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나교는 욕망이 인간이 겪는 대부분의 고통의 원인이며, 오직 욕망을 제어하는 것을 배움으로써 행복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제시한다. 우리 중에서 ‘하늘 옷‘을 입거나 굶어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그렇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은 우리 모두가 조금 더 단순한 삶을 살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해준다. - P62
이것은 신gods에 대한 새로운 사유 방식이었다. 모든 부족과 민족은 자기들의 신gods을 숭배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 었다. 단 하나의 신a god이 인간의 운명은 물론 역사 자체를 제어 한다는 생각은 새롭고 놀라운 것이었다. 모세가 자기에게 말을 건 그 신에게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모세가 얻은 대답은 훨씬 더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그 목소리는 자기 이름이 ‘스스로 있는 자I AM‘라고 알려주었다. 그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은 자기가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에너지이자 의미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건네는 말을 들었던 사람들은 그 목소리의 주인과 관계 맺는 것이 자신들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 P76
우리는 상징이 사람들을 더 큰 실재와 연결시켜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채색된 헝겊 한 조각이 국가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 그런 예 중 하나다. 상징은 인간이 만든 가장 탁월한 발명품 중 하나다. 상징은 국가처럼 거대하고 추상적인 대상을 포착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다. 문자가 발명되고 나자 상징은 훨씬 더 유용한 것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거의 모든 것을 문자(단어)로 번역하여 손에 들고 다니는 책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한 가지 실수가 있다면, 어떤 단어와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혼동하여, 마치 그 둘이 똑같은 것인 양 취급했다는 점이다. 사물은 결코 우리가 말하는 그대로의 존재일 수가 없다. 우리는 (마시는) 물을 물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지만, 그 단어를 마실 수는 없다. 물이라는 단어는 물을 대신하는 기호(상징)일 뿐, 물 그 자체가 아니다. - P84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지구상의 핵폭탄이 세상을 더 위험한 곳으로 만든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핵무기 수를 감축하길 원했지만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그중 가장 큰 목소리로 비판한 사람은 어느 핵물리학자였는데, 그는 미국이 핵폭탄을 더 많이 보유하면 할수록 세상은 더 안전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문제에 대해 질문을 받은 케네디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일에서든 완벽한 확신을 가진 사람은, 더구나 그 사람이 전문가라면, ‘열린 마음open mind‘을 가진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게 될 수 있다고. 그리고 이어서 그는 그것이 바로 ‘닫힌 마음closed mind‘을 갖는 것의 장점이라고 덧붙였다. - P112
욥기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욥은 자기 민족이 수백 년 동안 물어왔던 그 질문에 대한 확고한 대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가 한 일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정통적 견해, 즉 고통은 신이 그들의 죄에 대해 내린 벌이라는 견해를 파괴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종교의 역사에 있어서 거대한 순간이었다. 욥기는 잘못된 생각에 대해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단순한 사람을 우리에게 소개해준다. 그 시대의 정통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신이 옳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 답은 옳다고 욥에게 말한다. 그래서 욥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신이 단지 그렇다고 말하기만 하면 잘못된 것은 옳은 것이 되는가?‘ 아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신이 뭐라고 말하든, 사제가 신이 말한 것이 무엇이라고 말해주든, 나는 그들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설사 하늘이 내 앞에서 무너진다고 해도, 나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 욥은 성경 바로 한가운데서 일어나서 그 자체의 가르침에도전하는 이단자다. - P113
드론의 카메라가 찍고 있는 것은 죽은 자들에 대한 부주의한 무관심 행동이 아니라 가장 심오한 경의를 담은 선행으로서, 인도의 가장 작은 종교 공동체인 파시교도들 Parsees의 고대 장례 의식이다. 파시교도들은 죽은 육체가 불결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시체를 묻으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땅을 오염시키게 되고 시체를 태우면 그것을 소멸시키는 불을 오염시키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쓰레기 더미에서 먹이를 뒤지는 동물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땅을 깨끗하게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러한 침묵의 탑Towers of Silence을 만들어 그 위에 시체를 놓아두고, 태양의 압도적인 열기와 까마귀 및 콘도르의 날카로운 부리가 시체를 해체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시체가 탑 위에 놓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살이 얇게 찢기고, 해골은 하얗게 분해되어 탑 중앙에 있는 방에 모인다. 그 방에서 뼈는 서서히 먼지로 돌아가서 흙을 통해 걸러지고 바다로 씻겨 들어간다. 그래서 죽음과 함께 인간이 잃게 되는 육체는 그것을 먹고 사는 동물들에게 계속되는 생명의 선물이 된다. 모든 것이 자연으로 돌려보내진다. 아무것도 낭비되지 않는다. - P120
사제였던 조로아스터가 다른 사제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종교의 강한 특성 중 하나인 폭력적 불화의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다. 외딴섬의 크기를 둘러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용될 수 있는 측량 같은 방식으로 종교의 궁극적 원천을 조사할 수는 없다. 종교는 이 세상을 초월한 또 다른 하나의 세계를 원천으로 삼는다. 그 다른 세계의 비밀은 그 신비를 간파했다고 주장하는 예언자를 통해 우리에게 드러난다. 그 예언자들은 어떤 목소리가 자기들에게 들려준 것이 있다고 주장하고, 그것을 세상에 알려주면서 새로운 종교가 태어난다. 그러나 모든 새로운 종교는 옛 종교에 대한 공격이라고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옛 종교의 사제들이 새로운 종교의 사제들을 집단적으로 공격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그것이 바로 예언자들은 항상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고, 또한 자신들이 본 것 때문에 죽어야 한다고, 종교 사상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이다. 조로아스터는 옛 종교의 사제로서 새로운 종교의 예언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곤란이 닥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P121
일신교Monotheism는 수많은 경쟁적 신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혼란을 없애버릴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신념 자체가 가 진 어려움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은 고통이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어려움을 겪었다. 유일한 신이 그들을 선택한 것이 틀림없다면, 그 신은 어째서 그를 믿는 민족에게 그렇게 끝없이 고통과 슬픔을 안겨주었을까? 그러나 조로아스터가 경험한 어려움은 이스라엘 민족의 것보다 더 깊고 더 보편적이다. 고통받는 자들은 왜 선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지 묻는다. 조로아스터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이 세상에 선과 악이라는 대립적인 힘이 처음 들어온 이유와 방식에 대해 알고 싶었다. 인생이란 외부적 요소들과의 싸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다른 인간과 대항하여 싸우는 생존 투쟁을 겪어야 하며,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들이 다른 사람에게 끼치는 고통에 대해서 잔인하거나 무관심하다. 그렇다면 그런 악함은 과연 어디로부터 나온 것일까? 그리고 정말로 그런 악을 견디고 참는 사람들은 상을 받고,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는 사람들은 벌을 받게 되는가? - P122
지혜의 주님이 처음부터 악을 만들어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는 왜 자기의 두 아들이 그 두 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들었는가? 여기에 대한 확실한 설명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 조로아스터가 한 일은, 선과 악이라는 거대한 힘을 인정하고, 현실적으로 우리 인간이 모두 경험하는 상황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그쳤다. 조로아스터는 인간의 삶을 일련의 전투로 묘사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그래서인지, 도덕적인 존재가 되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을 묘사하는 데 전쟁과 투쟁은 대단히 적절한 언어를 제공한다. 인간은 살면서 여러 종류의 중독 위협에 맞서서 ‘싸우고‘ 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유혹에 대항해서 ‘투쟁‘한다. 심지어 실제 악령에 대한 생각은 이성적인 논리에 ‘맞서서‘ 머리를 들고 일어난다. 마치 바이러스처럼, 인간의 마음을 감염시킬 수 있는 다양한 생각들이 나타날 수 있으며, 끔찍한 행동을 하도록 인간의 마음을 충동질하기도 한다. - P124
이런 영향 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종교들이 서로에게 배타적으로 봉인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왕성한 융합을 이루면서 발전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P127
인간은 제한된 시야 때문에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이 만든 종교적 주장들이 궁극적 실재를 보여줄 것이라는 오만함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예언자들과 현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에 대해 의심을 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인간과 궁극적 실재 사이에 드리워진 베일 뒤에 놓인 것을 ‘보았고‘ ‘들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나는 동사 ‘보았다‘와 ‘들었다‘에 조심스럽게 인용부호를 붙임으로써 그들의 주장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우리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다른 것‘을 보았을 수도 있고 같은 것을 ‘다르게‘ 보았을 수 있기 때문이다. - P128
이들 여러 종교의 창시자들은, 비록 제각기 다른 해석을 내리기는 했지만,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보다는 세상 너머의 시간에 대해서 자신들이 본 것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 P129
종교와 인생에 대한 중국인들의 실용적 접근 방식은 기원전 5세기와 6세기에 와서 새로운 명료성과 방향을 획득하게 된다. 고대의 인도 종교를 비판하는 불교와 자이나교가 등장하고,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이 신의 본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하던 그즈음에, 중국의 사상가들 사이에서 새로운 기운이 일어났다. 그러나 중국의 현자들은, 다른 문명의 경우와 달리, 죽음 이후의 세계나 미래 세계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이 사는 현실의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창조성을 발휘했다. 그런 현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바로 공자였다. 서양에서는 컨퓨시어스confucius라고 불리는 바로 그 사람이다. - P132
공자의 핵심 사상은 개인을 사회 및 사회적 제약들과 대립된 것으로 보는 개인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우리는 탄생 순간 부터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그물web of relationship‘에 얽혀 있으며, 또 그것 없이 우리는 한순간도 생존할 수 없다고 공자는 가르쳤다. 공동체에 이로운 것이 개인에게도 이로운 것이다. 그것은 심지어 때로 개인의 사적인 욕구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인생은 관계 속에 존재한다. 사회는 우리 모두가 그것의 구성원인 하나의 몸이다. 팔다리는 그 하나의 몸에서 떨어져나와서는 생존할 수 없다. - P134
유교에서 강조하는 ‘측은지심compassion‘은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접착제다. 측은지심은 함께 고통받는 것을 의미한다. 측은지심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시각에서 사물을 보기 위해 그들의 경험 안에서 삶을 느껴보려고 애쓴다. 우리는 공자로부터 황금률golden rule에 대한 최초의 표현 중 하나를 배우게 된다. 하나는 긍정문, 다른 하나는 부정문의 형태로 등장한다. ‘다른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대로 너희는 다른 사람에게 행하라.‘ 또는, ‘다른 사람들이 너희에게 행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을 너희는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라.‘ - P135
노자는 우리가 종종 균형을 잃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는 욕구 때문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만의 리듬에 따라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삶의 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간섭하고 끼어든다. 세탁기에 세탁물을 넣는 방식에서부터 나라를 운영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어떤 일에서든, 자기 방식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남을 가르치려 드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사실상 언제나 화가 난 상태로 살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요구와 현실은 언제나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자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고, 식물의 삶을 보고 배우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아무리 잔소리를 하고 싶다고 해도, 식물더러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를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식물은 그저 자기의 본성에 따라 생장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교란시키기를 멈추고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는 말인가? - P143
노자는 인생사에 대한 자기만의 독특한 접근 방식을 ‘무위‘라고 불렀다. 그것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하기‘, 세상을 그냥 그대로 두기, 일이 저절로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기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그는 규칙과 규제를 매우 싫어했다. 개인의 차별성을 존중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단 하나의 방식으로 인생을 살도록 몰아세우고 강제하는, 강력한 지배자의 운영 방식을 혐오했다. - P143
눈먼 사람과 코끼리의 비유는 우리에게 세상이 우리 눈에 보이는 그대로일 것이라 추측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 P151
종교는 과학이 아니라 예술의 한 형태라 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창조 이야기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진실인가 거짓인가가 아니라, 그것의 의미meaning는 무엇이며 우리에게 말하려는 바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해야 한다. 이것은 많은 종교인들이 결코 쉽게 알아채기 어려운 과학과 종교의 차이이기도 하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종교인들 중 일부는 기독교 성서의 창조 이야기를 예술 작품이 아니라 과학 작품이라고 증명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다가 스스로 다른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 P155
이것은 자연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빼어난 신화가 인간 삶의 기쁨과 슬픔을 표현하는 데도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예다. 인간의 삶 안에도 상실과 회복, 실패와 성공, 죽음과 재탄생의 리듬이 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신‘에 대한 관념은 그런 인간 영혼의 깊은 요구를 표현하는 데 대단히 적절한 예를 제공해주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의미를 불러내도록 고안된 이야기들과 의례들은 로마 제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신비종교mystery religions로 발전했다. 신비mystery라는 말은 ‘침묵하다‘, 혹은 입술을 굳게 닫고 있다는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에서 나왔다. 그 제의들을 ‘신비‘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제의의 구성원들은 자기들이 치르는 의례나 의식들에 대해 비밀을 지킨다는 맹세를 했기 때문이다. - P166
여기서 기억하자. 이 모든 일이 인간의 마음mind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는 마음이란 것이 얼마나 이상한 장소인지 잘 알고 있다. 마음은 천국과 지옥, 높이와 깊이, 암흑과 빛을 간직한다. - P167
개별적 구원을 제공하는 종교가 보편 종교로 발전해가는 이러한 경향이 종교의 역사에서 가장 높은 표현 단계에 도달하기까 지 몇백 년이 걸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많은 신자 수를 가진 지배적인 종교의 출현을 위한 기반은 만들어지고 있었다. 기독교는 가장 성공적으로 발전했을 때 자기 자신을 가톨릭Catholic이라 불렀다. 이 말 역시 그리스어에서 온 것으로, ‘보편‘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그것의 기반이 되는 믿음은 ‘신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었다. - P170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인생행로가 백팔십도 바뀐 사람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사울saul이라는 이름을 가진 유대인일 것이다. 그는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 바울Paul이 되었다. 그의 개종 사건은 너무 유명해서, 그 일이 일어났던 장소는 급격한 정신적 변화를 지칭하는 일반명사가 되기도 했다. 우리가 인생에서 반대 방향으로 돌아선 순간을 표현할 때 ‘다마스쿠스의 길damascus road‘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이유는 사울 자신이 여러 해 동안 박해했던 기독교에 항복하게 된 사건이 다마스쿠스[다메섹]로 가는 길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 P172
모든 종교는, 말로는 일치를 강조하지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때때로 대단히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만의 신앙을 가진 다양한 그룹의 연합체다. 사울 시대의 유대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종교에 있어서 가장 흔한 분열은 보수주의자conservatives와 진보주의자 progressives 사이의 분열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신앙이 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예언자에서부터 시작되어, 인류에게 새로운 방향을 알려주었다고 믿는다. 그들은 자기네 신앙을 본래 계시의 최초 국면으로 한정한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은 새로운 발전과 후대에 발생한 계시들도 수용하기를 원한다. 1세기 유대교에서는 보수적 그룹인 사두개파Sadducees와 사울이 속했던 진보적 그룹인 바리새파Pharisees가 이런 대립적인 경향을 대표하고 있었다. - P173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만큼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도 없다‘는 속담이 있다. 사울이 보지 못했던 것은 이미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을 오랫동안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난 증상이었다. 그의 조수가 그를 다마스쿠스로 인도하고 방을 하나 찾아주었다. 앞을 보지 못한 채 혼돈에 빠진 사울은 그곳에서 사흘을 지냈으며,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기다리고 있었다. - P178
그렇다면, 신약이 예수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주는 첫 번째 사항은 그의 죽음이 그를 역사로부터 제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출현은 그의 죽음이 끝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그것은 신이 약속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으며, 세상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려는 신의 활동의 개막 사진이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예수의 제자들에게도 죽음은 끝이 아닐 것이다. 그들이 죽으면 그들 역시 사후의 생명을 얻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예수의 부활은 신의 활동이 이미 시작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가 아닌가? 예수가 말한 완전한 왕국이 지상에 건설될 참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바뀔 것이었다. 죽음조차도! - P183
예언자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다시 기억해보자. 그들은 자기들에게 말하는 신의 목소리를 듣고, 자기들이 들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 주는 일을 한다. 그러나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는 예언자와 신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 그들은 이미 종교 전문가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갈릴리 출신의 시골 청년에게 가르침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예루살렘의 공식적인 종교 대표자들과 예수 사이에 발생한 충돌을 통해 우리는 예수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힘에 대해 알 수 있다. - P185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법과 규칙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법과 규칙은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인간의 주인은 아니다. 만일 우리가 그 법과 규칙을 너무 엄격하게 요구한다면, 법과 규칙은 인간을 돕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만다. 법과 규칙이 인간보다 더 중요해지는 것이다. 중국에서 도가 사상가들이 600년 전에 이미 깨달았던 것처럼, 율법주의란 대단히 집요한 것이다. 이제 예수가 그런 율법주의에 도전하고 있다. 예수의 주장은 이렇다. 법과 규칙은 인간에게 종속되는 것이며, 인간이 법에 종속 되어서는 안 된다. 율법주의자들이 예수를 미워했던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예수에게 부과된 첫 번째 죄목이었다. - P186
만일 누군가가 당신의 뺨을 때리면, 다른 쪽 뺨을 내밀어, 그가 다시 때릴 수 있게 내어 줄 것이다. 누군가가 당신의 윗옷을 가져가면, 그에게 외투까지 내어 줄 것이다. 원수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할 것이다. 당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을 친절하게 대할 것이다. 그리고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영원히 용서할 것이다. 그것은 하늘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므로, 결국 이 땅 위에서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예수가 설명하고 있는 위아래가 뒤집힌 왕국의 핵심은, 그가 세례를 받은 직후 들었던 말,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라는 말에서 드러난다. 신은 지배자도, 상사도, 감옥의 교도관도, 노예 몰이꾼도 아닌 우리의 아버지father다! 그리고 인류는 한 가족이다. 혁명적인 가르침이 아닌가! 당시의 지배자들이 예수를 주시했다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이것이 예수에게 부과된 두 번째 죄목이었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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