 해바라기 씨를 내려다보았다. 스탠리는 또 한 번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다.
이게 뭐 새삼스러운 일인가? - P123

트라우트는 언제나 자기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가졌다. 그래서 캐서린 선생님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트라우트는 캐서린 선생님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말했다.
"어느 누구도 감히 이 찰스 워커에게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아!"
그러자 캐서린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좀 전에 내가 그렇게 말한 걸로 아는데요." - P147

"제로."
제로는 얼굴이 작아 보일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스탠리는 제로가 자기 이름을 반복해서 자꾸자꾸 쓰는 것을 지켜보았다.
Zero, Zero, Zero, Zero, Zero, Zero, Zero······.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스탠리는 왠지 짠한 느낌이 들었다. 제로, 그러니까 ‘0‘을 100번 써봤자 결국 ‘0‘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P169

"너도 알지? 제로가 진짜 내 이름이 아니라는 거."
저녁을 먹으러 휴게실로 가면서 제로가 말했다.
"어, 그래. 알았던 것 같아."
그렇게 말했지만, 스탠리는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날 제로라고 불렀어. 여기에 오기 전에도 말이야."
"어, 그래?"
"진짜 이름은 헥터야."
"헥터."
"헥터 제로니." - P170

"비야, 제발 좀 내려라! 바람아, 제발 이쪽으로 좀 불어다오!"
겨드랑이가 소리쳤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서 호수에 물이 가득 찰지도 몰라. 그러면 수영도 할 수 있겠지." 오징어가 말했다.
"40일 낮, 40일 밤 동안만 내려라. 우리도 방주를 만드는 게 좋겠다. 그래서 암수 한 쌍씩 동물들을 태우는 거야, 그렇지?"
엑스레이가 말했다.
"맞아. 방울뱀 두 마리, 전갈 두 마리, 노랑 반점 도마뱀 두 마리."
지그재그가 말했다. - P179

스탠리는 제로에게 자기 구덩이를 대신 파게 한 것을 후회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도 제로에게 읽는 법을 가르칠 수 있는 것 아닌가. 제로가 온종일 구덩이를 파고도 배울 힘이 있다면, 스탠리 자신도 온종일 구덩이를 파고도 가르칠 힘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 P199

미리 경고하는데, 난 그다지 운이 좋은 사람은 아니야."
스탠리가 말했다.
"평생 구덩이에서 지낸 사람이 더 떨어질 데가 어디 있어. 위로 올라가는 길뿐이지."
제로는 별 상관없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 P227

죽음을 떠올릴 때 스탠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었다. 죽음의 고통은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그 고통이 그렇게 심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죽는 순간이 되면 몸이 너무 약해져서 고통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죽음은 구원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스탠리가 가장 걱정하는 점은 부모님이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기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아무것도 모른 채 헛된 희망을 품고 하루하루 살아갈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죽으면 스탠리한테는 모든 게 끝이겠지만, 부모님의 고통은 끝이 없을 것이다. - P231

스탠리는 누워서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스탠리는 행복에 겨워 잠이 오지 않았다.
행복할 이유가 없다는 것은 스탠리도 알았다. 스탠리는 사람이 죽기 바로 직전에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푸근해진다는 얘기를 어디서 읽은 것 같기도 하고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스탠리는 지금 자기가 바로 그 상태에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행복을 느낀 때가 언제였는지 스탠리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 아무도 스탠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스탠리 자신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제 스탠리는 자신을 좋아했다. - P263

‘무슨 미친 생각을 하는지, 원.‘
스탠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자 과연 미친 사람들이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할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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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라 멘키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고르 바르코프가 마이라를 차지하려고 가장 살진 돼지를 내놓겠다고 했어요. 저한테 그렇게 값비싼 게 어디 있어야 말이죠."
"잘됐네. 너는 결혼을 하기에는 아직 젊어. 네 인생은 아직도 앞 길이 창창해."
"하지만 마이라를 사랑하는걸요."
"마이라는 머리가 꽃병처럼 텅 비었어."
"하지만 예쁘잖아요."
"그러니까 꽃병이지. 걔가 쟁기질을 하겠니, 염소젖을 짜겠니? 못하지. 걔는 너무 가냘파. 그리고 어디 수준 높은 대화나 할 수 있겠어? 못하지. 멍청하고 어리석거든. 또 네가 아플 때 널 돌볼 수나 있겠어? 못하지. 철이 없어서 네 보살핌만 받으려 들걸. 그래, 걔는 예뻐. 그래서 뭐? 퉤." - P47

펜댄스키 선생님이 말했다.
"인생에서 뭘 하며 살 것인가에 대해 토론하던 중이야. 죽을 때까지 초록호수 캠프에 있을 건 아니잖아. 여기를 떠난 다음을 준비할 필요가 있지."
"엄마, 그거 잘됐네요. 사람들이 드디어 엄마를 여기서 내보내 줄 건가 보죠?" - P84

"좋아. 한 가지 말해주지, 원시인. 네가 지금 이곳에 있는 건 딱 한 사람 때문이야. 그 사람만 아니었다면, 네가 이 뙤약볕 아래에서 구덩이를 팔 일도 없었을 거야. 그 사람이 누군지 아니?"
"아무짝에도—쓸모없고—지저분하고—냄새—풀풀—나는—돼지도둑—고조할아버지요."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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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는 간이침대에 누워 아이들과 한 대화를 떠올리며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결백하다고 했을 때는 아무도 자기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가 신발을 훔쳤다고 말하는데도 아무도 믿지 않으니 말이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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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가 지하를 벗어나면서 차창 밖으로 산뜻하고 싱그러운 교외 풍경이 펼쳐졌다. 그들은 묵묵히 맞은편 차창을 바라보았다.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화창했다. 열차가 달리면서 내는 규칙적인 소음과 진동을 느끼며 베르타는 아련한 그리움에 잠겼다. 기차를 타고 이렇게 어디론가 멀리 가보는 것이 얼마 만인지 알 수 없었다. 베르타가 문득 얼마 전에 우연히 만난 고등학교 동창에 대한 얘기가 하고 싶어, 얼마 전에요, 하고 돌아보았을 때 마리아는 고개를 약간 늘어뜨린 자세로 눈을 감고 있었다. 베르타가 잠시 기다렸지만 마리아는 반응이 없었다. 베르타는 마리아를 물끄러미 지켜보다 아이를 재운 엄마처럼 푸근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맞은편 창밖을 마음껏 구경하기 시작했다. 저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이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는 만족감에 어깨가 움칠거릴 만큼 기뻤다. - P104

무엇에 홀린 듯 태극기의 매력에 사로잡히고 말았는데 그건 어쩌면 열아홉 살의 마리아가 미지의 나라인 독일로 출발하는 순간에 보았던, 태극기가 무수히 펄럭이던 장면의 뒤늦은 효과인지도 몰랐다. 현란한 태극 무늬와 검은 괘의 점선들은 그 당시 마리아의 가슴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희열과 공포를 그대로 찍어 인화해놓은 듯했다. 태극기가 더이상 팔리지 않아 팔려는 사람들이 다 떨어져나간 후에도 마리아는 혼자 태극기를 팔러 다녔다. 낯선 동네에 가서 하늘을 배경으로 자리를 잡고 주문 제작한 깃대 꽂이를 펼친 후 태극기를 꺼냈다. 접힌 깃대를 쭉 뽑아 깃발을 다양한 높이에 매달고 배치에 공을 들였다. 몇은 세우고 몇은 비스듬히 누이는가 하면 몇은 나란히 꽂고 몇은 꽃다발처럼 통으로 묶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살랑거리며 늘어져 흔들리다 바람이 불면 펄럭이고 바람이 잦아들면 가라앉고 그늘이 드리우면 은은하게 시름에 잠긴 듯한 깃발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리아는 불가해한 아름다움에 전율했고 마치 둘 사이에 어떤 필연성이라도 있는 듯 자연스레 첫아들의 청회색 눈동자를 떠올리곤 했다. - P105

한 계절이 가고 새로운 계절이 왔다. 마리아의 말대로라면 새로운 힘이 필요할 때였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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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키고 싶어서 그래. 관심도 간섭도 다 폭력 같아. 모욕 같고. 그런 것들에 노출되지 않고 안전하게, 고요하게 사는 게 내 목표야. 마지막 자존심이고. 죽기 전까지 그렇게 살고 싶어. - P75

근데 엄마, 내가 머리가 나빠서 잘 모르는 거야? 사랑하는 게 왜 좋고 기쁘지가 않아? 사랑해서 얻는 게 왜 이런 악몽이야? 사랑하지 않으면 이렇게 안 힘들어도 되는데, 미워하면 되는데, 왜 우린 사랑을 하고 있어? 왜 이따위 사랑을 하고 있냐고. 눈물도 안 나오고 숨도 못 쉬겠는, 왜 이런, 이런 사랑을 하냐고. - P77

지금껏 나는 무슨 짓을 하며 살아온 것일까, 반희는 생각했다. 두려워 도망치고 두려워 숨고 두려워 끊어내려고만 하면서. 채운과 이어진 수천수만 가닥의 실을 끊어내려던 게 채운에게는 수천수만 가닥의 실을 엉키게 하는 짓이었다면, 지금껏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온 것일까. - P78

사랑해서 얻는 게 악몽이라면, 차라리 악몽을 꾸자고 반희는 생각했다. 내 딸이 꾸는 악몽을 같이 꾸자. 우리 모녀 사이에 수천수만 가닥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걸 밧줄로 꼬아 서로를 더 단단히 붙들어 매자 함께 말라비틀어지고 질겨지고 섬뜩해지자. 뇌를 젤리화하고 마음에 전족을 하고 기형의 꿈을 꾸자.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들이 밑도 끝도 없이 샘솟았고 반희는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듯 가슴이 뛰었다. - P79

참 고귀하지를 않구나 이 사람들은, 하고 생각했다. 분명 자신도 고귀하다고 할 순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고귀하지를, 전혀 고귀하지를 않다고 베르타는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이제 베르타를 괴롭히는 의문은 자신이 왜 이들과 계속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들은 이렇게 해서 뭐가 만족스러운 건가, 베르타는 신음하듯 생각했다.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는 말을 떠들어대면서 도대체 어떤 기쁨을 느끼는 걸까. 가만히 듣는 것보다 열심히 말하는 게 그래도 뭔가 하는 것 같아서? 그나마 그게 더 살아 있는 것 같아서?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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