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는 가만히 서서 땅바닥만 쳐다보는 가족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일일이 악수를 했는데 어느 누구도 고개를 들지 않았고 심지어 늙은 마틴조차 붉은 울 모자만 벗을 뿐 목사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잉그리드의 새하얀 손을 잡았다. 손톱은 때도 없고 물어뜯은 자국도 없이 잘 다듬었고 옴폭 들어간 작은 부분마다 관절이 자리했다. 목사는 예술 작품 같은 조그만 손을 잡고 가만히 서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손도 열심히 일하는 여성의 손, 힘줄이 튀어나오고 흙 때가 잔뜩 끼고 굳은살이 박인 거친 남자의 손, 여기 있는 가족들의 나뭇조각처럼 투박한 손으로 변할 것을 직감했다. - P9
"넌 새로운 것만 보면 웃는구나." 그는 딸이 장난과 진심의 차이를 안다는 걸 알고 말했다. 딸은 울거나 반항하거나 거역하는 법 이 없었고 한 번도 아프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필요한 게 뭔지 배워 나갔다. 이런 딸을 걱정하는 마음은 그만 떨쳐 버려야 한다. - P17
잉그리드는 손질한 명태를 질질 끌며 앞장서서 걸었고, 물고기에서 떨어진 마지막 핏방울이 가녀린 종아리로 흘러내렸다. 한스는 어깨에 나뭇가지 네 개를 올리고 겨드랑이에 도끼를 끼우고 손에는 딸의 마른 옷을 들고 걷다가 잠시 멈춰 서서 북서쪽에 떠 있는 해를 바라보았다. 해는 점점 옅어지고 흐려져서 이내 달로 바뀔 것이다. 그렇게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는 곧바로 낫자루를 수리할지, 아니면 몇 시간 자고 다음 날 아침 로즈에이커에 이슬이 맺히기 전에 작업을 시작할지 고민했다. 이슬은 항상 이상한 붉은 풀이 자라는 로즈에이커에 가장 먼저 맺혔다. - P18
드물게 편지가 담긴 병도 발견하는데 발견할 사람에 대한 기대와 사적인 비밀이 담긴 편지는 정해진 수신인이 있는 경우 섬사람들이 그 대상에게 전해 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들 무심해져서 병을 열고 편지에 적힌 언어를 이해할 수 있으면 그 피상적이고 애매모호한 내용을 살핀 다음 병 속에 담긴 메시지는 동경, 희망, 이루지 못한 삶을 전해 주는 신비로운 매개이기에 소유도 폐기도 아닌 물품보관함에 집어넣었다. 병은 끓는 물에 소독해서 레드커런트 주스를 담거나 빈 채로 헛간 창가에 놓아두는데, 햇살이 병 속에 들어와 파랗게 빛을 내고 바닥에 흩어진 마른 풀 위로 반짝였다. - P21
수레가 언덕을 올라가는 동안 마리아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섬의 철학자인 마리아는 사물을 다른 시각으로 보았다. 다른 섬에서 온 터라 비교 대상이 있기에 이런 걸 경험, 더 나아가 지혜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 점은 또한 바라보는 시선 혹은 섬이 얼마나 다르냐에 따라 정신분열을 가져다줄 수도 있었다. - P28
지형이 개방적으로 노출되어 있으니 누군가는 가문비나무나 소나무 같은 상록수를 해안가에 심어 방풍림으로 쓰고 노르웨이의 이상적인 묘목장으로 키우자는 좋은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작은 가문비나무 묘목을 크기와 상관없이 섬마다 무상으로 나눠 주면서 이 나무를 땅에 심어 키우면 후대에 연료와 목재로 쓰일 거라고 말한다. 바람이 토양을 바다로 쓸어 가는 것을 막고 그 전까지는 낮이고 밤이고 늘 바람에 시달렸던 인간과 동물 모두에게 쉴 곳과 안식이 찾아울 것이다. 게다가 섬은 더 이상 지평선에 떠 있는 관자놀이처럼 보이지 않고 잡초가 무성한 버려진 땅과 북쪽 선창을 닮을 것이다. 아니, 누구도 지평선을 망가뜨리는 이런 짓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지평선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자원이고 티가 나지 않지만 꿈속에서 떨리는 시신경처럼 그 자체로 중요하다. 아니, 이 나라가 파멸의 기로에 들어서는 엄청난 부를 얻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이런 일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 P30
모든 세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억하고 싶은 일만 기억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 생각은 분명 어딘가 목적지가 있고 최악의 경우 같은 자리를 빙빙 돌다가 시간이 지나면 되돌아온다. - P39
섬사람들은 카르비카의 폐허와 집 두 채가 사라진 이유를 알지못해도 여전히 폐허를 존중했다. 가족들은 발길을 피하고 아이들은 놀지 못했다. 새들도 둥지를 틀지 못했는데 흔한 솜털오리조차 그럴 수 없었다. 하물며 집을 허물어 나온 돌조차 에이커 사이의 다른 돌담과 기초벽에 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새로운 돌을 찾는 편을 택했고, 그래서 폐허는 그 자리에 기념비 혹은 묘지처럼 남아 쐐기풀과 분홍바늘꽃이 무성한, 너무 춥고 또 너무 더운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높은 언덕에서 폐허를 바라보면 서로 다른 손이 쓴 한자처럼 보였다. 겨울이면 눈이 폐허 꼭대기에 쌓여 완전히 하얗게 뒤덮이기 전에 죽은 갈색 풀 위로 폐허가 한층 두드러졌다. - P39
넓은 바다라는 불길로 해가 저물 때 그들은 붉은 지평선에 드리운 숫양의 실루엣을 보았다. 바다에 떠 있는 바위처럼 생긴 뗏목에 올라탄 작은 곤충 같았다. 바람이 제 방향으로 불 때면 양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렸다. - P48
어른들의 얼굴은 돌을 조각해놓은 것처럼 냉랭했다. 그들은 속삭이고 눈썹을 한일자로 모으고 웃어 보려고 했지만 가식적이라는 걸 스스로 잘 알아서 분위기가 한층 더 무거워졌다. 또한 바뢰이섬의 건물들은 지금까지 모든 것을 견뎌 왔고, 그건 사실이지만 순전히 과거를 입증하는 것일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 한때 카르비카에 집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것처럼. - P58
섬사람들은 절대 두려워하지 않는다. 만일 그랬다면 섬에서 살지 못했을 것이다. 재산을 전부 정리해서 섬을 떠나 숲이나 계곡에 사는 다른 사람들처럼 살았을 것이다. 섬사람들은 어두운 성향이 있어 두려움이 아니라 침통함에 빠져 버리기에 그런 상황이 오면 재앙과도 같을 것이다. - P58
그들은 밖으로 나 갔고 맹렬한 하늘 아래서 바람과 홍수의 강을 헤치며 남쪽으로 세 개의 돌담을 향해 걸어가 한 곳에 도착했다. 그 아래로 몸을 웅크리고 숨을 고른 뒤 다른 돌담으로 건너갔다. 한스는 모든 장애물을 거뜬히 넘었지만 잉그리드는 숨을 쉬려면 얼굴 앞으로 손을 모아야 했다. 폭풍의 마지막 보루인 러시아 나무가 누워 있는 뒤쪽 동산에 도착하니 깜깜한 어둠 위로 솟아난 물이 벽을 만들어 그들을 향해 밀려오면서 바위와 해변과 자갈에 부딪히고 모래와 조개와 얼음을 마구 던졌다. 누구도 마주할 수 없는, 혹은 이해하거나 기억할 수 없는 죽음의 트럼펫 같아서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마음속에서 그 광경을 지워 버리는 것뿐이었다. - P59
아무 의미도 없는, 그저 화가 나서 한 소리일 뿐이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고 당연히 바뢰이섬을 떠날 것도 아니었다. 그건 불가능했다. 사실 지금처럼 첫 겨울 폭풍이 삐걱거리는 벽 너머로 최후의 발악을 하면 사람들은 본모습을 잃곤 했다. 게다가 한 번 섬에 정착하면 섬이 모든 힘을 동원해서 붙잡는 통에 절대 떠날 수 없었다. - P60
폭풍 때문에 심각한 것이 아니라 한 해와 섬 생활의 외로움이 천천히 가르침을 보여 주었다. 갑자기 가족이 줄었고 그들은 이 섬의 수장을 잃어버린 채 걸음을 옮겼다. 가족들은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하거나 입을 닫거나 성질을 내고 안달을 부렸다. 게다가 로포텐은 아무 탈 없이 돌아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매해 겨울 그곳에서 200명이 넘는 남자가 목숨을 잃지만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아 추정만 할 뿐이었다. 하느님의 땅인 이 해안가만큼 무덤 없는 십자가가 많은 묘지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 P73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시 1월이 되었다. 그렇게 석 달이 더 지났다. 서리와 눈보라와 악마의 달이. 그리고 이상하게도 새로운 희망이 가족들을 감쌌다. 희망은 검은 하늘에 태양과 함께 떠올랐다. 1월 초에는 멍든 눈 같다가 2월이 되자 벌겋게 변했고 마침내 하늘이 밝아져 분화구 같아졌다. 그들은 신앙심 깊은 남자를 소용돌이치는 어둠 속으로 보냈고, 지금은 그가 살아서 돌아오길 바라는 터, 혹시나 주머니 가득 돈을 가져올지도 모르며 이는 결국 섬의 희망으로 바뀌었다. 가장이 어구와 물고기 판 돈을 받아서 돌아올 거라고 말이다. - P73
아빠이자 남편이자 오빠이자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고 이상한 날들이 이어졌다. 지금은 4월 말이라 하루 종일 해가 짱짱하고 심지어 밤도 없이 오로지 아침에만 조금 어두울 뿐이고 처음으로 파릇한 풀이 오르고 어린 양들이 나타나고 솜털오리가 해안가를 뒤뚱뒤뚱 걸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은 모든 것이 그대로라는 사실에 만족했는데, 집을 떠났던 사람이야말로 시간이 그 자리에 멈춰 있다는 걸 깨닫고 가장 기뻐할 장본인이었다. - P74
모든 것이 잉그리드의 행복한 어린 시절 기억과 똑같을 수 없는 건 세상엔 불안이라는 불길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P75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두 가지가 빈곤과 전쟁이다. - P76
스웨덴 사람들은 10월 초부터 쭉 내린 비를 맞으며 떠났고, 바뢰이 가족은 헤어지는 게 슬프지만 원래 인구로 돌아온 것에 안도했다. 방문객을 들인 장점이 있었다. 그들이 떠나고 가족들만 남자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걸 느꼈다. 방문객으로 말미암아 상실감을 느낀 것이다. 그들은 섬사람들이 무언가 부족하다는 걸 분명히 깨닫게 해주었다. 어쩌면 손님이 오기 전부터 그랬을 수도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P81
마틴이 해덕 줄과 미끼가 들어 있는 어업용 상자를 들고 새 보트 하우스로 느릿느릿 움직였다. 한스는 캔버스에 망원경을 돌돌 말아서 아버지를 뒤따랐다. 그리고 망원경을 선반 꼭대기에 올려놓았다. 망원경은 다른 누군가가 "맞아, 그건 망원경이야."라며 다시 찾을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한스는 사람의 눈이 어느 정도 이상을 보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혼잣말을 했다. 이는 눈과 눈이 바라보는 사물 모두에게 좋은 일일 테고, 아무튼 지금은 본토와 관련해서 가장 우울해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돈 문제는 잊어버렸다. - P86
마리아는 두건을 벗고 새 부두로 이어지는 해변을 걸으며 섬에서 바다로 겨울을 내보내는 재잘거리는 물소리와 함께 남쪽으로 향했다. 바위에 걸터앉아 양말을 벗고 발을 담갔다. 두 발이 감각이 없어지고 하얘질 때까지 그대로 있다가 꺼내 말리고는 두건을 벗어 눈물을 닦은 다음 스타킹과 양말을 신고 집으로 돌아갔다. 딸을 찾아 주방으로 들어갔다. 잉그리드는 할아버지 손을 만지작거리며 놀고 마틴은 흔들의자에 앉아 딸이 살아 있는 걸 최종적으로 확인하려는 듯 바브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바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록 몸은 집에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는 사람처럼. - P95
바브로는 잉그리드가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자기처럼 될 거라고 말했다. 그건 마음속에서 방수포도 도움이 되지 않는 비가 내리는 것과 같아 점점 더 두렵지만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게 해 준다고 덧붙였다. 잉그리드는 고모를 쳐다보았다. 바브로는 배설물을 삽으로 떠서 벽에 난 구멍으로 내보내며 잉그리드에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고, 잉그리드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모든 생각은 그녀가 성장하는 증거라고 말했다. 잉그리드는 가을부터 다른 섬에서 온 아이들과 함께 하브스테인의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모든 게 달라질 것이다. 두려워할 일은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갖지 않은 걸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섬이 너무 많았다. 빨간 점이 흰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잉그리드는 고모에게 팔을 두르고 절대 놓지 않았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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