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그리드는 언덕에 앉아 날개를 펴고 바람에 모든 것을 맡기는 새들만이 느낄 수 있는 그런 힘을 감지했다. - P204
"마투티넘, 마투티넘······." 라틴어로 내일이라는 뜻인데 철도 부지에 있는 기도서에서 본 글귀였다. 그 단어가 입 안의 진주처럼 그에게 박혔다. 자신의 섬에 돌아왔는데도 좀처럼 침통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곳에서 낳고 자란 이 남자는 평정심을 잃지 않고 집에 도착하기를 바랐지만, 결국 목사에 대한 것은 물론 다른 모든 것도 다 실패했다는 사실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섬은 단단한 바위이며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으나 세상이 삐딱한 지금 이렇게 신앙심이 고조되긴 처음이고 전에 없이 어깨가 무겁게 느껴져 해안에서 돌을 내리고 페링의 강철 부분이 나무에 닿을 때까지 몇 미터 미끄러지게 놔두었다. - P212
라스는 북쪽 창 밖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바다는 검고 부드러웠다. 납처럼. 타르처럼. - P237
하늘 높이 해가 뜨고 새들이 다시금 불협화음을 냈다. 온 섬에 눈이 반짝이며 흩날려서 얼룩말이 뛰어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바브로는 다시 의자를 들고 나가 그물을 만들었다. 수잔은 잉그리드 옆에서 잠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잉그리드는 날이 밝자마자 아빠뿐 아니라 엄마도 영원히 떠났다는 걸 깨닫고 그 사실이 거센 바람처럼 사무쳐 참기 힘들었다.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해도 부모님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언제나처럼 부모님이 있을까 봐 눈으로 섬 이곳저곳을 살폈다. - P243
앞치마에 조개껍데기를 챙기고 수잔과 함께 집으로 걸었다. 잉그리드는 수잔을 보며 어릴 때는 조개껍데기가 돈이라 생각했고 섬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껍데기를 엄청나게 주워서 집과 헛간 창틀에 쭉 늘어놓았는데 어느 날 엄마가 보물을 묻을 장소를 따로 찾아 주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수잔을 데리고 다시 그것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수잔은 이번 겨울에 네 살이 되지만 생일을 알 수 없었다. 수간과 생일과 찾지 못한 보물을 생각하면 다른 문제를 잊을 수 있었고, 그제야 섬이 원래의 모습으로 보였다. - P244
세상에 적응 하려고 무진장 애를 썼는데 그는 단지 살아가는 것뿐 아니라 바뢰이섬을 발전시켜서 자신이 물려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물려 주려고 했으며, 목사는 그것이 삶의 사슬이자 법칙이라고 보았다. 어쨌든 이 말은 잉그리드가 평생 동안 바다 위 움직이지 않는 바위라고 생각해 온 것이 사실은 썩어 가는 뗏목이었고, 자기 아빠가 계속 떠 있게 만들려고 애썼다는 것을 의미했다. - P257
맘베르게트 목사는 각기 다른 전략의 플러스마이너스가 조심스럽게 더해져 잉그리드가 바이를 제대로 운영하려는 황금 공식을 찾았다는 감이 왔다. 동물과 육지와 사람과 바다 사이 최적의 비율은 조심스럽게 고안된 균형 속에서 유지되어야 많지도 적지도 않은 지금 인구로 사는 그 섬이 돌아가는 것이라 목사는 미소를 지었다. - P259
잉그리드는 그걸 아빠한테 배웠다. 침묵. 기적을 부르기도 하는 침묵을. 봉투에 들어 있는 증권과 사본들. 아니, 잉그리드는 그걸 엄마에게 배웠다. 그런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더 이상 미소를 짓지 않았다. - P264
그 후 그녀의 마음속에서 천천히 위기감이 느껴졌으며 범죄자가 섬에 와서 그들이 갖고 있는지도 몰랐던 무언가를 훔쳐 가고 그들의 삶에 오점을 남긴 뒤로 무언가가 바람을 타고 왔다. 새와 바다와 눈과 주방의 수도와 독수리가 자리 잡은 부두 창고의 지붕까지. 그녀는 바닥을 가로지르는 고양이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고, 그것이 동물의 심장 박동처럼 부풀었다가 수축하는 단단한 리듬이 되었다. - P265
한스는 잠시라도 떨어지는 게 싫다며 식탁에서 늘 그녀 맞은편에 앉았는 데 그게 불과 한두 해 전이라고. 그리고 마리아가 잠이 들었다 깨어 보니 손이 말 위에 올려져 있어 그 뜨거운 살갗 아래로 근육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고 했다. 잉그리드는 이해한다고 대답했지만 걱정스러웠다. 그리고 아빠가 자신이 죽을 걸 미리 알고 있었는지 물었다. 마리아는 몰랐을 거라고 대답하며 그는 죽어야 할 때 죽었기에 좋은 죽음이고, 다른 좋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미리 아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해 주었다. - P269
더운 늦여름 날 갑자기 잿빛 바다안개가 지평선에서 벽처럼 일어나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왔고, 섬을 차례로 푸르스름한 잿빛 어둠 속에 가두고 삼켜서 모든 사람과 사물이 차가운 담요에 말려 있는 것처럼 만들었다. 그 전까지는 사방이 막힘없이 보였는데 지금 그들은 양 떼는 물론 건조대나 덤불이나 등대나 바뢰이의 반짝이는 흰 집도 보이지 않았다. 바로 앞에 난 풀잎만 겨우 눈에 들어올 정도이며 비가 오지 않는데도 온몸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 P273
바다안개는 대낮에 그 어둠을 가져와 일식으로 시야를 가렸다. 가족들은 조용히 연장을 내려놓고 따뜻한 옷으로 몸을 감싸고 바위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내면의 빛을 밝혀서 (눈먼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아무도 이해할 수 없고 남과 공유할 수도 없고 아무 소용도 없는 기억이나 파편을 살폈다. - P273
눈이 보이지 않으면 다른 감각이 더 살아나기에 쐐기풀과 늪지와 해초와 젖은 울의 냄새가 강하게 피어오르고, 안개는 바다처럼 짜고 낯선 차가움으로 피부를 감싸고, 솜털오리조차 육지로 올라와 날개를 땅 위로 펼치고, 곤충과 동물들은 이곳 사람들처럼 침묵하여 소라 껍데기에서 들리는 소리나 죽은 쥐를 곱게 내린 눈 위로 질질 끌 때 나는 소리처럼 이상한 소리만 안개 속에서 휙휙거렸다. - P273
한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해가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처음에는 삶은 대구의 눈처럼 게슴츠레하게 먼 북쪽에서 나타나더니 점점 더 노란색으로 바뀌고 한층 황금빛으로 변해 마지막 남은 안개를 모조리 몰아내고 야생마처럼 사방으로 그들의 시야를 터 주었다. 일할 수 있는 시간이 반으로 줄었지만 어쩌면 하루 안에서 새로운 날이 다시 주어진 것이라 가족들은 낫을 들고 작업에 들어갔다. - P27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