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나무를 더 아래로 훑어 내려가 생명의 기원에 점점 더 다가가면 먹장어(찾아보지 마시라. 이름은 귀엽게 들릴지 모르지만 빨판 같은 주둥이와 면도날 같은 이빨을 지니고 있어 악몽 속 괴물 같다)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들은 흔히 칠성장어와 함께 무악류無類로 분류된다. 그다음으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게으름에 대한 경고의 예로 자주 지적하던, 고착생활을 하는 멍게 (피낭동물)가 있다. 멍게는 엄밀히 말해(어쨌든 오늘날 분류학자들에 따르면) 척추동물은 아니지만, 척삭이라는 척추와 비슷한 구조물을 가장 먼저 선구적으로 갖춘 생물 중 하나다. 다시 말해 멍게는 퇴보한 존재가 아니라 정반대로 혁신가였던 셈이다. - P241

질서를 만들어내는 일종의 메커니즘이 우리 내부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러니까 우리가 자연을 분류하는 방법에 관한 매우 구체적인 믿음 체계를 획득할 수 있는 성향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것을 암시한다. 누가 한 부류에 속하고, 누가 서로 다른 부류에 속하며, 누가 제일 윗자리를 차지하는지 등을 판단하는 분류법을 말이다.
또 다른 연구들은 우리가 이런 직관적인 규칙들을 얼마나 일찍부터 따라왔는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사람은 생후 4개월째에 이미 고양이와 개를 구분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직관적 질서가 우리 내부에 장착된 장치의 일부라는 사실이 그 질서가 진실임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저 그 질서가 유용하다는 의미일 뿐이다. 그 질서가 우리 인간 종이 우리를 둘러싼 혼돈을 성공적으로 항해하고 탐험하도록 도움으로써 수 세대에 걸쳐 기여해왔다는 뜻이다. - P245

의자의 존재를 믿지 않는 철학자 트렌턴 메릭스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는 그의 화살통 속 화살의 수만 하나 늘었을 뿐이다.
"내겐 그리 충격적이지 않네요." 내가 어류의 범주가 해체된 일에 관해 숨 가쁘게 설명하고 나자 그가 한 말이다. 그것은 정확히 그가 자기 학생들에게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우리 발밑의 가장 단순한 것들조차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전에도 틀렸고, 앞으로도 틀리리라는 것. 진보로 나아가는 진정한 길은 확실성이 아니라 회의로, "수정 가능성이 열려 있는" 회의로 닦인다는 것. - P250

애나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는.… 뭐, 사실 애나가 물고기를포기한 건 아니다. 하지만 애나는 그것이 "부적합"이라는 단어와비슷한 게 아니냐고 물었다. 애나의 등짝에 찰싹 붙어 있는 단어. 애나를 수용소의 벽돌벽 뒤에 던져 넣고 애나가 세대를 이어갈 그 모든 가능성을 절단해버린 바로 그 단어. 나는 그렇다고, 그것과 아주 비슷하다고 대답했다. 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물고기에 대해 연민이 느껴진다고 했다. 일단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고 나면 더 이상 그걸 제대로 바라보지 않게 된다는 사실에 대한 연민이었다. - P250

물고기들의 인지가 얼마나 폭넓고 복잡한지 보여주었다. 그에 따르면 물고기들은 우리보다 더 많은 색을 보며, 특정한 기억 과제에서 우리보다 더 나은 실력을 보이고, 도구를 사용하며, 바흐의 음악과 블루스를 구별할 줄 안다고 한다. 게다가 어떤 종들은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고도 한다. - P251

에모리대학의 유명한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은 이것이 인간이 항상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상상 속 사다리에서 정상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와 다른 동물들사이의 유사성을 실제보다 과소평가하는 것 말이다. 드 발은 과학자들이 나머지 동물들과 인간 사이에 거리를 두기 위해 기술적인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가장 큰 죄를 범하는 집단이라고 지적한다. 그들은 침팬지의 "키스"를 "입과 입 접촉"이라고 부르고, 영장류의 "친구"를 "특히 좋아하는 제휴 파트너"라고 부르며, 까마귀와 침팬지가 도구를 만들 수 있다는 증거에 대해서는 인류를 정의하는 종류의 도구 제작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해석한다. 어떤 인지과제에서 동물들이 우리보다 뛰어나다면–예를 들어 특정한 새종들은 수천 개의 씨앗이 있는 정확한 위치를 기억할 수 있다–그들은 그것을 지능이 아니라 본능이라고 치부한다. 이와 같은 수많은 언어적 수법을 드 발은 "언어적 거세"라고 표현했다. 즉 그것은 우리가 언어를 사용해 동물들의 중요성을 박탈하는 방식이자, 우리 인간이 정상의 자리에 머물기 위해 단어들을 발명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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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류는 존재한다.
포유류도 존재한다.
양서류도 존재한다.
그러나 꼭 꼬집어,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 P236

그 발견은 단순했고, 미묘했고, 특출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아주 놀라운 관계들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박쥐는 날개가 달린 설치류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낙타와 훨씬 더 가깝고, 고래는 실제로 유제류(발굽이 있는 동물로, 사슴이 속한 과)라는사실이 그렇다. - P238

새들이 공룡이라는 사실. 버섯은 식물처럼 느껴지기는 하지만 사실은 동물과 훨씬 가깝다는 사실. - P238

분기학자들은 공통의 진화적 참신함을 찾는 일에 초점을 맞출 것을 상기시킨다. 한순간이라도 비늘이라는 외피에 시선을 다빼앗기지만 않는다면, 더 많은 걸 밝혀주는 다른 유사점들을 알아차리기 시작할 거라고. 예를 들어 폐어와 소는 둘 다 호흡을 하게 해주는 폐와 유사한 기관이 있지만 연어에게는 없다. 폐어와 소는 둘 다 후두개(기관을 덮는 작은 덮개 모양의 피부)가 있다. 연어는? 유감스럽게도 후두개가 없다. 그리고 폐어의 심장은 연어의 심장보다는 소의 심장과 구조가 더 비슷하다. 이런 설명들이 계속 이어지며, 마침내 페어는 연어보다는 소와 더 가깝다는 결론으로 학생들을 이끌어간다. - P239

물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생긴 생물들 중 다수가 자기들끼리보다는 포유류와 더 가까운 관계라는 사실. - P239

실상 물속 세상을 들여다보면, 비늘로 된 의상 밑에 산꼭대기 산어류들만큼이나 서로 다른 온갖 종류의 생물들이 숨어 있다. 이를테면 육기어류鰭魚類, Sarcopterygii–폐어와 실러캔스coelacanth–는 우리와 상당히 가까우며,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진화적 사촌, 허파가 위에 있고 꼬리가 저 아래 있는 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거대한 진화의 분계선 너머에 조기어류條鰭魚類, Actinopterygii가 있다.
연어, 농어, 송어, 장어, 가아Gar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겉보기에는 물고기처럼 미끌미끌하고 비늘이 있어 육기어류와 쌍둥이같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다를 수가 없다. 연골어강이라 불리는 상어와 가오리들도 있는데, 이들은 참 수수께끼 같은 집단이다. 그 매끈한 피부와 곡선을 띤 몸을 볼 때마다 나는 늘 포유류와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들은 비늘이 있는 송어와 장어보다 우리와 훨씬 더 거리가 멀고, 진화상으로도 우리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다고 한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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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서 자유와 유년기, 아이를 갖겠다는 꿈까지 너무나 많은 것을 앗아간 관념들을 전파한 데이비드 스타 조던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애나는 화가 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애나는 분노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려고, 흉터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다. - P220

새장 안에서는 미니어처 디스코볼이 돌아가면서 햇빛을 반사해 수십 개의 작은 반짝거림을 방 안에 뿌리고 있었다. 프리티 보이와 프리티 걸이 마치 손뼉을 치는 것처럼 날개를 파드닥거렸다. 아침이 재빨리 흘러가는 동안 모두의 잔에 담긴 얼음 큐브가 딱딱 깨지며 딸그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곳은 움직임과 빛과 웃음과 따뜻함으로 이루어진 동물원이다. 이 거실은 살아 있다. - P220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내 언니를 보았다면, 아마 언니도 부적합하다고 판단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는 현금출납기 앞에서 허둥대는 사람이니까. 또한 그는 나 역시 부적합하다고 판단했을것이다. 나의 슬픔은 그에게 불쾌감을 주었을 것이고, 도덕적실패의 표시로 여겨졌을 테니까. 숨에서 유황을 내뿜는 인생의 낭비자. 나는 그에게 통쾌하게 반박해줄 말이 있었으면 싶었다. 현란하게, 당신이 틀렸다고 말해줄 방법이. 우리는 중요하다고, 우리는 사실 아주 중요하다고 말해줄 방법. 그러나 주먹이 올라가는 게 느껴지자마자 내 뇌가 주먹을 다시 잡아당겼다. 왜냐하면 당연히, 우리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우주의 냉엄한 진실이다. 우리는 작은 티끌들, 깜빡거리듯 생겨났다가사라지는, 우주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들이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이 진실을 무시하는 것은 정확히 데이비드 스타 조던과 똑같이 행동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우월성에 대한 터무니없는 믿음 때문에 자신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폭력을 저질러도 괜찮다고생각하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 그럴 순 없다. 명민하고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호흡, 모든 걸음마다 우리의 사소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와 다르게 말하는 것은 죄를 짓고, 거짓을 말하고, 기만과 광기로, 그보다 더 나쁜 것으로 자신을 이끌고 가는 일이다. - P221

천천히 그것이 초점 속으로 들어왔다. 서로서로 가라앉지 않도록 띄워주는 이 사람들의 작은 그물망이, 이 모든 작은 주고받음–다정하게 흔들어주는 손, 연필로 그린 스케치, 나일론 실에 꿴 플라스틱 구슬들–이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그물망이 받쳐주는 사람들에게는 어떨까? 그들에게 그것은 모든 것일 수 있고, 그들을 지구라는 이 행성에 단단히 붙잡아두는 힘 자체일 수도 있다. - P226

바로 그때 그 깨달음이 내 머리를 때렸다.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깨달음. 애나가 중요하다는, 메리가 중요하다는 말. 혹은 이 책을 읽는 당신(넘어지지 않게 꼭 붙잡으시라)이 중요하다는 말.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자연을 더욱 정확하게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것이 민들레 법칙이다!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잡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똑같은 식물이 훨씬 다양한 것일 수 있다. 약초 채집가에게 민들레는 약재이고 간을 해독하고 피부를 깨끗이 하며 눈을 건강하게 하는 해법이다. 화가에게 민들레는 염료이며, 히피에게는 화관, 아이에게는 소원을 빌게 해주는 존재다. 나비에게는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며, 벌에게는 짝짓기를 하는 침대이고, 개미에게는 광활한 후각의 아틀라스에서 한 지점이 된다. - P226

인간들, 우리도 분명 그럴 것이다. 별이나 무한의 관점, 완벽함에 대한 우생학적 비전의 관점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금세 사라질 점 위의 점 위의 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많은 관점 중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에 있는 한 아파트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그 한 사람은 훨씬 더 많은 의미일 수 있다. 어머니를 대신해주는 존재, 웃음의 원천, 한 사람이 가장 어두운 세월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근원.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그토록 열심히 인식시키고자 애썼던 관점이다.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계층구조에 매달리는 것은 더 큰 그림을, 자연의, "생명의 전체 조직"의 복잡다단한 진실을 놓치는 일이다.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 그어놓은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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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었다. 벌써 캄캄한 밤이 되어 버렸다. 이 어둠이 가게 주인과 손님들의 시선으로부터 나를 가려 줄것이다. 우선 밖에서 가게 안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만약 비야르가 없더라도, 내 얼굴에 드리워진 절망을 눈치챌 사람은 없을 것이다. - P49

1분 정도 시간이 흘렀다. 나는 완전히 맥이 풀린 채로 그 자리를 떠났다. 억지로 기운을 내보려 하지도 않고, 오히려 가능한 한 슬픔을 지속시키기 위해 애를 쓰며 걸었다. 마음을 꽁꽁 닫아걸고, 내가 정말로 보잘것 없고 비참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부러 더 각인시키려 애쓰며 걸었다. 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찾고 있었다. - P50

소심한 나는 눈동자를 빼고는 전신마비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비야르와 사실은 그다지 친한 사이도 아니라는 생각이 그제야 났다. - P52

그에게 얻어먹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래도 ‘이번뿐‘이라고 못을 박는 데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 말을 도저히 가볍게 흘려 넘길 수가 없었다. 역시 나는 마음씨 착하면서도 통이 큰 사람과는 인연이 없나 보다. 만일 내가 부자였다면 상대를 최대한 극진히 대접할 텐데…… - P57

"봐 여기 있는 녀석."
그가 검지로 한 병사의 얼굴을 가리켰다.
"이 녀석은 죽었어. 그 옆에 있는 녀석도."
나는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는 척했지만, 사실 지갑속에 든 물건이나 뒷면에 손때가 잔뜩 묻은 사진만큼 상대를 지루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나는 지난번 전쟁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의 지갑을 봐 왔던가! 만약 와인에 취하지만 않았다면 신분증 같은 건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비야르도 분명 지긋지긋했을 것이다. - P59

비야르와 약속한 밤이 되었다. 나는 식사를 마치고 생제르맹 거리로 산책을 나갔다. 상점들의 불빛은 이미 다 꺼져 있었다. 아크등만이 나뭇잎을 어렴풋이 비추고있다. 노란색의 긴 전차가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바퀴가 보이지 않아 상자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레스토랑은 전부 텅 비어 있었다.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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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의 정서적 해부도를 쫙 펼쳐놓고 볼 때 가장 눈에 띄는 원흉은 그 스스로 상당히 자랑스러워했던 두툼한 "낙천성의 방패"가 아닌가 싶다. 데이비드는 "자기가 원하는 것은 다 옳은 것이라고 자신을 설득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쓴 루서 스피어는 그가 자기 자신에게 갖는 확신과 자기기만과 단호함이 세월이 흐를수록 더 강화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자기길을 막는 모든 걸 뭉개버릴 수 있다고 믿는 그의 능력은 자신의 길이 진보로 이어질 올바른 길이라고 확신하게 되면서 몇 배는 더커졌다" 데이비드는 공개적으로는 자기기만을 그토록 공격했지만 사적으로는, 특히 시련의 시기에는 더욱더 자기기만에 의존했던 듯하다.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다 "긍정적 착각은 견제하지 않고 내버려둘 경우 그 착각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공격할 수 있는 사악한 힘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경고한 그 심리학자들의 말이 옳았던 것 같다. - P202

마침내 나는 제비들이 원을 그리며 날아다니는 페니키스 섬의 헛간에서 루이 아가시가 젊은 데이비드의 정신에 관념의 씨앗 하나를 심어놓는 순간에 다다랐다. 그것은 자연 속에 사다리가 내재해 있다는 믿음이었다. 자연의 사다리, 박테리아에서 시작해 인간에까지 이르는, 객관적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향하는 신성한 계층구조이 관념이 데이비드의 세계를 다시 건축했다. 그것은 꽃을 수집하던 그의 부끄러운 습관을 "가장 높은 수준의 선교 활동"으로바꿔놓았다. 그리고 그의 가슴속 비어 있는 공간을 그가 평생 인생을 항해하면서 직업과 상과 아내와 자녀와 학장직을 얻을 수 있도록 이끌고 다닐, 폭발적인 목적의식으로 가득 채웠다. 그 관념은그가 하나의 재앙을 헤쳐나가고 이어서 다음 재앙을 헤쳐나가는 연료가 되어주었다. 그는 지느러미나 두개골의 형태 속에 도덕적 안내도가 담겨 있다는 믿음을 품고서, 나침반처럼 자연을 읽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충분히 꼼꼼하게 살펴보면 누구를 모방해야 할지, 누구를 비난해야 할지 알아낼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한마디로 깨달음으로, 평화로, 그 무엇이든 사다리의 꼭대기에 놓여있을 열매를 향해 나아가는 진실한 경로를 알게 될 거라고. - P203

동물은 인간이 스스로 우월하다고 가정하는 거의 모든 기준에서 인간보다 더 우수할 수 있다. 까마귀는 우리보다 기억력이 좋고, 침팬지는 우리보다 패턴 인식 능력이 뛰어나며, 개미는 부상당한 동료를 구출하고, 주혈흡충은 우리보다 일부일처제 비율이 더 높다.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을 실제로 검토해볼 때, 인간을 꼭대기에 두는 단 하나의 계층구조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상당히 무리해서 곡예를 해야 한다. 우리는 가장 큰 뇌를 갖고 있지도 않고 기억력이 가장 좋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가장 빠르지도, 가장 힘이 세지도, 번식력이 가장 좋지도 않다. 같은 배우자와 평생을 함께하고, 도구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심지어 우리는 지구에 가장 새롭게 나타난 생물도 아니다. - P205

나투라 논 파싯 살툼Natura non facit saltum,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고 다윈은 과학자의 입으로 외쳤다. 우리가 보는 사다리의 층들은 우리 상상의 산물이며, 진리보다는 "편리함"을 위한 것이다. 다윈에게 기생충은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라 경이였고, 비범한 적응성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크건 작건, 깃털이있건 빛을 발하건, 혹이 있건 미끈하건 세상에 존재하는 생물의 그 어마어마한 범위 자체가 이 세상에서 생존하고 번성하는 데는 무한히 많은 방식이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 P206

무엇보다 애나는 아이를 갖고 싶었다. 아이들이 애나의 유일한 꿈이었다. 애나는 웃음과 온기가 가득한 활기찬 가정을 꾸리길원했다. 애나는 자기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애나를 잡아가둔 사람들 역시 어느 정도는 분명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수용소에서 애나가 하던 일이 수용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애나는 아이들을 목욕시키고 노래를 불러주고 파자마를 갈아 입혀주고 흔들어서 재워주었다. 나라의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는 적합하지만, 자신의 아이를 돌보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것일까.
여러 해 동안 애나는 누군가ㅡ부모나 대통령이나 어디선가 선을 위해 투쟁하는 누군가가 와서 자신을 해방시켜주기를 소망하며 불임화를 거부했다. 자신의 정체성에서 지키고 싶은 한 부분, 바로 어머니라는 정체성을 자신을 억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어주기를 거부했다. 자신을 계속 살아가게 해주는 단 하나의 희망의 근원을 넘겨주기를 거부한 것이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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