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명보다 많지는 않겠지? 마이클 프랜시스가 문 너머에서 말한다. 나 놀리는 거지, 에이바는 여전히 웃으며 말한다. 난 이 얘기 안 할 거야.
모니카가 발걸음을 옮겨 문을 밀어 연다. 웃음과 대화가 멈춘다. 침묵이 모든 걸 삼킨다. 모니카가 예상한 그대로다. 형제 자매를 쳐다보면서 이건 부모님에게서 가장 사랑받는 아이의 불리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님 편에서 온 스파이, 저쪽 편으로 취급당한다. 함께 있을 때 그저 함께 있을 수는 있지만 결코 그들 안에 속하지는 못한다. - P293

신발을 벗어놓은 곳을 내려다 본다. 담요를 옆으로 차 신발이 거기에 있는지 확인한다. 크리스마스 아침을 떠올리게 하는 침대보를 들추고 침대 가장자리로 기어가 부모님 각자의 침대 머리맡에 있는 테이블 아래를 확인 해본다. 아무것도 없다. 에이바는 침대에 앉아 양손으로 머리뼈를 힘껏 누른다. 신발을 찾을 수 없다는 게 불현듯 자신에게 벌어진 일 중 최악의 일인 것만 같다. 도대체 이것들이 어디 있는 거야? 꽤 평범한 빨간색 가죽 샌들이었지만, 그것의 부재는 순간 그 샌들에 마법과도 같은 힘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은 가치를 불어 넣었다. - P301

에이바는 분노와 함께 홀로 남는다.
에이바는 이를 갈며 무언가를 벽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만 했다. 대체 왜 가족과 함께 있으면 24시간 언제든 십대 때로 돌아가게 되는 걸까? 이런 역행도 누적될까? 하루에 10년씩 잃게 되는 걸까? - P311

휴이가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어 그녀의 이런 생각들을 아래서 받아 모으고 있는 것 같다. 모니카는 문득 이 아이가 가진 피부의 완벽함에 매료된다. 이 결점 없는 반투명함, 그 표면 아래서 굽이치는 정맥. - P319

구두는 선심을 쓴 것이나 다름없다. 그레타는 특히 이런 더운 날씨라면 구두 신기를 피하려고 무슨 일이든 했을 거다. 그녀는 부은 발목, 건막류, 편평족, 티눈, 뒤꿈치 통증, 발가락 통증으로 항상 고생해왔다—그녀는 발이 자기 인생을 파멸시킨다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녀는 평소에 패브릭 소재의 슬리퍼나 부드러운 뮬을 질질 끌고 다니고, 특별한 상황에서만 구두를 신는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발을 이 가죽 샌들에 끼워 넣었다는 것은 모니카에게 한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그레타는 만반의 준비를 했고 그들은 곧 치열한 접전을 벌이게 될 것이다.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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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서 한 권의 책에 실린 에블린의 작품을 보는 것이, 그리고 그것을 오래된 방의 오래된 침대에 앉아서 보는 것이 기묘하게 위안이 된다. 에이바는 두 쪽에 걸쳐 펼쳐진 한 사진에 손을 얹는다. 얼굴 한쪽에 놀라운 크기의 모반이 있는 한 남자가 죽은 눈의 물고기를 들어 올리고, 찌그러진 차 위에 슬립 차림으로 앉아 있는 다른 한 여자 뒤로 철도 선로가 뻗어 있다. 에이바는 이 사진들에 손을 얹으며 자신이 여기에서 꼼짝 못 하고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다른 곳에 삶이 있다. 지금은 눈앞에 아무런 희망도 반짝임도 없이 이곳에 살지 않는다. 탈출했다. - P272

그의 얼굴이 한때 여동생의 침실이었던 곳에 깔린 낡은 러그를 누르고 있다. 그는 갑자기 이곳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몸통 아래의 바닥 널은 따뜻하고, 두 다리는 평화로이 따로 떨어져 놓여 있으며, 눈을 감은 채 천이 매듭지어진 재미있는 자리에 뺨을 대고 있다. 겨울에 모니카와 어머니가 이 러그를 만들지 않았었나? 천 조각들로 뒤덮인 부엌 테이블을 가로질러 손을 뻗는 어머니의 모습이 섬광처럼 떠올랐다가 이내 흐려지다 사라진다. 어쩌면 그런 일이 있었을지도,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 P273

"혹시······" 그녀가 천장을 살피는 것처럼 머리를 뒤로 젖히며 말을 시작했다.
[…]
"······잘못된 직업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항상이요, 그는 말하고 싶었다. 매일 매 순간 그래요. 저는 버클리에서, 윌리엄스에서, 뉴욕대에서 세미나를 하고 있었어야 해요. 프랑스 유스호스텔에서 술 취한 십대들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을 게 아니라. - P281

그는 개구리 위로 두 손을 덮었다. 손바닥 안에서 개구리가 뛰어올랐다. 사람의 몸에서 꺼내진 심장이 그렇게 뛸 것 같았다.
[…]
창문이 활짝 열렸고, 그는 밤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개구리를 놓아주기 전 그는 잠시 바깥의 낯섦과 이질감에 사로잡혔다—저 밖의 세상에는 빛이 없었지만 귀뚜라미와 새와 보이지 않는 생명체가 맥박처럼 박동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1주일, 1년을 이곳에서 보낸 것 같았다. 유스호스텔이라는 폐쇄된 환경에서, 눈부신 빛, 나무가 줄지어 선 벽, 거미가 많은 샤워실, 소리가 울리는 식당, 좁은 이층침대, 시끄러운 아이들과 함께. 하지만 이 공간, 이 벨벳 같은 어둠과 별이 박힌 하늘이 바로 여기 이 벽 너머에 있었고,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공기는 또 얼마나 부드러운지, 그 비밀스러운 소란이 얼마나 완벽히 매혹적인지. - P283

그는 좋은 남자였다. 본인도 그게 사실인 걸 알았다. 그는 여전히 그 모든 것, 그 모든 선함과 의무와 끈기 있음과 마음 씀씀이가 있는 사람이었다. 정반대의 어떤 행동에 착수하기 전까지는. - P285

그레타의 오래된 집착 중 하나였다. 그레타는 매주 무언가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온통 조개껍데기로 만들어진 그림, 맨섬(isle of Man) 모양으로 생긴 재떨이, 코끼리 발자국 우산꽂이. 굉장해, 그레타는 자신이 산 물건을 두고 그렇게 말했다. 완전 싸게 샀어. 가게 주인들이 그레타가 다가오는 걸 보면서 어떻게 손을 비비며 준비 태세를 취했을까. 그녀의 어머니는 그들이 말하는 모든 걸 믿었고, 사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으며, 단 하나만 더 사면, 그 하나만 더 사면 자신의 삶을, 자신의 집을 완전히 바꾸어놓을 수 있다고 믿었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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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학부모의 밤, 주일 학교 소풍, 거리 파티, 미사 후의 행사에서 다른 어머니들을 바라보며 자신은 왜 저런 어머니를 가질 수 없는지 의아했다. 날씬하고, 멋지고, 대체로 조용한 어머니. 왜 내 어머니는 비만이고, 특이하게 옷을 입으며, 저렇게 시끄럽고, 거리낌 없고, 머리가 헝클어져 있고,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모두에게 말하고 싶어 안달인 걸까? 그는 부끄러움에 몸이 움츠러든 적이 많았다. 저녁에 재봉틀로 뚝딱 만들어낸 텐트만 한 크기의 어머니의 꽃무늬 가운에, 신발 끈 위로 툭 불거져 나온 살에, 플라스틱 그릇에 담긴 샌드위치, 소시지롤, 록 케이크 따위를 종종 완전히 모르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곤 할 때가 그랬다. 그런 걸 보면 몸에도 영향이 있었다—사지에 열감이 느껴지며 힘이 쭉 빠지는 느낌, 이마 뒤에 뭔가 엉기는 느낌. 그는 버스나 기차에서, 그 어떤 공적인 모임에서도 고집스럽게 어머니와 멀리 떨어져 앉았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그와 그녀를 연결 지을까 봐서였다. - P166

에이바는 주전자를 수도꼭지 아래에 대보지만 물줄기가 옆으로 발사돼 손목을 적시자 움찔한다. 뭔가 잘못됐다. 이 집, 평생을 알고 지낸 이 집이 그녀에게 농간을 부리고 있다. 만 번도 넘게 지나다닌 출입구는 갑자기 좁아진 것 같다. 지날 때 날카로운 모서리에 팔꿈치가 걸린다. 아기일 때 누워 있고, 아장아장 걷던 러그는 그녀를 넘어뜨리기로 공모라도 했는지 신발이 자꾸 걸린다. 선반은 낮아져 관자놀이에 타격을 줄지도 모른다. 전등 스위치는 창문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틀림없다. - P170

그는 둘의 말소리를 능가하도록 큰 소리로 말한다. "그러니까 들어봐요. 오늘 계획이 뭐예요?"
어머니와 여동생이 그를 돌아보고, 그는 놀랍도록 비슷한 둘의 눈이 점점 커지는 걸 보며 느낀다. 둘 다 두려워하고 있구나, 둘은 그저 둘 사이의 공기를 메우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구나, 헤어브러시 논쟁은 단지 그런 긴장감을 풀기 위한 수단일 뿐이구나. - P172

팔짱을 끼고 집 안 층계참을 반복해서 거닐며 마음에 가득 차고 넘치는 장면을 어렵게 견디는 날들이 있다. 비 오는 어둑어둑한 저녁 피카딜리선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비에 맞아 반짝이는 우산, 걸어서 10분 거리인 그녀의 예전 아파트와 어머니의 집, 안개 낀 날의 하이베리 필드, 프림로즈 힐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광경. 향수병. 그녀는 향수병이 정말 실제로 누군가를 그리움으로 병들게 하고 아프게 하고 미치게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저녁 즈음이 되면, 그녀는 항상 준비돼 있다. 슬픔을 뒤로 감춘다. 마치 숨겨야 하는 추한 모습이라도 되는 양. - P175

모든 게 제대로 돌아가게 할 거고, 되돌아가지 않을 거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다. 누구에게도 다시 패배했다고 보이지 않을 거다. 간호 학위에 실패하고 아이가 없고 남편이 떠난 모니카. 모니카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을 작정이다. 흔들리는 지붕, 밤이면 삐걱대는 굽도리널, 좀먹은 가구, 적대적인 이웃이 있는 이 집에 살 것이다. 여기 살 것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 P175

마이클 프랜시스에게 묻는다면, 로버트의 퇴직은 그의 인생에 일어난 일 중 최악이라고 답할 것이다. 아버지의 직장은 아버지 인생에 변함없는 일과,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이유, 하루를 보낼 장소, 시간을 채울 업무, 저녁이면 돌아오기 위해 출발할 장소를 제공했다. 그것이 없는 아버지는 부두에 묶어놓지 않은 보트, 목표 없이 이리저리 떠다니며 부딪히는 보트와 같다. - P180

그는 가늘고 긴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오소리털 붓끝으로 턱을 문지른다. 아버지 빼기 어머니는 풀 수 없는 방정식이다. 아버지의 침묵은 어머니의 떠들썩함으로 발효되고, 아버지의 질서와 냉정함은 어머니의 혼돈과 극적인 속성 때문에 더욱 강조된다. 그들 중 누구도 그레타에 의해 활력을 얻지 못한 로버트를 보지 못했다. 마이클 프랜시스는 그레타를 만나기 전 몇 년 간의 아버지 모습을 결코 상상할 수가 없다. 아버지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어머니 없이 아버지는 삶을 어떻게 꾸려나갔을까? - P183

샌드위치를 하나 입안으로 던져 넣었는데, 어쩐지 놓치고 만다. 바닥에 떨어진 샌드위치가 신발 발가락 부분에 비스듬히 맞고 퉁겨진 뒤 쓰레기통 주변 어딘가로 사라진다.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일처럼 꼭 들어맞는 것 같다. 지금 그가 처한 삶의 현실과 완전히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자신을 혐오하는 것 같은 아내를 둔 남자, 가족이 위기 속에서 산산조각 난 남자, 열기와 가뭄에, 물 부족에 포위돼버린 남자, 아버지가 신만이 아는 어딘가로 도망쳐버린 남자. - P196

애정의 물결이 에이바 안에 차오른다(본능적이고 즉각적이다). 그리고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걸 느낀다. […] 결국 모니카일 뿐이다. 에이바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냥 모니카다. 평생 알아온 모니카, 언니다. 뉴욕에서 내내 상상 속에서 만들어온 파멸의 악령이 아니다. 그냥 모니카다. 에이바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왜냐면 그게 사람들이 으레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몇 년 만에 친언니를 만났을 때 그렇게 하지 않는가? 그렇게 안아주고 나면 예전에 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든 그런 것들은 싹 사라지고 다시 시작하게 되는 거다. 그리고 어쩌면 전에 마이클 프랜시스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잊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 P198

에이바는 옆에 있는 사이드 테이블의 접시를 내려다본다. 주변에 우박처럼 쏟아진 부스러기, 우각호 모양으로 말라붙은 차를 보며 시차로 인한 피로가 배고픔과 메스꺼움 사이의 한가운데를 정확히 나누고 있음을 느낀다. 모두를 이해해야겠다는, 모두의 위치를 파악해야겠다는, 기억해야겠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다른 누군가가 사라지기로 결심할 경우를 대비해서다. 에이바는 머릿속에서 하나하나 확인한다. 마이클 프랜시스는 여전히 주방에서 어슬렁거리고 있고, 어머니와 모니카는 복도에 있다. 게이브는 저 멀리 대서양 건너편에 있다. - P200

에이바는 바로 앞 카펫에 있는 그들의 발을 보지 않으려 노력한다. 마이클 프랜시스의 맨발, 어머니의 슬리퍼, 끈에서 빨간
색 헝겊 조각이 피어오르는 모니카의 버건디색 샌들. 에이바는 대신 자신의 손을 본다. 손은 여전히 단어로 뒤덮여 있다. 흐릿해지는 검은 잉크, 글자는 앞으로 뒤로 흘러간다. - P201

그녀의 언니, 모니카는 그녀를 피했고 마치 그녀가 거기 없는 것처럼 그녀를 통과하거나 지나쳐 봤다. 그건 모든 걸 부인하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건, 우린 방을 같이 쓴 적 없다, 나는 길을 건너려고 네 손을 잡은 적이 없다, 난간에서 상처를 입었을 때 네 머리에 붕대를 감아준 건 내가 아니었다, 넌 내가 입다 작아진 옷을 입고 자라지 않았다, 내가 신열로 몹시 아파 누워 있을 때 내 입에 차를 떠먹여준 건 네가 아니다, 넌 수년 동안 같은 침대에서 내 옆에 누워 자지 않았다, 너에게 눈썹 뽑는 법, 신발 버클을 매는 법, 스웨터 손세탁 법을 알려준 건 내가 아니다,라는 걸 의미했다. 거기서 느껴지는 부조리함과 아픔에 에이바는 당황했다. 그 모든 시간을 보낸 후에도 그런 식으로 회피하는 모니카의 모습을 떠올리자 마치 새로 생긴 멍처럼 욱신거리고 아프다. - P211

방을 함께 썼던 사람들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게 서로 스미는 것이 있다. 누군가의 가까이에서 밤새도록 같이 잠을 자면, 서로의 공기로 숨을 쉬고, 마치 꿈인 것처럼 무의식이 얽혀 마음의 회로가 서로의 마음 가까이에서 흐르고, 그렇게 되면 말을 하지 않아도 정보가 교환된다. - P215

에이바는 하늘을 흘끗 올려다보지만 이내 눈을 가려버린다. 태양이 지붕과 나무 위에서 정점에 이르러 있다. 정오 또는 그쯤 이 분명하다. 앞에 펼쳐진 광경, 그러니까 자동차, 버스, 가게, 유아차를 끄는 젊은 여자가 모두 어른거리고 굴절된다. 태양 빛이 모든 것에 침투해 가게 쇼윈도에서, 자동차 범퍼에서, 유아차 바퀴에서 나온 빛이 망막을 헤집고 들어온다. - P220

에이바는 그에게 뭘 말했는데, 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레타는 선 자리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신발이 담긴 모자 상자에서 가만히 손을 뗀다. 자신이 들은 말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정말 에이바가, 그에게 뭘 말했는데, 라고 묻지 않는다는 사실이 연못에 던져진 돌덩이처럼 그레타의 마음속으로 가라앉는다. 항상 반쯤 의심하던 것이 갑자기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렌즈가 안개 낀 장면에 왜곡되어 있었던 것처럼 갑자기 모든 게 선명히 보인다. 그레타는 손을 옷장의 나뭇결을 따라 쓸어내린다. 꼭대기에 홀로 놓인 좀약을 제거한다. - P256

그레타는 로버트의 의자에 앉는다. 뒤에 걸린 트위드 재킷의 딱딱한 칼라가 등에 n 모양으로 압박을 가해온다. 처음에는 막연히, 그러다 분명히 제멋대로 비죽비죽 강렬한 충동이 든다. 남편이 보고 싶고, 이 모든 것을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 어쩌면 말의 형태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단지 그의 곁에 앉아 그도 지금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거다. 딸들, 사랑하는 자식들 사이에 끔찍하게 꼬인 관계,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에 대해.
그레타는 그곳에 앉아 고립감을, 그의 부재를 느낀다. - P258

그레타는 항상 모니카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았다. 처음 그 아이를 본 순간부터 죽 그랬다. 다른 두 아이와는 이러지 않았다. 모니카만 그랬다. 그녀는 출산으로 인한 비몽사몽에서 돌아오면서, 흔들리는 구급차 안에서 떠나가라 우는 아이를 곁에 두고 혼자 깨어나면서, 모니카가 어쩌면 아무것도 보지 못했을 테지만, 너무 많은 것을 보았고, 지나치게 많이 보았고, 또 그 아이가 목격한 장면을 절대 잊지 못하리란 것을 알았다. - P263

아버지는 모니카를 생각조차 하지 않고 걸어 나가버렸다. 이 모든 걸 남겨둔 채. 히스테릭한 그레타를 진정시키고, 홍수처럼 밀려드는 형제자매와 친척들을 맞게 하고서. 아버지는 분명 모니카가 이 문제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으리라는 것을 알았을 터다. 신경이나 썼을까? 아니, 그러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버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가버렸다. 아버지는 모니카가 모든 걸 팽개치고 집에 와 이 모든 걸 해결하리라 예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이보다 더 이기적이고 무심한 행동은 없다.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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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카는 고양이의 어깨 쪽 털에 손을 얹었다. 척추를 따라 볼록볼록 솟은 구슬과 어깨뼈의 삼각형 모양이 느껴졌다. 항상 섬뜩하게 느껴지는데, 고양이의 뼈란 어찌나 약한지. 이 고양이는 단단하고 큰 생명체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안아보면 어찌나 새처럼 가냘프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지, 마치 여기 없는 것처럼. 또 어찌나 놀랍도록 따뜻한지. - P67

모니카는 고개를 숙였다. 고양이를 흔들어 생명을 되찾게 하고 싶었다. 발과 손톱을 펴 모니카의 소매를 잡아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누군가는 이런 죽음에는 어떤 여러 단계 사이에 분투, 싸움, 대결 같은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죽음은 언제나 그저 표류하는 것, 그냥 미끄러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끔찍할 뿐이다. 이토록 쉽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 생각하면. - P69

그레타가 항상 하는 말이었다. 어떤 것들은 그냥 놔두는 게 더 낫다고. - P73

모니카는 가방을 챙겨 일어났고, 피터는 그녀의 팔을 살짝 잡으며 그저 말했을 뿐이다. "이해해요." 딱 그렇게 말했다. 이해해요. 어찌나 멋진 말인지, 심연 같은 이해를 담은 말, 그녀의 눈을 깊이 바라보며 하던 말. 모니카는 즉시 그가 그 말을 왜 했는지는 잊어버렸고, 그 문장은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일반적인 하나의 문장이 됐다. 그는 이해한다. 모든 것을. 그녀의 모든 것을. 마치 위대하고 부드러운 담요가 감싸는 것 같았다. 그는 모니카의 눈을 들여다보며 이해한다고 말했다. - P77

모니카가 원했던 건 아기가 아니었다. 아이였다. 모니카는 담요에 꽁꽁 싸인 생명체에 열광하지 않았다. 두려웠다. 그 연약함, 계속되는 요구 사항, 너무 새것인 나머지 몸에서 여전히 물과 우유와 피가 연상되고, 출산에 따르는 그 모든 고통과 노력과 폭력성. 아니다. 그녀는 할 수 없었을 거다. 어머니가 에이바와 했던 것들을 해내지 못했을 거다. - P90

에이바는 붉은 전구를 톡 치고 빨랫줄에 끝이 매달린 기다란 필름 조각을 바라본다. 마치 맹수의 접근을 감지한 동물처럼 필름이 어지럽게 흔들리며 뒤집힌다. 필름 중 하나의 가장자리를 잡고 마른 걸 확인한 뒤, 위로 들어 빛에 비추어 본다. 조그만 유령들이 불꽃 안에서 화르륵 타오른다. 딱 벌린 하얀 주둥이들 끝에는 색이 없는 머리카락, 그들 뒤로 최후의 심판일 같은 검은 배경 하늘. - P127

기묘한 날씨는 기묘한 행동을 불러온다. 용광로 같은 더위 속 분젠 버너는 전자의 교환, 화합물의 분열 및 다른 물질의 결합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에 결국 불볕더위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더위는 많은 걸 방치하게 하고, 사람들의 경계를 약화시킨다. 사람들은 일상적이지 않다기보다 부주의하게 행동하기 시작한다. 기질에서 벗어난다기보다 오히려 거기에 충실하게 행동한다. - P155

여우 한 마리가 주차된 트럭 뒤에서 나와 사뿐사뿐 나아가 다가 길러튼 로드 중간에서 잠시 멈춘다. 그러다 꼬리를 동글게 말아 세우고 정원 벽 너머로 사라진다. 이른 시간, 지하철이 돌로 포장된 길 아래에서 몸서리친다. 집을 이루는 벽돌에서, 창문 틀에서, 마룻널에서, 발라놓은 회반죽에서 반향이 느껴진다. 어딘가에 충격을 주며 떨리는 윙윙거림이 거리를 따라 이동해 테라스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지나간다. 하지만 집들은 이런 것에 이미 익숙해져 있고, 거주자들도 마찬가지다. 주방 선반에 늘어선 텀블러가 요동치고, 4번 집 벽난로 선반 위의 휴대용 회중시계가 들썩들썩한다. 길 건너편 집 침대 옆 테이블에 놓아둔 귀걸이는 바닥을 구른다. 거리에서 한참 아래에 있는 집의 한 여성은 침대에서 돌아눕는다. 아기가 잠에서 깨 일련의 막대로 이루어진 흉곽 모양 아기용 침대에 들어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다. 이게 뭐지, 다들 어디에 있지, 그러다 누군가 와달라고 울부짖는다. 지금 와주세요, 제발. - P157

상승하는 열기로 이미 무거워지기 시작했어도 이 시간대의 공기는 차분하다. 그레타는 둘 사이의 공기를 더듬어 나아가 여자의 팔에, 목에, 그리고 온몸에 가 닿는다. 에이바가 품 안에 있다. 셋째 아이, 항상 놀라움을 주는 존재, 막내 아기, 골칫거리. 둘 사이를 갈라놓던 그 모든 공간과 거리가 사라지고 무너져 내렸다. 이건 에이바고 에이바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러 가지가 놀랍지만 에이바의 키가 유독 놀랍다. 그레타는 줄곧 에이바가 자신과 비슷한 몸집이라고 생각해왔다—조그맣고 작은 체격, 다른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표현하길 원하든. 하지만 이제 에이바의 키는 그레타보다 족히 몇 인치는 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P162

지난밤 늦은 시각, 클레어와 다퉜다. 일련의 끔찍한 다툼 중 하나, 알아채지 못했던 절벽에 다다른 것처럼 다가오는지도 몰랐던 끝이 예고도 없이 눈앞에 들이닥치는 다툼이었다. 깊은 바다에서 들려오는 울부짖음, 바위를 때리는 파도의 굉음이 들리는 다툼이었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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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모든 것이 너무도 익숙하면 때로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구별해내기 어렵다. 어떤 노래가 친숙해지면 그 노래의 개별 음정을 듣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 P12

땀이 이마와 머리의 경계를 따라, 척추를 따라 배어 나온다. 두 발은 발작적으로 땅 위를 움직이고, 이런 생각이 처음으로 든 것은 아니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궁금해진다. 일터에서 집으로, 가족과 저녁 식사가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돌아가는 한 아버지. 아니면 너무 많은 책과 너무 많은 보고 서를 넣은 서류 가방을 들고 시간에 쫓긴 채 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는 한 남자. 청년기를 지난, 정수리 부근의 머리카락이 아주 살짝 가늘어지고, 밑창을 교체할 때가 된 신발을 신고, 꿰매야 할 양말을 신은 한 사람. 남자는 이 불볕더위에 고통받는다. - P23

그는 현관문을 열고 매트에 발을 디디며 서류 가방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소리친다. "안녕! 나 왔어!"
그는 잠시, 정확히 자신의 관념 속 인물이 된다. 일터에서 돌아와 현관에서 이제 막 가족을 맞이할 남자. 세상이 바라보는 그의 모습과 그가 사적으로 인지하는 자신의 모습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분열도 없다.
"아무도 없어?" 그가 다시 외친다.
집은 고요하기만 하다. - P25

아빠와 아들은 잠깐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는 궁금하다. 일터를 나서면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찌는 듯한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이 타는 듯한 도시를 가로질러 오면서 그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내내 두려워했다는 점을 휴이가 아는지 궁금하다. 집에 도착하면 아내는 주방에서 향긋하고 영양이 풍부한 무언가를 아이들에게 차려주고, 아이들은 깨끗하게 제대로 차려입은 채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기를, 이 가망 없는 희망을 품어왔다는 것을 이 아이는 알까? 이 아이는 최근 벌어지는 일에 대해 얼마나 이해할까? - P27

그는, 다시 그리고 잠시, 바로 그 관념 속의 사람이 된다. 부엌에 있는 한 남자, 딸을 공중으로 안아 올리는 남자. 그는 나무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냄비를 내려놓는다. 팔로 아이를 감싼다. 충만해진다—무엇에? 사랑보다, 애정보다 더한 무언가. 너무 예리하고 원초적이어서 동물의 본능과도 같다. 잠시 그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 이 애를 잡아먹는 일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딸을 먹어버리고 싶다. 목의 주름에서 시작해서 진주처럼 빛나는 부드러운 팔까지.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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