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이었다. 벌써 캄캄한 밤이 되어 버렸다. 이 어둠이 가게 주인과 손님들의 시선으로부터 나를 가려 줄것이다. 우선 밖에서 가게 안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만약 비야르가 없더라도, 내 얼굴에 드리워진 절망을 눈치챌 사람은 없을 것이다. - P49
1분 정도 시간이 흘렀다. 나는 완전히 맥이 풀린 채로 그 자리를 떠났다. 억지로 기운을 내보려 하지도 않고, 오히려 가능한 한 슬픔을 지속시키기 위해 애를 쓰며 걸었다. 마음을 꽁꽁 닫아걸고, 내가 정말로 보잘것 없고 비참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부러 더 각인시키려 애쓰며 걸었다. 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찾고 있었다. - P50
소심한 나는 눈동자를 빼고는 전신마비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비야르와 사실은 그다지 친한 사이도 아니라는 생각이 그제야 났다. - P52
그에게 얻어먹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래도 ‘이번뿐‘이라고 못을 박는 데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 말을 도저히 가볍게 흘려 넘길 수가 없었다. 역시 나는 마음씨 착하면서도 통이 큰 사람과는 인연이 없나 보다. 만일 내가 부자였다면 상대를 최대한 극진히 대접할 텐데…… - P57
"봐 여기 있는 녀석." 그가 검지로 한 병사의 얼굴을 가리켰다. "이 녀석은 죽었어. 그 옆에 있는 녀석도." 나는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는 척했지만, 사실 지갑속에 든 물건이나 뒷면에 손때가 잔뜩 묻은 사진만큼 상대를 지루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나는 지난번 전쟁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의 지갑을 봐 왔던가! 만약 와인에 취하지만 않았다면 신분증 같은 건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비야르도 분명 지긋지긋했을 것이다. - P59
비야르와 약속한 밤이 되었다. 나는 식사를 마치고 생제르맹 거리로 산책을 나갔다. 상점들의 불빛은 이미 다 꺼져 있었다. 아크등만이 나뭇잎을 어렴풋이 비추고있다. 노란색의 긴 전차가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바퀴가 보이지 않아 상자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레스토랑은 전부 텅 비어 있었다.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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