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신조차 창조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발견해내고 있었다. 이전까지 우주 어느 곳에서도 그러한 환경은 존재하지 않았다. 핵분열은 보통 별이나 거대한 천체 엔진 중심 부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우리는 지름이 1.5미터밖에 되지 않고 6킬로그램의 조그마한 플루토늄 코어가 들어 있는 작은 금속 구체 내부에다 핵분열을 성공시켰다. 우리가 그런 일을 해냈다는 게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건 단순히 나치를(나중에는 러시아였고 중국이었으며 세상이 끝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적을) 이기려는 광란의 경쟁이 아니었다. 우리가 그 일을 한 건 프로메테우스가 준 선물을 극한으로 작열시킴으로써 인간의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고 불가능한 것을 실현하는 데서 오는 즐거움 때문이었다. - P179
그는 우리나라가 지적으로 탁월한 과업을 세운 것은 역사나 우연의 산물도, 일종의 정부 기획도 아니며 그보다 더 이상하고 근원적인 무언가 때문이라고 믿었다. 중앙 유럽의 한 나라로서 사회 전체에 가해지는 압박, 그 안에서 개개인들이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극도의 불안, 그리고 비범하지 못하면 멸종하고 말리라는 절박함 때문이라는 거였다. 한번은 그의 핵 억지 이론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그가 나에게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안에 있는 악과 고통을 전부 세상에 내보내고 나면 상자 안에 뭐가 남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병 바닥—알다시피 그건 사실 상자가 아니라 커다란 항아리나 병에 가깝거든—에서 조용하게 잠자코 기다리고 있는 건 엘피스Epis라네. 대개 사람들은 그 존재를 희망의 정령으로 여겨 파멸의 정령인 모로스Moros의 반대 개념으로 이해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존재의 이름과 본성을 좀 더 정확히 풀이하자면, 인간이 가진 기대에 대한 관념 정도가 아닐까 싶어. 악의 뒤에 무엇이 따라오는지 우리는 모르잖나? 때로는 가장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힘이 시간이 지나 우리를 구원할 도구가 되기도 하니까." 나는 그에게 어째서 신들이 아픔과 고통과 병과 죄악을 몽땅 자유롭게 풀어놓고 정작 희망만은 병 안에 가둬놓는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눈을 찡긋하며 그야 신들은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는 걸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 P180
그는 나머지 사람들과 다르게 세상을 보았고, 그게 그의 도덕적 판단을 상당 부분 물들였다. 그는 전쟁을 일으키거나 카지노에서 돈을 따려고, 아니면 포커 게임에서 좀 이겨보려고 『게임과 경제 행동 이론』을 쓴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인간의 동기를 완벽히 수학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인류의 영혼 일부분을 수학으로 포착하려던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사람들이 경제나 그 밖의 다른 분야에서 선택을 할 때 따르는 일련의 규칙을 이론화하는 데 상당히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러니 힐베르트가 연치의 마음속에 불붙인 잉걸불,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을 붙들겠다는 그의 원대한 희망은, 완전히 꺼진 게 아니었던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냥 나 혼자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도 같다. 사실 그에게는 뭐 그리 고귀한 목표 따위는 없었을 수도 있다. 언제나 그랬듯 그냥 무책임하게 즐겼던 것인지도. - P181
모든 것을 수학화하고 싶어했다. 생물학, 경제학, 신경학, 우주학에서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꿈. 인간 사고의 모든 영역을 변혁하고 무한한 계산의 힘을 세상에 풀어 과학의 목덜미를 움켜쥐겠다는 꿈.
그는 그래서 그 기계를 만들었다.
"이런 종류의 장치는 아주 획기적으로 새로운지라 실제 작동된 후에야 쓸모의 상당 부분이 선명해질 거요." 그가 내게 한 말이다. 그는 알았던 것이다. 진짜 문제는 기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 기계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임을. 그리고 그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 P191
만약 34번가에 같은 폭탄을 떨어트리면 다운타운 전체가 초토화되어 내 주변의 모두가 죽고 모든 건물이 순식간에 무너질 테지. 이런 생각을 하며 시내를 돌아다니면 잔해와 돌무더기가 사방에 보이기 시작했다. 공사장 인부들을 보면 그저 웃음이 났다.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어차피 무너질 텐데 뭐하러 다리를 짓고 아파트를 짓는담? 다들 미쳤군! 전혀 이해를 못하는군! 뭐하러 새로운 걸 만들어? 다 쓸모없는데! 폭탄은 하나가 끝이 아니었다. 폭탄을 만들기란 쉬웠고, 머지않아 또 사용될 것이 틀림없었다.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사람들은 늘 그렇게 행동하니까. 국제관계는 전과 달라진 게 하나 없었다. 그러니 새로운 창조는 아무 소용도, 의미도 없다고 나는 확신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나의 믿음은 틀린 것으로 판명이 났고, 사람들이 계속 살아갈 수 있었음에 나는 진심으로 기쁘다. 그러나 처음에는 우리가 필히 파국으로 치달으리라 생각했다. 특히 그 작자들이 매니악을 이용해 수소폭탄을 만들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 P199
폰 노이만의 발명품이 아니었다면 열핵무기는 사실상 만들어질 수 없었다. 컴퓨터의 운명은 애초부터 열핵무기와 단단히 얽혀 있었다. 폭탄 제조 경쟁은 컴퓨터에 대한 조리의 열망으로 더욱 가속화되었고, 반대로 매니악을 만들려는 노력은 핵무기 경쟁으로 앞당겨졌기 때문이다. 과학이 작동하는 방식은 이렇게나 소름이 끼친다. 인간 발명품 중 가장 독창적인 물건과 가장 파괴적인 물건이 정확히 동시에 탄생하다니. 우주를 정복하고 생물학과 의학이 눈부시게 발전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첨단 기술 세상의 많은 부분이 단 한 사람의 편집증적 집착으로 인해, 또 수소폭탄의 실현 가능성을 계산하느라 개발된 전자 컴퓨터로 인해 추진력을 얻었다. 울람을 생각해도 그렇다. 죽음의 위기를 겪으며 무덤 속에 한 발을, 아니 두 발을 디뎠던 폴란드인 수학자가 이후 정신 나간 상상력을 발휘한 덕에 우리는 기적 같은 계산법을 얻었다. 그 기법이 마침 딱 알맞은 시기에, 마침 딱 알맞은 기술과 만나 수리물리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 그리고 세상은 불타기 시작했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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