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면서 나는 세상이 무척 넓은 곳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다섯 살이 되던 무렵 우리 식구는 부산을 떠나 서울로 갔다. 하루를 꼬박 달린 완행열차는 세상이 무진장 넓다는 사실을 내게 일깨워 주었다. 내가 정확히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어릴 적 기억은, 어머니 품에 꼭 안겨 바라보던 차창 밖의 깜깜한 밤 풍경이었다. 나는 잠을 자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썼는데, 그건 내가 잠든 사이에 어머니가 나를 버리고 가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세상이 얼마나 넓든 상관 없이, 나한테 의미 있는 세상이라곤 고작 어머니 품속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 P10
서양의 어떤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지나치게 행복했던 사람이 아니라면, 아홉 살은 세상을 느낄 만한 나이이다." 다행히 내 아홉 살은 지나치게 행복했던 편은 아니었고, 그리하여 나 또한 세상을 느끼기 시작했다. - P12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이 차이의 슬픔을 아버지도 느끼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마침내 산꼭대기에나마 우리 집을 마련한 것이리라. - P17
비겁한 인간을 상대하는 일은 두렵다기보다는 성가신 일이다. - P28
슬픔과 절망은 세상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지지리도 가난한 이 산동네에는 더더욱 많은 슬픔과 절망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정작 그 당사자들은 슬픔과 절망을 거의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슬픔과 절망은 기쁨과 희망이라는 거울에 비출 때만이 실감이 나는 법이다. 거울이 없었던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의 얼굴을 알 수 있었으랴. 기쁨과 희망의 거울을 갖지 못한 산동네 사람들은 슬픔과 절망이 마치 자신의 얼굴처럼 당연히 달려 있는 것으로만 여겼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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