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있는 걸 없는 척하고 없는 걸 있는 셈 치는 건 연극의 중요한 약속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건 가식이나 위선과는 다른 거였다. - P18

‘사실 좀 망설였는데 이 자리에 오기 잘했다‘고도 생각했다. ‘별 목적 없이 그냥 이렇게 놀다 가도 좋을 것 같다‘고. 그리고 그제서야 이연은 자신이 이런 자리를 가져본 게 참으로 오랜만임을 깨달았다. 지난 이십여 년간, 사람 만나, 사람 앞에서, 사람을 연기하는 게 일이었으면서 그랬다. - P22

이십여 년간 이연이 여러 인물에게 자신의 몸을 빌려주며 깨달은 사실은 단순했다. 그건 ‘한 사람 이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라는 거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오해와 갈등이, 드라마가 생겼다. 최근 들어 배역 스펙트럼이 점점 좁아짐에도 불구하고 이연은 배우로서 지금 제 나이와 경험이 싫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이연은 인간을 더 연민하게 됐으니까. 이연은 그리스신화 속 영웅이나 현대의 범인 못지않게 ‘그 나머지‘ 사람들을 애정하게 되었다. 자신을 이기지 못하는 이들을, 실수하고 잘못된 선택 을 하는 자들을, 변명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나약한 이들을 깊이 응시하게 되었다. 우선 이연부터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이연은 착한 사람보다 성숙한 사람에게 더 끌렸다. 그리고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 P24

살면서 어떤 긴장은 이겨내야만 하고, 어떤 연기는 꼭 끝까지 무사히 마친 뒤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걸, 그건 세상의 인정이나 사랑과 상관없는, 가식이나 예의와도 무관한, 말 그대로 실존의 영역임을 알았다. 처음 여기 왔을 때만 해도 임원 연기를 위해 ‘최대한 저 사람들처럼 생각하자, 저 사람들 입장에서 느끼고 즐기자‘ 다짐했는데,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안 되는 게 있어서였다. - P39

결국 어떤 공간을 우아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는 ‘낡음‘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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