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하얀 풍경 위에서 움직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죽음 같은 풍경이 그를 잡아당기고, 그의 의식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공기 중의 소리를 끌어당겨 차갑고 하얗고 부드러운 눈 밑에 묻어버릴 때처럼. 그는 자신이 그 하얀 풍경을 향해 끌려가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한없이 펼쳐진 하얀 풍경은 어둠의 일부가 되어 반짝였다. 그것은 높이도 깊이도 가늠할 수 없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의 일부였다. 순간적으로 그는 창가에 꼼짝도 않고 앉아 있는 몸에서 자신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그러니까 그 하얗기만 한 풍경과 나무들과 높은 기둥들과 밤과 저 멀리의 별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작고 멀어 보였다. 마치 그것들이 무(無)를 향해 점차 졸아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등 뒤에서 라디에이터가 쩡하는 소리를 냈다. 그가 몸을 움직이자 풍경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내키지 않는 안도감을 느끼며 다시 책상 위의 불을 켰다. 그리고 책 한 권과 논문 몇 개를 챙겨서 연구실을 나가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제시 홀 뒤편의 널찍한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 그는 집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마른 눈 속에 발을 디딜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억눌린 듯 커다랗게 울리는 것을 의식하면서. - P251

그는 자신이 그처럼 비현실적인 상태를 맛보는 시간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마음만 먹으면 몸에서 의식을 분리시킬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을 지켜보았다. 잘 모르는 사이인데도 묘하게 친숙한 누군가가 자신이 해야 하는 묘하게 친숙한 일들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전에는 이런 식으로 자신이 분리되는 느낌을 겪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이 일이 고민거리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냥 멍하기만 했다. 이 일이 중요하다고 자신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 이제 마흔두 살인 그의 앞날에는 즐겁게 여길 만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뒤를 돌아보아도 굳이 기억하고 싶은 것이 별로 없었다. - P252

최근에 빈번히 그러는 것처럼, 연구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캠퍼스 풍경을 지긋이 바라 볼 뿐이었다. 아직 밝은 낮이었다. 그가 지켜보는 동안 제시 홀의 그림자가 직사각형 안뜰 한복판에 강하지만 고독한 모습으로 우아하게 서 있는 다섯 기둥의 뿌리 가까이까지 옮겨가 있었다. 안뜰 중에서 그림자 속에 잠겨 있는 부분은 어렴풋이 갈색을 띤 짙은 회색 이었다. 그림자 너머의 겨울 잔디밭은 밝은 황갈색이었지만, 연하디 연한 초록색이 아주 흐릿하고 얇은 막처럼 그 위를 덮고 있었다. 눈이 부실 만큼 하얀 대리석 기둥들은 제 몸을 거미줄처럼 휘감은 검은 덩굴들과 대조를 이루었다. 곧 그림자가 저 기둥들 위로 기어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기둥의 뿌리 부분은 지금보다 더 어두워질 것이고, 그 어둠이 처음에는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더 빨리 위를 향해 기어올라서 마침내······. - P253

밖은 어두웠다. 봄의 싸늘함이 저녁 공기 속에 배어 있었다. 스토너가 심호흡을 하자 그 서늘한 기운에 몸이 찌릿찌릿하는 것이 느껴졌다. 들쭉날쭉한 집들의 윤곽 너머로 시내의 불빛들이 엷은 안개 속에서 반짝였다. 길모퉁이의 가로등이 사방에서 다가오는 어둠을 힘없이 밀어내고 있었다. 그 너머의 어둠 속에서 갑자기 웃음소리가 터져나와 잠시 머무르다가 사라졌다. 뒷마당에서 쓰레기를 태우는 냄새는 안개에 붙들려 있었다. 스토너는 저녁 풍경 속을 천천히 걸으면서 그 향기를 들이마시고, 혀에 닿는 싸늘한 밤공기를 맛보았다. 그가 걷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으로 충분해서 더 이상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 P262

그는 자신을 조금 바보 같은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다. 누구든 일반적인 감정 외에 특별한 감정을 품기 힘든 사람. - P264

나이 마흔셋에 윌리엄 스토너는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이미 배운 것을 배웠다. 첫사랑이 곧 마지막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종착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 P270

젊다 못해 어렸을 때 스토너는 사랑이란 운 좋은 사람이나 찾아낼 수 있는 절대적인 상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뒤에는 사랑이란 거짓 종교가 말하는 천국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재미있지만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부드럽고 친숙한 경멸로, 그리고 당황스러운 향수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 이제 중년이 된 그는 사랑이란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사랑이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였다. - P272

그해 여름에 두 사람이 배운, 이른바 ‘기존 관념‘의 기이한 점 중 하나였다. 어렸을 때 두 사람은 마음과 몸이 별개의 것이며 서로 적대적인 관계라고 배우며 자랐다. 그래서 별로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려면 나머지 하나를 희생하는 수밖에 없다고 당연한 듯이 믿고 있었다.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강화해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진실을 깨닫기도 전에 체험이 먼저 찾아왔으므로, 이 새로운 발견이 오로지 두 사람만의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이처럼 ‘기존 관념‘이 기이하게 달라진 사례들을 모아 보물처럼 간직해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이 기존 관념을 고수하는 세상으로부터 두 사람을 분리시키는 데 일조했다. 또한 두 사람이 야단스럽지는 않지만 감동을 느끼면서 서로에게 더 가까워지는 데에도 일조했다. - P277

그는 의지력을 동원해야 비로소 자신이 이디스를 속이고 있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가 영위하고 있는 두 개의 삶은 완전히 별개의 것처럼 떨어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자기성찰에 약하고 자기기만 또한 가능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누구든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 P279

가끔, 거의 무의식적으로, 항상 자기 마음속 어딘가에 존재하는 그 사실을 입에 담을 때가 있었다. 다정하게 놀리듯이 장난스럽게 말할 때도 있고,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화제를 입에 올리듯이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을 때도 있고, 뭔가 사소한 일에 기분이 상했을 때처럼 까다롭게 굴 때도 있었다. - P281

흡연실에서 언뜻언뜻 화제에 오르는 자 신의 모습, 싸구려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내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젊음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자기보다 한참 어린 아가씨와 사귀면서 자신은 가질 수 없는 그 젊음을 향해 원숭이처럼 서투르게 손을 뻗는 비루한 중년남자. 번쩍번쩍하게 차려입은 어리석은 광대 같은 그 모습에 세상 사람들은 불편함, 연민, 경멸을 느끼며 웃음을 터뜨릴 터였다. 그는 이 남자의 모습을 최대한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살펴보면 볼수록 그 남자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이 그 누구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문득 깨달았다. - P281

두 사람은 몸짓에 대해 생각하고, 반항을 입에 담았다. 뭔가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르고 싶다는 생각, 남들에게 여봐란 듯이 과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서로에게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렇게 하고 싶다는 욕망도 없었다. 그저 둘만의 세계에서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있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소망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둘만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본연의 모습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 P282

두 사람은 빛이 절반밖에 들지 않는 세상에 살면서 자신들의 좋은 점들을 드러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이 살고 있는 바깥세상, 변화와 지속적인 움직임이 있는 그 세상이 비현실적인 거짓 세상처럼 보였다. 두 사람의 삶은 이 두 세계에 철저하게 나눠져 있었다. 이렇게 분열된 삶을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았다. - P293

그는 길고 어두운 복도로 나가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햇빛을 향해 걸었다. 세상은 탁 트여 있었지만, 그에게는 어디를 돌아봐도 감옥 같았다. - P298

존재의 작은 중심에서 자라난 무감각한 공간 속 어딘가에서 자기 인생의 일부가 끝나버렸음을. 자신의 일부가 거의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이라서 다가오는 죽음을 거의 차분한 태도로 지켜볼 수 있을 정도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초봄 오후의 밝고 산뜻한 온기 속에서 캠퍼스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자신을 어렴풋이 인식했다. 길가와 앞뜰에 늘어선 층층나무들은 흐드러지게 핀 꽃을 매단 채, 그의 눈앞에서 반투명하고 엷은 구름처럼 가볍게 흔들렸다. 생명이 꺼져 가는 라일락꽃의 달콤한 향기가 사방을 흠뻑 적셨다. - P298

"[…] 그저 우리 자신이 파괴될 것이라는 생각, 우리의 일이 망가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지." - P301

윌리엄 스토너는 젊은 동료들이 잘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 기억 밑에 고생과 굶주림과 인내와 고통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그가 분빌에서 농사를 지으며 보낸 어린 시절을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무명의 존재로서 근면하고 금욕적으로 살다 간 선조들에게서 혈연을 통해 물려받은 것에 대한 지식이 항상 의식 근처에 머무르고 있었다. 선조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세상을 향해 무표정하고 단단하고 황량한 얼굴을 보여주자는 공통의 기준을 갖고 있었다. - P307

1937년 여름에 그는 학문에 대한 과거의 열정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젊음이나 나이와는 상관이 없고 현실과도 유리된, 호기심 많은 학자의 열정으로 그는 아직까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은 유일한 삶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다 보니 절망의 순간에도 자신이 그 삶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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