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인사는 느긋하고 우아해요. 다시 만나기 위해 하는 인사니까요. 마지막의 마지막에, 최후의 순간에 두 손을 꼭 잡고 조급하고 간절하게 전하는 그런 인사가 아니니까요. 안녕히. 너무 무겁고 두려워서 우리는 차마 하지 못했던 인사예요. - P57
시간은 상대적이에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일 초가 일 분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러면 일 년은 육십 년이 되겠네요. 그러면 나는 전설 속의 용만큼 늙은 존재예요. 모든 것을 다 지켜보면서 혼자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던 아주 늙은 용이요. - P62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어요. 나나가 간직해 온 세이라 언니의 스웨터를 풀어 그 실로 레이스를 짜 커튼과 식탁보를 만들었어요. 파티마 아줌마의 옷을 자르고 바느질해 메이에게 새 옷을 만들어 주었고요. 내가 쓰던 쿠션은 천을 갈아서 조로에게 주었어요. 서운해하지는 마세요. 물건들에게도 계절이 있다면, 긴 겨울이 지나 봄이 온 것뿐이에요. - P69
저 반짝이는 것들은 하늘에 난 작은 구멍들이라고 나나가 그랬죠. 지상에서의 시간이 다하면, 그 영혼이 저 구멍을 메꾸러 가는 거라고요.나는 똑같은 얘기를 메이에게 해 주어요.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은 다 하늘의 작은 구멍을 메꾸러 떠난 거야, 라고요. - P69
인생이라는 건 정말 종잡을 수가 없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만하면 되었다고 마음을 정리했는데, 갑자기 꼭 하고 싶은 일이 생겼으니까. […] 나는 어떻게든 이 모험을 함께할 생각이었어. 어쩌면 내가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이 하나 더 생길지도 모르니까. - P26
오늘은 분명 세상이 끝나는 날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매번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어요. 전쟁도 그래요. 남겨진 사람들한테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아요. 영원히. - P42
내가 기다리는 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들이에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 - P42
그 수많은 ‘만약에‘ 중에, 왜 이것일까요.이별을 받아들이고, 무력감을 받아들이고, 슬픔을 받아들이고,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내 삶을 받아들이고. 이 삶에서는 그저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숨을 들이켜듯이 받아들이고, 다시 내쉬듯이 체념해 버린 우리의 삶을요. - P52
캐드펠은 신실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이미 고결한 행위를 하려고 마음먹은 순간 선의를 강요받는 것만큼 젊은이의 짜증과 분노를 자아내는 일도 없으리라. - P328
저 또래의 아이들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압박 속에서도 영웅적인 충성심과 용맹함을 보이고 숭고한 목적을 위해 열심을 다하는가 싶다가도, 온 세상이 평화로워지자 순식간에 어린 강아지로 돌아가 싸우며 뒹구니 말이다. - P331
캐드펠은 작업장으로 돌아와 세상의 모든 것과 단절하듯 문을 걸어 잠갔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크 수사와도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작업장 안은 고요했다. 벽에 댄 거무스레한 널빤지들로 내부는 더욱 어두웠고, 희미한 화로 불빛만이 주위를 어슴푸레 밝히고 있었다. 고향 집처럼 아늑한 곳, 바로 이곳이 그가 바라는 전부였다. - P332
"그렇게까지 놀란 표정 하지 말게! 우리 안에 있는 악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면 결코 성인이 될 수 없어. 그리고 헤리버트 형제께서 로버트 부수도원장의 영혼에 어느 정도 은혜 또한 베푸셨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되네!" - P322
"알을 까기도 전에 병아리를 세어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점을 알려주셨잖나." - P322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단순한 행위가 심지어 이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관계에서마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은 얼마나 기묘한가. 마치 어둠 속에 한줄기 빛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조금 더 빛이 비치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지리라. - P300
"정말 너무 멋졌어요." 마크 수사는 허브밭 작업장으로 돌아와 신나게 일을 시작하며 말했다. 그런데 좀 부끄럽기도 하네요. 다른 사람이 골탕 먹는 걸 보면서 통쾌해하다니, 아무래도 제 마음속에 악한 구석이 있는 거겠죠.""저런, 저런." 캐드펠은 바삐 바랑을 열어 단지며 병들을 꺼내면서 무심코 대꾸했다. "자넨 너무 일찍부터 성자가 되려고 하는구먼. 아직 스스로를 즐길 시간이 많이 남았네. 때로는 조금 악해지는 것도 필요하지. 그리고 정말 멋진 일이었던 건 사실 아닌가?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괜히 위선 부리지 말게." - P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