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공원에는 저런 것들만 있는 게 아니잖아. 25개의 보어덤과 23개의 디스어포인트먼트와 16개의 다크니스 같은 것들도 있다고 봐야지. 보어덤은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지루한 시간들을, 디스어포인트먼트는 기대한 만큼 재미가 없는 쇼를 끝까지 봐야 할 때의 실망감을, 그리고 다크니스는 인파에 밀려 옴짝달싹하지 못할 때의 캄캄한 마음을 뜻하지. 그것들은 놀이공원의 숨겨진 진실이라고 할 수 있어." - P40
재연이 있다면, 지수는 얼마든지 긴 줄을 견딜 수 있었다. 재연이 말하는 지우개가 없다고 해도. 그러니까 놀이공원의 안내지도는 사랑에 빠진 청춘들을 위한 것이었다. 자유이용권이 있다면 자유롭게 이용하기를. 자유롭게 이용하지 못하는 순간을 불평하면서 보내지 말고. 혹시 그런 마음이 든다면, 사랑이든 일이든 꿈을 가져보기를. 꿈이 없는 사람의 자유이용권은 25개의 보어덤과 23개의 디스어포인트먼트와 16개의 다크니스를 맛보는 티켓에 불과할 테니까. 이 삶은, 오직 꿈의 눈으로 바라볼 때, 다른 불순물 없이 오롯하게 우리의 삶이 된다. - P44
"하지만 그렇지 않아. 옥희라고 했니? 옥희야. 어젯밤에 네가 방에서 나간 뒤 밤새 곰곰이 생각해봤어. 지금까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야. 과거는 다 잊어버리자. 내가 어떤 집에서 태어났고, 어떤 사람이었는지, 누구를 만나 사랑했고, 어떤 꿈을 가졌었는지는 다 잊어버리자. 대신에 오로지 미래만을 생각하기로 해. 이제까지는 과거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면, 앞으로는 미래가 지금의 나를 만들 수 있도록 말이야." - P57
"그러게. 거기까지 말하고 노인은 가보겠다며 일어났어. 이 새벽에 어디로, 어떻게 가느냐고 물었더니 걱정하지 말라는 거야. 하지만 호수 이야기까지 들었는데,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지. 이 근처에 호수 같은 건 없으니까. 그래서 직원 휴게실로 데려가 간이침대에서 좀 쉬라고 권했어. 노인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나는 전혀 괜찮지 않았거든. 휴게실의 불을 끄고 나와 호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어. 동트기 전의 캄캄한 새벽이었지. 생각보다 바람이 차가워서 깜짝 놀랐어. 이제 곧 겨울이 오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 추웠지만 나는 좀 더 서 있었어. 거기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불빛이 호수의 물결이라면 어떨까, 싶더라. 그래서 호텔 앞 호수의 풀숲 너머로 청둥오리떼가 푸드덕거리며 날아오른다면. 그 광경을 보고 젊고 아름다운 아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 저게 청둥오리구나, 라고 말한다면. 그렇게 둘만의 식사 뒤에 밤이 찾아온다면." - P63
그도 혼자서 생각하던 것을 계속 생각했다. 그러니까 비행기를 타면 삼십삼 년 전, 그가 엄마 뱃속에 있던 시절의 장소로 이동할 수 있듯 시간을 거슬러 삼십삼 년 전으로도 되돌려 보내주는, 말하자면 타임머신 같은 기계가 있다면 어떨까 싶은, 소년 같은 몽상을. 하지만 이내, 그렇다면 자신은 태어나고 엄마는 아직 죽지 않은 세계로 가겠지, 자신은 없고 엄마만 있는 세계로 가고 싶기야 하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죽기 전 엄마가 그에게 만약 당신이 죽고 난 뒤의 세계가 있는 게 사실이라면 당신으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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