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치란 존재와 망각 사이에 있는 환승역이다. - P435

창세기 첫머리에 신은 인간을 창조하여 새와 물고기와 짐승을 다스리게 했다고 씌어 있다. 물론 창세기는 말(馬)이 아니라 인간이 쓴 것이다. 신이 정말로 인간이 다른 피조물 위에 군림하길 바랐는지는 결코 확실하지 않다. 인간이 암소와 말로부터 탈취한 권력을 신성화하기 위해 신을 발명했다고 하는 것이 더 개연성 있다. 그렇다. 염소를 죽일 권리, 그것은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 와중에도 전 인류가 동지인 양 뜻을 같이한 유일한 권리다.
이 권리가 당연하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서열의 정점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3자가 이 게임에 끼어들기만 한다면 끝장이다. 신이 "너는 다른 모든 별들의 피조물 위에 군림하거라."라고 말한 다른 행성에서 온 방문자가 있다면, 창세기의 자명함은 금세 의문시된다.
화성인에 의해 마차를 끌게 된 인간, 혹은 은하수에 사는 한
주민에 의해 꼬치구이로 구워지는 인간은 그때 가서야 평소 접시에서 잘라 먹었던 소갈비를 회상하며 송아지에게 사죄를 표할 것이다. - P445

창세기에서 이미 신은 인간에게 동물 위 군림할 권한을 주었으나, 그 권한이란 단지 빌려 준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될 수도 있다. 인간은 이 행성의 주인이 아니라 단지 경영인에 불과하고 어느 날엔가 경영 결산을 해야만 할것이다. 데카르트는 한술 더 떴다. 그는 인간을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다름 아닌 그가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것을 부정했다는 사실에는 필경 심오한 물리적 일관성이 있다. 인간은 소유자이자 주인인 반면, 동물은 자동인형, 움직이는 기계, 즉 ‘Machina Animata‘에 불과하다고 데카르트는 말한다. 동물이 신음 소리를 낸다면, 그것은 하소연이 아니라 작동 상태가 나쁜 장치의 삐걱거림에 불과한 것이다. 마차바퀴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낸다면, 그것은 마차가 아픈 것이 아니라 기름칠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물의 신음 소리는 이런 식으로 해석되어야만 하고 실험실에서산 채로 조각나는 개 때문에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 - P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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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감정의 파도를 헤쳐나갈 때 부모가 흔들림 없이 옆에 있어주기를바란다. 우리는 아이의 인생을 바로잡으려고 애쓰지 않고 그맘때쯤의 혼란을 이해해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아이는 자기감정을 다스리고 제 나름의 대응 전략을 세우는 법도 배운다. 부모의 이런 태도는 아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는 것과 같다.

"몸도 마음도 제멋대로라 닻을 잃은 배처럼 불안하겠지만, 내가 여기서 네 곁에 있으면서 네 본모습을 비춰줄게." - P167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감정에 대해 자책하기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의 무모한 면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아이를 가짐으로써 우리에게 활짝 열린, 어쩌면 우리를 산산이 부숴놓을지도 모르는 이 기회를 활용해 과거의 모습에서 벗어나 좀 더 너그럽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변모해 가면서 말이다. - P178

"내 안의 그림자가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참에 아이가내 자신에 대해 알려주는 교훈을 배워야 해." - P181

아이 때문에 몹시 화가 날 때도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자.
‘내가 지금 무엇 때문에 발끈하는 거지? 왜 그렇게 아이에게 불만인 걸까? 아이가 내 안의 어떤 점을 건드리고 있기에 이러는 걸까?‘
이때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방에서 잠시 나가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다. 그러면 ‘지금 도움이 필요한 건 아이가 아니라 바로 나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살황을 재정비할 여유가 생긴다. - P184

부모가 남들에게 맞추려고 솔직한 감정을 숨기면, 자식들 또한 가식적으로 사는 법을 배운다. 부모가 남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자신을 바꾸는 모습을 보면, 아이들도 인정받기 위해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고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려 한다.
부모가 자신의 욕구보다 남들의 욕구를 우선시하면 아이들도 자신보다 남들을 더 가치 있게 여겨야 한다고 배운다. 이런 아이들은 대단히 관계 지향적이라서 그들의 정체성 또한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부모가 아이들을 응석받이로 키우면, 아이들은 부모를 이용해도 괜찮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더 나아가 아이들이 자기에 도취되어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부모 스스로가 건강한 경계를 만들지 못하면 아이들은남들의 경계를 무시해도 된다고 배운다. 부모가 자기 공간과 욕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면, 아이들은 자신의 공간과 욕구가 남들의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게 된다. 부모가 "안 돼"라고 말해야 할 때 그러지 못하고 아이가원하는 대로 계속 받아주면 아이들은 인생이 뜻대로 안 될 때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우지 못한다. - P194

다른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자신을 맞춰가는 사람들이 많다. 인정받고 확인받고 싶어서 자기의 본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바꾸는 것이다. 타고난 모습을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가르치지 않는 부모 밑에서 자라면, 우리는 우리의 욕구를 저버리고 부모가 인정할 만한 모습으로 살아야 부모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배운다. 우리의 욕구보다 부모의 욕구에 더 맞춰진 이런 가식적인 모습에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자기 개성대로 살아가고자 할 때 죄책감을 느낀다.


죄책감은 우리의 진짜 목소리를 가로막는 어두운 감정이라 어딘가 부족하고 불안한 흔적을 남긴다. 이렇게 죄책감이 각인된 아이들은 자신의 타고난지혜를 믿지 못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영원히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주위 사람들을 심판하고 죄책감을 자극하는 방법으로 그런 감정에서 벗어나려 한다. - P197

"내게 아이의 영혼을 지배하거나 심판할 권한이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자 아이가 내 인정을 받고 싶어하거나 인정을 받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부모의 인정을 받는 것은 아이의 당연한 권리이니 마음껏 인정해주자. 아이의 평범한 모습에서 묻어나는 생기발랄함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이해할 지혜를 구하자. 아이의 존재를 점수나 다른 지표로 평가하지 말자.
매일 아이와 앉아서 아이의 존재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은혜를 누리자. 나자신의 평범함을 되새기며 그 아름다움에 만족하자. 나는 내 아이의 타고난 모습을 평가하거나 인정하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아이가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 결정하기 위해 여기 있는 것도 아니며, 다만 내 아이의 정신적 동반자로서 여기 있을 뿐이다. 내 아이의 영혼은 한없이 지혜롭기에 그에 걸맞은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내가 내 본모습을 올바르게 대하는 방법 또한 비춰줄 것이다." - P201

아이의 일상에 의미를 불어넣는 한 가지 방법은 아이의 경험을 이야기로 만드는 것이다. 아이의 인생에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도록 돕는 미묘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은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존재감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아이가 대단한 일을 해낼 때만이 아니라 소소한 순간에도 곁에 있다면, 부모는 아이의 모험에 함께하게 된다. 우리의 존재감과정서적 교감은 아이에게 일관성과 질서, 체계가 잡힌 느낌을 준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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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 이미지에서 탄생했다. 이미 말했듯 소설 인물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처럼 어머니의 육체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의 상황, 하나의 문장, 그리고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본질적인 것은 여전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근본적이며 인간적 가능성의 씨앗을 품고 있는 은유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작가란 자기 자신 이외의 것은 말할 수 없다고들 하지 않는가? - P341

그리고 인류가 매번 더욱 성숙하면서 다시 태어나는 다른 행성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영원회귀에 대한 토마시의 생각이다.
지구(1번 행성, 미체험 행성)에 사는 우리는 당연히 다른 행성에서 인간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막연한 개념밖에 지닐 수 없다. 인간이 더 현명해질까? 인간이 완숙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반복함으로써 이에 도달할 수 있을까?
비관주의와 낙관주의가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런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 속에서만 가능하다. 낙관주의자란 5번 행성에서는 인간 역사가 피를 덜 흘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비관주의자란 그런 것을 믿지 않는 자이다. - P345

신학적 예비지식은 조금도 없었지만, 어린 나는 순간적으로 똥과 신은 양립할 수 없으며 또한 인간이 신의 모습을 본 따 창조되었다는 기독교의 인류학적 근본 명제가 지닌 허약성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것이다. 둘 중 하나다. 인간은 신의 모습에 따라 창조되었고 따라서 신도 창자를 지녔거나, 아니면 신은 창자를 지니지 않았고 인간도 신을 닮지 않았거나. - P377

똥은 악의 문제보다 더욱 골치 아픈 신학 문제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으며 따라서 인류 범죄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점은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똥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을 창조한 신, 오직 신에게만 돌아간다. - P378

인간이 구경거리를 제공할 수 밖에 없게 선고된 상황이 있게 마련이다. 침묵하는 권력(강 건너의 침묵하는 권력, 벽 속에 숨긴 조용한 도청장치로 변신한 경찰)에 대항하는 그의 전투란 군대를 공격하는 연극 단원의 전투인 것이다. - P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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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이자, 내려놓자, 한발짝 떨어져서 가만히 살펴보자."
생각과 감정은 내면의 상태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그러니 섣불리 반응하기보다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다. - P141

사실 남에게 베푸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 내면상태를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모가 아이에게 가르칠 수 있는 가장 값진 교훈은 깨어있는 자신의 모습을 펼쳐 보이며 인생이라는 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생이 우리 앞에 제시하는 상황을 지혜롭게 끌어안을 때 성공의 열쇠를 얻게 된다는 사실을 부모가 행동으로 보여준다면, 그것이야말로 아이에게 주는 멋진 선물이다.
부모에게 이런 관점을 배운 아이들은 언제까지나 삶을 우호적으로 대하게된다. 아이들은 인생의 교훈이 가혹하게 느껴질 때조차 그들에게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모든 경험을 스스로에 대한 알아차림과 성장을 도모하는 기회로 받아들이면, 인생을 친구이자 본모습을 찾아가기 위한 친절한 동반자로 여기는 법도 함께 배우게 된다. - P142

부모가 된다는 건 우리가 지금껏 자기 자신이라 믿어온 정체성을 영영 포기하는 복잡한 과정이다. 자식이라는 새로운 영혼을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내면의 공간을 만들려면 기둥처럼 버티고 있던 우리의 기존 생활방식을 무너뜨려야 한다. 부모가 되기 전의 우리 모습은 예전만큼 힘이 없고, 그렇게 유지될 수도 없다. 아이들이 일단 삶에 들어오면 그 영향력은 지울 수가 없으며, 우리는 거기에 맞춰 자신을 재정비해야 한다. - P145

"어디서부터가 너이고 어디까지가 나인지 모르겠어. 낮과 밤이 찬란함과 고단함으로 뒤섞여 흐릿해지고, 나는 고무나 밀랍처럼 아주 말랑말랑해졌지.
네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고 다 들어주니 마치 없는 사람같아. 네가 내 곁에 없을 때조차 나는 너를 생각하며 너와 함께한단다. 나는 단 한순간도 너와 떨어져 있지 않을 거야." - P147

"아니야, 이러면 안 돼."
아마도 끊임없이 "안 돼"라고 말하는 자신을 발견하겠지만, 그렇게 말하는것이 쓸데없는 짓이라는 생각은 결코 하지 말자. 점잖게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계를 정할 때는 일관되고 단호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아이가 부모를 발로 차고 물어뜯는 이유는 단지 "나 엄마 때문에 화났어" "아빠 때문에 화났어"라고 말하는 법을 몰라서다. 아이가 화가 난 듯 울고불고 발버둥치는 것은 "도와줘요, 사실 나 너무 괴로워요"라고 외치는 것과 같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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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끈한다는 것은 인생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것에 반발한다는 뜻이다.
"나는 이 상황을 원치 않아. 일이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게 싫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아이나 배우자, 친구들의 삶의 방식에 반감을 갖는 것은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이유는 우리가 집착하는 우리의 이상적인 모습, 즉 우리의 에고가 흔들리는게 두렵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재치 있게, 창의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그냥 무시하고 발끈하는 반응을 보인다. 이런 반응이 나타나는 방식은 각자의 고유한 인생대본과 역할, 정서적 유산에 따라 다르다.
깨어있는 상태라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을 진짜로 자각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우리 앞에 펼쳐진 현실을 바로 그 순간, 있는 그대로 대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때 현실은 우리가 이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말한다. - P99

감정을 가만히 지켜보는 법을 배우면 더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다. 모든 감정을 받아들인다는 건 단순히 체념해버리는 것과 전혀 다르다. 고통을 그저 고통으로 여길 뿐 더 보태거나 빼지 않는다. 물론 고통은 견디기 힘들다. 당연하다. 그러나 고통을 부정하거나 발끈함으로써 더 키우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면, 고통은 어느 순간 지혜로 승화된다. 당신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포용할 수 있게 되면 당신의 지혜도 그만큼 커질 것이다. 지혜가 커지면 연민도 함께 늘어난다. - P103

‘지금껏 내가 주지 못한 것 중에 아이가 내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 P110

우리는 모두 예측할 수 없고, 때로 잔인해 보이기까지 하는 삶의 이치를 받아들여야 하지만, 희생자로 살지 말지는 어디까지나우리의 선택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내가 더 성장할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을 거부하고 있는 걸까? 내가 발전하려면 무엇을 받아들여야 할까? 이런 혼란은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어떤 목적을 수행하는 것일까?‘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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