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알파고가 확률을 계산하는 기계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수를 본 순간에 생각이 달라졌어요. 알파고는 분명 창의적입니다. 그 수가 알파고에 대한 나의 시각을 바꾸었어요. 바둑에서 창의성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단순히 좋은 수, 위대한 수, 강력한 수를 두는 능력이 아닙니다. 의미 있는 수를 두는 능력이죠." - P370
허사비스와 그의 팀은 컴퓨터가 최고의 바둑 기사를 이기려면 인간이 바둑을 두는 방식, 그 고도로 창의적이고 조금은 신비로운 방식을 최대한 모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최상위권 아마추어 바둑 기사들의 데이터베이스에서 대국 데이터 십오만 건을 뽑아 인공 신경망에 저장했다. 인공 신경망은 인간 두뇌의 신경망을 모방하는 복잡한 수학 모델로, 서로 연결된 다층 알고리즘으로 구성되며, 각 알고리즘은 특정한 패턴과 특징들을 인식하게끔 설계되었다. 모든 알고리즘이 동시에 작동하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수백만 개의 매개변수로 이뤄진 방대한 모델이 생성되는데, 이를 미세하게 조정하면 네트워크의 전반적인 행위를 바꿀 수 있다. 알파고의 첫 신경망은 대국 수천 판을 분석해 특정한 상황에서 아마추어 바둑 기사가 어떤 수를 두는지를 조금씩 모방하고 복사하고 예측하게 되었다. 이 최초의 인간 기반 데이터 세트가 알파고의 ‘상식‘을 형성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초보가 책을 읽고 얻는 지식과 선생에게서 직접 받는 가르침에 해당한다. 딥마인드 사람들은 이를 정책망Policy Nework이라 불렀다. […] 알파고도 게임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기 위해 바둑판 위치 하나하나의 가치를 가늠할 줄 알아야 했고, 승리에 가까워지고 있는지, 아니면 패배로 끌려가고 있는지 시시각각 판단할 줄 알아야 했다. 자기 자신을 상대로 경기를 치러야 했다. - P373
알파고는 주저하지 않았고 두 번 생각 하지도 않았다. 지치는 일도 없었다. 자기 의심 따위는 알지도 못했다. 스타일이나 아름다움 따위에 무관심했으며 프로 바둑 기사들처럼 서로 속고 속이며 치밀한 심리전을 벌이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상대가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에 철저히 무관심한 채로 그저 이기는 것에만 몰두했다. 알파고에게는 단 한 집 차이로 이긴다. 해도 그저 똑같은 승리일 뿐이었다. 이따금 알파고가 모두의 눈에 형편없고 평범해 보이는 ‘게으른‘ 수를 두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한국의 어느 해설자가 지적한대로 알파고의 게으른 수는 철저히 계산된 결과였다. 각각의 게으른 수는 감지되지 않을 만큼 아주 조금씩 최종 목표를 향해 판을 끌고 갔고, 그 수들의 진정한 가치는 종반에야 비로소 드러났다. - P377
훗날 판후이는 이렇게 썼다. "그건 마치 블랙홀처럼 조금씩 당신을 빨아 들인다. 벗어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다. 알파고는 아직 증상이 발현되지 않았으나 기필코 목숨을 앗아갈 질병처럼 스멀스멀 다가온다. 첫 고통을 느낀 순간 당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다." - P378
이런 식의 행동이 처음은 아니었다. 알파고는 특정한 바둑판 배열과 마주할 때면 갑자기 위치와 가치 감각을 잃고 정신을 놓아버리곤 했다. 눈이 멀기라도 한 것처럼 명백히 죽은 영역에서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면, 자신과 상대를, 흑과 백을, 아군과 적군을, 삶과 죽음을 분간하지 못했다. - P386
이후에 그는 말했다. "알파고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사람들이 기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유는 분명했다. 그전까지 사람들은 무력감과 공포감을 느꼈던 거다. 인간이란 존재가 너무나도 나약해 보였으니까. 이 승리는 우리가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증거다. 시간이 지나면 AI를 이기기가 훨씬 더 힘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 한 번의 승리······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느꼈다. 한 번으로 충분했다." 자리에 앉아 진지하게 바둑판을 보던 이세돌을 향해 데미스 허사비스가 다가와 어깨를 살며시 두드리며 축하와 존경의 마음을 전했다. - P390
컴퓨터가 무한한 연산 능력을 가동해 끝없는 확률의 선을 살피는 동안 데이비드 실버가 팀원들에게 물었다. "그 수가 나올 확률이 얼마나 된대?" "0.0001." 주니어 연구원이 대답했다. 침묵이 흘렀다. 만분의 일. 두번째 대국에서 알파고가 획기적인 37수를 두며 바둑계에 존재감을 알렸을 때 자신의 수에 부여한 확률과 정확히 똑같았다. 결국엔 알파고 네트워크도 중국 프로 기사 구리가 이세돌의 수에 붙인 이름을 인정한 셈이었다. 그것은 실로 신들린 움직임, 신의 손길이 닿은 한 수였다. 인간은 만 명 중에 단 한 명만이 떠올릴 수 있었던 수. 이세돌의 끼움 수에 알파고가 허둥댄 것은 그래서였다. 인간의 경험치를 훌쩍 뛰어넘은 것은 물론. 알파고의 무한해 보이는 능력조차 초월한 수였으므로. 서로 마주한 이세돌과 컴퓨터는 바둑의 한계를 뛰어넘어 낯설고 끔찍한 아름다움을, 이성보다 강력한 논리를 펼치며 머나먼 곳까지 파문을 일으켰다. - P393
보통 인간 바둑 기사는 얼마만큼의 영토를 장악하느냐로 판세를 가늠한다. 이 간단명료한 논리에 따르면, 영토를 많이 차지할수록 승률이 올라간다. 반면 알파고는 이기려면 영토가 정확히 얼마만큼 필요한지를 극도로 정밀하게 계산했고, 그 이상의 영토는 넘보지 않았다. 인간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컴퓨터로서는 압도적 승리이건 간발의 차이이건 다를 게 없었다. 필요도 없는데 뭐하러 굳이 영토를 먹어치우려 한단 말인가? - P396
이세돌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속절없이 무력한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해 다시 한번 팬들과 전 세계 사람들에게 사과했다. 다만 굴욕적인 패배는 자신의 개인적인 약함 때문이지 컴퓨터가 근본적으로 더 우월하기 때문은 아니라고 힘주어 말했다. "알파고가 나보다 반드시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인간은 인공지능을 상대로도 할 수 있는 게 많다고 믿습니다. 더 보여줄 수 있었는데 그게 참 아쉽습니다. 바둑은 아마추어이건 프로이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게임입니다. 즐거움이 곧 바둑의 본질이지요. 알파고는 분명 막강하지만, 바둑의 본질은 알지 못합니다. 나의 패배는 인류의 패배가 아닙니다. 이번 대국으로 드러난 것은 나의 약점이지 인류의 약점이 아닙니다." - P397
데미스 허사비스와 데이비드 실버는 그대로 남아 팀을 대표해 한국 기원이 알파고에게 수여하는 명예 9단증을 받았다. 9단은 그랜드마스터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위치로, 바둑 실력이 신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에게만 주어졌다. 알파고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단증에는 001이라는 일련번호가 붙었고, ‘귀하는 평소 기도 연마에 정진하고 기사로서 인격도야에 힘써 기품이 입신의 역에 이르렀으므로 9단을 면허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 P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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