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이 뒤에 올라탔고, 소년들은 비로소 953번 지방 도로로 나섰다. 앙토니는 커브를 돌며 한쪽 다리를 쭉 뻗은 다음 앞으로 나가면서 속력을 냈다. 속도가 높아지자 눈물이 찔끔 나오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나 빠르고, 너무나 젊고, 사고를 낼 깜냥조차 없는 두 소년은 열기가 식은 도로 위를 헬멧도 없이 세차게 달렸다. 어느 순간 사촌이 속도 좀 줄이자고 말했다. - P60

앙토니는 혼자가 되었다. 스테파니와 친구는 여전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앙토니는 초조함을 감추려 새 맥주 캔을 땄다. 다섯 캔째였고 이미 머리가 핑 돌기 시작했다. 마침 오줌이 마려웠고, 화장실을 찾느니 차라리 수영장으로 내려가 호젓한 구석을 찾아보기로 했다. 저 위에는 달빛이 환했다. 앙토니는 비교적 기분이 좋고 무엇보다 자유로웠다. 내일 그리고 몇 주 동안은 아직 방학이었다. 앙토니는 가슴 가득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결국 삶은 그다지 나쁠 게 없었다. - P64

더 이상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뻘쭘해진 앙토니가 잇새로 침을 뱉었다. 소녀들이 자기들끼리 뭔가 눈짓을 주고받자 앙토니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윽고 소녀들은 앙토니를 내버려 두고 테라스로 돌아가 버렸다. 소년은 멀어지는 소녀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좁은 어깨, 청바지에 가려진 엉덩이, 새처럼 가느다란 발목, 어딘지 오만한 움직임을 따라 유연하게 흔들리는 포니테일. 마리화나 기운이 조금씩 퍼지면서 불쾌감, 현기증, 영혼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 조금 전의 흥분 대신 앙토니의 몸을 엄습했다. - P65

노동자들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산업화가 해제되어 버린 도시마다, 가난한 마을마다, 이렇다 할 꿈 없이 살아가는 청소년들이면 누구나 시애틀 출신의 그룹 너바나가 부르는 이 노래를 들었다. 머리를 제멋대로 기른 이 그룹은 일렁이는 마음을 분노로, 우울을 데시벨로 바꿔 주었다. 낙원은 완전히 사라졌고 혁명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이제 남은 일은 온몸으로 힘껏 소리치는 것뿐이었다. - P79

집 안에 들어가 보니 1층에선 끼리끼리 모여 여전히 나지 막하게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머리칼이 젖은 채, 얼마나 소리를 질러 댔는지 거친 목소리로 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폭신한 비치 타월을 몸에 둘둘 만 여자애들은 남자 친구에게 몸을 바싹 기댔다. 공기 속에 수영장 락스 냄새가 떠다녔다. 이제 새벽이 올 테고, 앙토니는 이어질 슬픔, 그를 기다리는 창백하고 괴로운 아침을 생각해 보았다. 엄마에게 된통 야단맞을 일만 남았다. - P80

청소년기에서 벗어난 이들은 대부분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거나 카글라스 또는 전자 제품 전문점 다르티 같은 데서 단기 계약직으로 일했다. 기차역 근처에 케밥 가게를 새로 열었다는 사미가 지나가자, 아이들은 장사가 잘되는지 물었다. 낯빛이 썩 나쁘지는 않았으나, 아이들 모두 지난 번 도산 이후 강박적으로 그를 따라다니는 고민의 실체를 짐작 못 하는 바 아니었다. 한때 이 동네에서 제일 잘나가던 약 도매 상이었으나 이제는 낡은 푸조 205를 끌고 다녔다. 머쓱해진 소년들이 나중에 한번 들르겠다고 한마디씩 거들자, 사미는 올랭 피크 드 마르세유 유니폼 셔츠 아래로 삐져나온 뱃살과 두 명의 아이와 채무를 이끌고 다시 케밥 가게로 떠났다. 그러고 나자 수영장에 갔던 조무래기들이 자전거를 타고 등장했다. 희미한 농지거리가 오고갔지만, 다들 회전목마가 문 여는 시간을 기다릴 뿐 대체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종종 한낮의 열기와 권태가 알코올 효과처럼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와 주먹다짐조차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러고 나면 치명타 같은 고요가 다시 내려앉았다. - P93

오후 3시가 좀 넘어가면서 시간은 밀가루 반죽처럼 한없이 늘어졌다. 매일이 똑같았다. 오후의 빈 구멍 사이로 산만한 무력감이 신시가지 전체를 장악했다. 집집마다 창문은 열려 있었지만 아이들 소리도 TV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신시가지 한복판에 우뚝 선 타워들도 오후의 열기가 만들어 낸 안개 같은 적막 속에서 비틀거리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이따금 세발자전거를 연습하는 꼬마 여자아이가 정적의 모퉁이를 도려냈다. 소년들은 눈을 끔벅끔벅하다가, 야구 모자에 얼룩을 남기며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훔쳤다. 그 안에서 아이들의 신경질이 푹푹 익어 갔다. 다들 반수면 상태였고, 뭔가를 증오했으며, 혀끝으로 담배의 신맛을 느꼈다. 여기 말고 다른 데 살면 얼마나 좋을까. 에어컨이 나오는 사무실 같은 데 일자리를 얻으면 짱일 텐데. 아니면 바다도 좋고. - P95

놀이동산에 전기 차단기가 내려지고, 마지막 손님들도 어둠 속에서 하나 둘 흩어졌다. 매표소의 두 모녀도 소년들에게 잘 가라고 손짓하며 이동식 금고를 들고 떠났다. 고층 아파트들이 일렬로 푸른빛을 뿌렸고, 신시가지의 시간이 밤 속으로 흩어졌다. 남은 건 형체 없는 사람들 무리와 모서리, 불 켜진 창, 여전한 권태뿐이었다. - P107

탐욕스러운 공장의 몸체는 할 수 있는 데까지 버텼다. 선택의 기로에서 공장은 출퇴근길과 노동자들에게 쌓인 피로를 쥐어짜 연명했으며, 물건들이 일단 부려졌다가 무게 단위로 팔려 나간 다음에는 이 도시에 잔인한 출혈만 남긴 운송망들이 공장을 먹여 살렸다. 유령 도시처럼 변하고 구멍이 숭숭 뚫린 이곳은 벽을 창백하게 뒤덮은 항의 문구, 산탄이 곰보처럼 박힌 표지판의 기억에 의지하며 잡초에게 먹힌 자갈처럼 살아갔다. - P139

클레망아데르 거리에 막 접어들 무렵부터 앙토니는 기분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어슴푸레한 불안이 다시 엄습하면서 더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억압, 유년, 치러야 할 대가고 뭐고 전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순간순간 기분이 너무 나쁜 나머지, 이런저런 생각이 화살처럼 빠르게 머릿 속을 통과하기도 했다. 영화를 보면 균형 잡힌 머릿속과 몸에 잘 맞는 옷, 자가용까지 두루 갖춘 사람들이 잘도 등장하건만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앙토니는 자책감이 들었다. 학교에선 꼴찌에 뚜벅이 신세, 여자 친구 하나 없고 별일 없이 지내는 일 조차 서툴기 짝이 없는 신세가 미워졌다. - P155

한 모금 빨았을 뿐인데 앙토니의 입안이 건조하고 텁텁해졌다. 스테파니에게 권한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고 곧 후회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아무래도 그녀에게 키스할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체념에 사로잡혔다. 스테파니의 팔찌, 흠잡을 데 없는 머릿결, 부드러운 피부를 곁눈질하며 앙토니는 그녀가 속한 굳게 닫힌 멋쟁이들의 세상을 그려 보았다. 여름 별장, 가족사진, 덱 체어, 벚나무 아래에 자리 잡은 덩치 큰 개 등 언젠가 치과 대기실에서 훑어본 잡지 속의 ‘클린‘ 하고 ‘해피‘한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그러자 혼란스러우면서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부러워졌다. 스테파니는 앙토니가 가질 수 없는 여자였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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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 한 대가 작업장 안마당으로 후진해 들어 가고 있었다. 나는 뒷문을 통해 내 지하실로 돌아왔다. 그날 작업한 꾸러미 열다섯 개가 화물용 승강기 옆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꾸러미들 모두가 폴 고갱의 복제화 〈안녕하세요, 고갱 씨!〉로 장식되어 저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빛을 발했다. […] 화물용 승강기가 내 꾸러미들을 하나씩 실어갔고, 뒤따르는 파리떼를 두고 짐꾼이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꾸러미가 떠나자 파리들도 성난 광기와 함께 모두 사라지고, 내 지하실 역시 갑자기 버림받은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꼭 내 모습처럼. - P65

짐꾼의 푸른 작업복은 날염된 천처럼 등에 마른 핏자국이 엉겨붙어 있었다. 그가 운전사 옆에 자리를 잡자 운전사는 역겹다는 얼굴로 장갑을 벗어던지고 트럭에 시동을 걸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고갱의 동일한 그림들을 보면서 나는 행복을 느꼈다. 행인들의 눈을 즐겁게 해줄 〈안녕하세요. 고갱 씨!〉였다. 울긋불긋한 이 멋진 트럭과 마주치는 행인들 모두가 기쁨을 맛보리라. 광기에 사로잡힌 파리들은 트럭과 함께 작업장 안마당을 떠났지만 스팔레나 거리의 햇빛에 다시 활기를 띠고 트럭 주위를 정신착란에 걸린 듯이 날아다녔다. 푸른색과 녹색, 금갈색의 저 미친 파리들은 큰 상자들 안에 고객 씨와 함께 갇혀 있다가 제지 공장에서 산과 알칼리 용액 속에 용해될 운명이었다. 녀석들에겐 이미 부패한 이 피보다 더 좋은 게 세상에 없었으니까. - P66

지하실로 도로 내려가려다가 소장과 마주쳤다. […] 그렇게 그의 몸을 일으키는데, 그가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것이 느껴져 나는 또 한번 용서를 빌었다. 무얼 용서해달라는 건지 나도 알 수 없었지만 뭐, 놀랄 일도 아니었다. 늘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게 내 운명이었으니까. 내가 이렇게 생겨먹은 것에 대해, 이런 성질을 가진 것에 대해. 심지어 나 자신에게까지 용서를 빌곤 했으니까······ 나는 죄책감으로 무겁고 비참한 심정이 되어 내 지하실을 바라보면서 터키옥색 집시 여자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는 움푹한 자리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거리의 소음에, 현실의 저 아름다운 음악 소리에 귀기울였다. 건물 다섯 층에서 폐수가 쉴새없이 꾸르륵대며 빠지는 소리와 변기 물 내려가는 소리도 들렸다. 땅 밑 깊은 곳으로 주의를 돌리자 시궁창과 하수구에 콸콸 흐르는 똥과 오수의 희미한 소리도 또렷이 분간되었다. 파리떼는 떠나가고 없었지만 콘크리트 포석 밑에서 쥐들이 찍찍대며 이 도시의 모든 하수도에서 절망적인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지하 세계의 패권을 다투는 전쟁이 변함없이 창궐해 있었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나 자신의 밖과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 역시 마찬가지다. 안녕하세요, 고갱 씨! - P67

내가 보는 세상만사는 동시성을 띤 왕복운동으로 활기를 띤다. 일제히 전진하는가 싶다가도 느닷없이 후퇴한다. 대장간 풀무가 그렇고, 붉은색과 녹색 버튼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내 압축기가 그렇다. 만사는 절룩거리며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지는데, 그 덕분에 세상은 절름발이 신세를 면하게 된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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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은 가시덤불과 잡초를 겅중겅중 뛰어넘으며 경사면을 오르기 시작했고, 앙토니도 그 뒤를 따랐다. 겁이 났지만 어쩐지 달콤한 데가 있었다. 창고 안으로 들어가 처음 몇 분 동안은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창고에는 작은 배와 딩기 420 요트, 카누 몇 척이 금속 고리에 매달려 있었다. 옷걸이에 걸린 구명조끼에서 곰팡내가 훅 하고 올라왔다. 습기를 머금은 어둠 속에서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내다 보이는 호숫가와 반짝이는 수면, 단조로운 풍경은 마치 영화의 한 스틸컷 같았다. - P21

둘이 호흡을 척척 맞춰 사촌이 고른 카누를 금속 고리에서 벗겨 낸 다음 노를 집어 들었다. 서늘한 창고를 막 나서기 전 앙토니와 사촌은 잠시 멈춰 섰다. 날씨가 좋았다. 저 멀리 윈드 서퍼가 호수 수면 위에 선명한 물결을 따라 선을 그었다. 창고 쪽으로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앙토니는 엉뚱한 짓을 하기 전에 찾아오는 짜릿한 현기증을 느꼈다. 전에 프리주에서 오토바이를 훔칠 때도 똑같은 기분이었다. - P22

앙토니와 사촌이 늘 가는 곳이 있었는데 그들이 ‘재활용 센터‘라고 이름 지은, 배를 대기 쉬운 호숫가였다. 하수구 근처여서 한여름에도 사람이 거의 없고 한적했다. 호수는 여러 가지 얼굴을 지녔다. 그들 뒤에 있는 레오라 그랑주 레저 센터의 호숫가. 저 아래에는 캠핑장 호숫가. 좀 더 멀리엔 ‘대두‘ 일당이 주로 모이는 아메리칸 비치. 소나무, 금빛 모래사장, 그리고 바닷가 휴양지에서나 볼 법한 탈의실과 바가 있는 푸앵튀 저편 수상 클럽이 있는 곳이 풍광으로 치면 제일 예뻤다. - P25

오후 6시가 조금 지나자 소녀는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 갈 시간이 되었는지 부산을 떨었다. 앙토니가 소녀 옆에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있어, 소녀가 자리를 털고 일어설 때 무릎이 앙토니의 무릎을 살짝 스쳤다. 여자란 얼마나 보들보들한 존재인지.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완전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소녀의 이름은 스테파니 쇼수아였다.
앙토니는 열다섯 살 여름을 지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시작되어야 했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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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폐지를 압축한다. 녹색 버튼을 누르면 압축판이 전진하고, 붉은색 버튼을 누르면 후진한다. 이것이 세상의 기본적인 움직임이다. 헬리콘의 밸브나 반드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원처럼. 만차는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채, 자신의 잘못이 아닌 치욕을 견뎌야 했다. 그녀에게 닥친 일은 인간적인, 지나치게 인간적인 일이었다. 그런 일을 두고 괴테라면 울리케 폰 레베초프를 용서해주었겠고, 셸링이라도 카롤리네를 용서해주었을 것이다. 라이프니츠라면 그의 아름다운 정부 조피 샤를로테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고, 과민한 횔덜린 역시 곤타르트 부인에게 그랬을 테지만······ - P44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으며,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폐지 꾸러미를 차례로 압축기에 넣고 압축한다. 꾸러미마다 한복판에 책 한 권이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가 펼쳐진 채 놓인다. […] 나는 밤이 새도록 그녀에게 용서를 빌었지만 헛일이었다. 그녀는 도도하게 몸을 세운 채 레너 호텔을 떠났고, 그렇게 노자의 말도 실현되었다. 치욕을 겪고 명예를 지킨다는. 그녀 같은 사람이 바로 그 명백한 사례다······ 나는 『도덕경』의 해당 페이지를 펼쳐 희생물을 바치는 사제처럼 지저분한 빵 종이와 시멘트 부대로 꽉 찬 압축통 한복판에 놓아둔다. 녹색 버튼을 누르면 오물들이 모두 움직이기 시작한다. 절망의 기도를 올리기 위해 꽉 맞잡은 양손처럼 내 압축기의 아가리가 『도덕경』을 분쇄하는 광경을 나는 지켜본다. 그러고 있노라니 먼 과거로 되돌아가 만차의 삶 한 토막과 아름다웠던 내 젊은 시절이 떠오른다. 그 모두의 배후에서, 깊디깊은 땅 밑 하수구를 흐르는 더러운 물소리가 들린다. 그곳에서 두 종족으로 나뉜 쥐들이 생사를 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아름다운 하루다! - P46

무수히 많은 푸른 파리들이 사방에서 미친듯이 날아다녔다. 날개와 몸이 금속성을 내며 소용돌이무늬의 살아 있는 거대한 화폭을 만들어냈다. 얼룩으로 가득한, 잭슨 폴록의 커다란 그림들 같았다. - P50

나는 그 둘의 출현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내 조상들 역시 술을 좀 과하게 마셨을 때는 환영을 보았고, 동화 속 인물들의 방문을 받곤 했으니까. […] 그러니 오늘 내가 좋아하는 그 두 사람이 방문했다고 해서 뭐,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사고를 통찰하는 데 그들 각자의 나이를 아는 게 필수 조건임을 깨달은 건 처음이었다. 파리들의 광무, 그 성난 날갯짓이 점점 활기를 띠면서 내 작업복도 피로 물들었다. 내가 압축기의 녹색 버튼과 붉은색 버튼을 번갈아 누르는 동안에도 산등성이를 쉬지 않고 오르는 예수의 모습이 보였다. 노자는 이미 산 정상에 올라 있었다. 세상을 바꾸고 싶은 열정적인 젊은이와 체념 어린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는 노인. 삶의 근원으로 회귀함으로써 안감을 두둑이 댄 영원의 옷이 만들어진다. 예수는 기도를 통해 현실을 기적으로 만들려고 한 반면, 『도덕경』의 노자는 순진무구의 지혜에 도달하기 위해 자연법칙들을 유일한 방편으로 삼았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 P50

청년들과 아름다운 처녀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빛을 발하는 젊은 예수에게서 나는 눈을 떼지 못한 채 맥주를 단지째 들이켰다. 반면 노자는 홀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무덤을 찾고 있었다. 피 묻은 종이에 극도의 압력이 가해지면서 곤죽으로 짓이겨진 파리떼와 뒤섞인 핏방울이 튀는 와중에도 예수는 그윽한 황홀경에 빠져 있고, 노자는 깊은 우수에 젖어 무심하고도 거만한 자세로 압축통 모서리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믿음이 가득한 예수가 산 하나를 들어 옮기는 동안, 노자는 내 지하실에 불가해한 지성의 그물을 펼쳐놓았다. 예수가 낙관의 소용돌이라면, 노자는 출구 없는 원이다. 예수가 극적인 갈등 상황과 싸우고 있다면, 노자는 도덕과 관련된 상반되는 요소들의 풀리지 않는 문제를 조용히 명상한다. - P52

그 순간 난데없이 소장의 모습이 보였고, 분노와 증오가 가득 서린 목소리가 내 머리 위로 쏟아져내렸다. 고함을 지르는 소장의 손이 고통으로 뒤틀렸다. "한탸, 그 떠돌이 점쟁이 년들이 거기 남아 무슨 짓을 한 게지?" 늘 그렇듯 나는 깜짝 놀라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주저앉아 양손으로 내 압축통을 꽉 잡고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소장이 왜 나를 좋아하지 않는지, 왜 나만 보면 그렇게 험상궂은 표정만 짓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로 말미암은 고통의 낙인이 뚜렷이 새겨지고 부당한 분노가 서려 있는 얼굴. 그 얼굴을 볼 때마다 나는 한없이 비참한 심경에 젖곤 했다. 그지없이 고결한 주인에게 추악한 골칫거리나 떠안기는 밉살스러운 고용인, 그 혐오스러운 인간이 나인가 싶어서······ - P57

집시 여자들이 와 있던 내내 예수와 노자가 내 압축기 옆에 남아 있었지만 이제 나는 혼자였다. 줄처럼 감겨오는 검정파리들의 공격을 쉴새없이 받으며 버림받은 자가 되어 무작정 일에 매달렸다. 그러자 윔블던 대회에서 우승을 막 거머쥔 테니스 선수처럼 의기양양한 예수가 보였다. 반면 초라한 외관의 노자는 재고를 넉넉히 두고도 빈손처럼 보이는 장사꾼 같았다. 예수에게서는 상징과 암호로 이루어진 피 흘리는 현실이 읽혔지만, 수의에 싸인 노자는 엉성하게 다듬은 들보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만 있었다. 예수는 플레이보이 같았고, 노자는 내분비선이 고장난 노총각처럼 보였다. 예수는 오만한 손과 힘찬 몸짓으로 적들에게 저주를 내렸지만, 노자는 체념한 사람처럼 팔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예수가 낭만주의자라면, 노자는 고전주의자였다. 예수는 밀물이요 노자는 썰물, 예수가 봄이면 노자는 겨울이었다. 예수가 이웃에 대한 효율적인 사랑이라면, 노자는 허무의 정점이었다. 예수가 프로그레수스 아드 푸투룸이라면, 노자는 레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이었다······ - P58

우리가 아직 도끼를 들고 뛰어다니며 염소를 치던 시절, 집시들은 이 세상 어딘가에 국가를, 이미 두 차례나 쇠락을 경험한 사회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불과 두 세대째 프라하에 정착해 살고 있는 이 집시들은 자신들이 일하는 곳에 제의의 불을 지피는 걸 좋아한다. 오로지 기쁨을 위해 타오르는 유목민의 불이다. 대충 쪼갠 장작개비들에서 피어나는, 인간의 모든 사고 이전에 존재하는 영원의 상징이며 어린아이의 웃음 같기도 한 불이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린 선물 같은 무상의 불이며. 환멸에 젖은 행인은 더이상 알아챌 수 없게 된 요소들의 생생한 표징이다. 방황하는 눈과 영혼을 덥혀주려고 장작개비들을 태우며 프라하 거리의 구덩이들에서 태어난 불이다······ 눈과 영혼을 덥혀주면서 추운 날에는 손도 그렇게 녹여주는 불이라고, 나는 후센스키 주점으로 들어가면서 생각했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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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토니는 한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어진 눈길로 호수의 물결을 응시했다. 게으름이 딱지처럼 눌어붙은 듯 오른쪽 눈꺼풀이 반쯤 감긴 얼굴이 어딘가 망가진 것 같고 늘 주눅 들어 보였다. 눈은 앙토니의 콤플렉스 중 하나였다. 온몸에 엉겨 붙는 무더위처럼. 땅딸한 몸집, 꾀죄죄한 행색, 265 사이즈 발과 얼굴을 뒤덮은 여드름처럼. 수영이나 할까······. 사촌은 왜 죄다 멀쩡한 걸까. 앙토니는 잇새로 침을 뱉었다. - P15

실종된 녀석의 엄마는 병원에 입원해 진정제를 맞는 중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또 이미 목매달아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밤중에 잠옷만 입고 이 거리 저 거리 헤매는 모습을 봤다는 사람도 있었다. 녀석의 아빠는 경찰이었다.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사람들은 자연히 아랍인들이 복수 차원에서 저지른 짓이라고 의심했고, 경찰인 그가 어떤 식으로든 사건을 해결할 거라고 기대했다. 수색 보트에 탄 작고 다부진 체격의 남자가 실종자의 아버지였다. 뜨겁게 내리꽂히는 햇살 아래 그의 벗어진 머리가 반짝거렸다. 호수 기슭에 모인 사람들은 그의 부동자세를, 그 참을 수 없는 차분함을, 시간이 흐를수록 서서히 벌겋게 익어 가는 그의 대머리를 지켜보았다. 이 아버지의 인내심은 모든 사람에게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차라리 무슨 짓이라도 해 주었으면, 몸을 살짝 뒤척이든가 모자라도 썼으면 하고 사람들은 바랐다. - P17

사촌은 언제나 대담했고 자존감이 넘쳤다. 사촌과 함께라면 지옥이라도 따라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두 집 사이에 복잡한 문제가 얽히면서 앙토니와 사촌은 점점 멀어졌다. 앙토니가 보기에 사촌네는 규모나 상황, 희망, 심지어 경기 여파로 여기저기 만연한 절망마저 너무나 작고 볼품없었다. 사촌이 보는 앙토니네 집은 회사에서 잘리고 부모가 이혼하는 한심하거나 암적인 집안이었다. 그런데 당시 앙토니 주변에서는 그런 일이 대체로 정상이었으며, 그런 범주 밖에 존재하는 모든 일은 상대적으로 용인되기 어려운 것으로 간주되었다. 가족들은 파스티스 몇 모금만 마셔도 연회가 한창 무르익은 순간 언제고 폭발해 버릴 만큼 단단히 뭉쳐, 지하 세계에 간신히 억눌러 담아 온 고통과 분노를 육중한 보도블록 위로 밀어내며 꾸역꾸역 살아갔다. 앙토니로 말하자면 이 모든 것보다 훨씬 우월한 자기 모습을 상상했다. 멀리 떠나기를 꿈 꾸었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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