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야." 캐드펠은 달래듯이 말했다. "내가 받드는 분은 스티븐 왕도 모드 황후도 아니란다. 평생토록 나는 오직 한 분의 왕을 위해서만 싸워왔어. 하지만 헌신과 충성의 자세는 늘 높이 평가하지. 그 헌신과 충성의 대상이 기대에 부응하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지. 너의 충성심도 나의 충성심만큼이나 성스럽단다. 자, 이제 세수를 하고 저녁기도 전에 30분이라도 눈을 붙이렴. 아니, 넌 아직 너무 젊어서 그런 축복을 누릴 수 없을지도 모르겠구나!" - P64
"장관님의 입장에서는 전혀 상관없으시겠지요." 캐드필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정확한 셈을 요구하실 것입니다. 장관님은 헤스딘의 아눌프를 포함해 아흔네 명을 처형하라는 지시를 받으셨지요. 그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든 아니든 간에 어쨌든 명령은 떨어졌고, 장관님은 그 명령에 찬동하셨으며, 그 일은 문서에 기록되었고, 납득된 사항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에 대한 셈은 훗날 다른 법정에서 치러지겠지요. 그런데 그 아흔다섯 번째 시신은 애초의 셈법에 들어가 있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왕도 그를 이승에서 추방하라 명하지 않았고, 그 어떤 중신도 그를 처단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없으며, 그는 모반이나 반역죄를 포함한 그 어떤 죄로도 고발당하거나 기소된 적이 없는 사람이므로 그를 죽인 자는 살인을 저지른 것입니다." - P76
쿠셀이 침울한 기분에 젖어 찌푸린 얼굴로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을 때, 얼라인이 휴 베링어의 팔에 기대어 아치문으로 들어 왔다. 얼라인은 창백하고 굳은 얼굴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움켜쥐듯 자신을 호위하는 휴 베링어의 소매를 꽉 쥐고 있기는 했으나, 그녀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흔들림 없이 곧장 걸어왔다. 베링어는 세심하게 신경 써서 그녀와 보폭을 맞추며 걸었다. 안뜰의 처참한 광경으로부터 그녀의 시선을 돌리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뜨거운 눈길로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흘끔흘끔 곁눈질할 뿐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캐드펠은 생각했다. 여자의 마음을 차지하려는 일념에 공연히 자기가 보호해주겠답시고 설치고 나서는 짓은 결국 전략적인 실수가 될 텐데. 젊고 순진하고 마음 여린 아가씨이긴 해도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자부심 넘치는 그녀가 일단 마음을 먹었다 하면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을 거야. 만일 그녀가 이곳을 배회하는 가엾은 다른 시민들처럼 가족을 찾으러 왔다면 지나치게 자신을 보호하려 드는 이에게 그다지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걸. 오히려 말을 삼가면서 사려 깊게 처신하는 이에게 훨씬 호감을 느끼겠지. - P89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없다. 사람은 신념을 바꾸기도 한다. - P115
"모든 의문에는 반드시 답이 있기 마련이지." 캐드펠은 경구 같은 말을 내뱉었다. "충분히 기다리기만 하면 말이오." "모든 수색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르기 마련이고 말이죠?" 베링어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충분히라는 게 얼마만큼의 시간을 뜻하는지는 말씀하시지 않는군요. 하지만 스무 살 때 찾던 것을 여든 살에야 발견한다면 헛수고를 한 셈이겠죠." "그보다 훨씬 전에 포기할 수도 있겠고." 캐드펠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포기야말로 구하려는 노력에 대한 답이 되는 법이니 말이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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