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증오에 그토록 열중하는가(그러한 증오는 만남의 장소에서의 신체적 공격이라는 난폭한 방식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유사과학적 지식 공간에서 나오는 담론적 공격을 통해 완곡한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왜 어떤 범주의 인구집단—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유대인, 흑인 등등—은, 무엇이 그 저주를 고취하고 끈질기게 되살려내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이러한 사회문화적 저주라는 짐을 짊어져야만 하는가? 나는 오랫동안 이에 대해 질문을 제기해왔다. "왜?" 그리고 이런 질문도. "우리가 대체 무엇을 했기에?" 이 질문들에 대해서라면, 사회적 판결의 자의성, 그 부조리 말고는 다른 대답이 없다. - P250
은유적이고 장식적인 주네의 문장에 영감을 받아서 이렇게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가래침을 장미로, 언어적 공격을 화환과 빛줄기로 탈바꿈시키는 순간이 온다고. 수치심이 자긍심으로 변화하는 순간 말이다. 이 자긍심은 철저히 정치적인데, 정상성과 규범성의 메커니즘에 그 근본에서부터 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스스로 다시 표명하는 일은 무(無)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기 정체성을 주조하기 위한 느리고 인내가 필요한 작업을, 사회질서가 우리에게 부과했던 바로 그 정체성으로부터 수행해간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모욕과 수치심에서 결코 해방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종종 잊고 있었던 경고를 매 순간 날리며, 우리가 잊고 싶어 하는 감정을 일깨운다. - P256
우리는 결코 자유롭지 않으며 자유로워질 수도 없다. 우리는 사회질서와 그 예속화하는 힘이 매 순간 모든 이에게 가하는 무게에서 어느 정도까지만 해방될 수 있을 뿐이다. 이브 코소프스키 세즈윅이 훌륭하게 표현한 것처럼, 수치심이 ‘변형 에너지‘라면, 자기 변형은 과거의 흔적들을 통합하지 않고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를 보존한다. 이는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그 세계에서 사회화되었기 때문이고, 그 과거가 우리 안에 상당 부분 현존해 있으며,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여전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과거는 여전히 우리의 현재다. 따라서 우리는 표명되고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재표명되고 재창조된다(무한정 재착수해야 하는 과업처럼). - P257
이단적 활동의 효과는 제한적이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절대적인 ‘전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방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무언가를 전복한다고 해도 그것은 특정한 시점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우리는 살짝 이동하고 옆으로 한 보 옮겨 편차를 만들어내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푸코식 용어로 말해, 불가능한 ‘해방affranchissement‘을 꿈꾸지 말아야 한다. 기껏해야 우리는 역사 속에서 제도화되어 우리 존재에 속박을 가하는 몇몇 경계를 돌파할 수 있을 뿐이다. - P258
지적 삶도 가까이서 보면 그다지 아름답지만은 않다. 현실은 우리가 거기 끼어들기를 열망할 때 지니는 이상화된 비전에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다.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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