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도 하나의 방법이긴 하다. 철조망을 통과하는 요령에 ‘밑으로 통과‘와 ‘위로 통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회‘ 역시 철조망 통과 요령 가운데 하나라는 걸 훈련병 시절 조교로부터 배웠다. 우회는 피해서 돌아가는 것이다. 통과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다. 통과하지 않고도 통과할 수 있다. 참여가 아니라 외면하기 위해 읽은 책들이 세상, 개인의 남루함과 비루함을 폭로하는 데 열심인 것만 같은 이 무정한 세상의 환한 빛을 상대할 힘을 제공한다는 것은 역설이다. 이런 식의 의외의 효과가 아주 드물게 나타난다. 피했는데 만나거나, 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한 셈이 되거나, 이쪽을 향해 걸었는데 저쪽에 이르는 것과 같은 일. 유해하지 않은 부작용도 있는 것이다. - P210
한 개인은 세계 속에 놓인다. 세계는 개인의 삶에 침투하고 간섭하고 반사하고 굴절하고 회절한다. 간섭과 반사와 굴절과 회절의 경향과 정도에 의해 개인의 고유한 삶이 만들어진다. 이것을 우리는 이야기라고 한다. 개인은 이 세계의 간섭과 반사와 굴절과 회절에 맞서 싸우며 자기 운명을 만들어간다, 그러려고 한다. - P213
허용되지 않은 것에 대한 욕망에 인간이 이처럼 취약하다. 이 부자유가 스스로의 선택이라는 것보다 더 비참한 것은 없다. 이 비참함은 역설적이라기보다 인간적이다. 인간은 주어진 자유로 부자유를 선택한다.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는 능력, 거짓말할 수 있는 자유가 부자유의 원인이 되었다. "나의 죄는 내가 악마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것이었다." - P215
인간은 악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비범함에 이끌린다. 악을 행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악의 어떤 속성인 비범함을 소유하기를, 소유하고 있다고 내세우기를, 그렇게 보이기를 원한다. 모든 유혹의 핵심에 이 욕망이 깃들어 있거니와 특히 이런 유혹에 취약한 시기가 있다. - P216
금지되지 않은 것을 범할 능력은 누구에게도 없다. 금지된 것이 욕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 욕망하게 한다. - P218
르네 지라르의 모방이론으로 창세기의 이 텍스트를 해석하는 자리에서 장미셸 우구를리앙은 신의 소유(‘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가 아니라 신의 존재(‘신처럼 될 것이다‘)에 대한 모방으로 넘어가도록 하와의 심리 변화를 이끌어낸 뱀의 계략이 성공한 거라고 설명한다. (『욕망의 탄생』) 신의 소유를 욕심낸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에 흔들린 것이다. 인간은 신처럼 되고 싶어졌다. 비범함에 대한 유혹이 저 근원의 시간, 최초의 인간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 P220
우리는 왜 비범함을 동경하는 걸까. 우리 안에 그 가능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우리는 악마가 될 수도 있고 천사가 될 수도 있는데, 그 가능성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다. 때로는 외부의 자극이 절대적인 것 같다. 외부의 자극에 의해 이런 존재가 되거나 저런 존재로 만들어지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이런 존재나 저런 존재가, 가능성의 형태로 들어 있지 않다면, 외부의 자극에 의해 이런 존재가 되거나 저런 존재로 만들어지지 못할 것이다. 어떤 자극에도 자극받지 않을 것이다. 어떤 큰 자극도 자극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안의 존재가 우리에게 그처럼 낯선 것은 우리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고, 확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고, 우리가 우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 P221
비범함은 비범하지 않은 사람을 유혹하고 괴롭힌다. 비범해지라고 유혹하고 비범해지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도록 괴롭힌다. 그래서 우리는 차라리 깨어나지 않는 쪽을 택하려 한다. 자기 자신이 되지 않는 쪽으로, 알 속에 고착하는 쪽으로, 타성과 고정관념에 순응하는 쪽으로 몸을 웅크린다. 알 속에 있을 때가 가장 안전하다. 그 속은 복잡하지도 않고 시끄럽지도 않다. 알을 깨고 나오려고 시도하지 않을 때 우리는 평온하다. 쓰라리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다. 갈등도 없고 사유도 없다. 그래서 ‘모든 힘을 다해 깨어나지 않으려고 한다.‘ - P225
가능성이 평가의 기준이 될 때도 그 평가는 해온 일로부터 산출된다. 창작자에게 평가는 불가피하고, 평가의 기준은 평가하는 이의 내부에 있을 터이니 창작자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나는 어떠어떠한 작가다‘라고 선언할 수는 있지만, 그 선언이 곧바로 평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선언은 자기 다짐에 가깝지만, 평가는 해온 일에 대한 규정에 다름 아니다. 그 배경이나 요인은 평가자의 것이다. 선언이 평가와 어긋날 수 있는 것처럼 평가 역시 선언과 어긋날 수 있다. 평가의 배경이나 요인이 다르니 평가와 평가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는 것도 자연스럽다. - P229
2006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튀르키예의 작가 오르한 파묵은 ‘사무원처럼‘ 일한다고 말한 바 있다. 소설가를 시인과 비교하는 과정에서 한 말이다. 그에 의하면 시인은 ‘신이 말을 걸어주는 자‘이다. 그는 시인이 되고 싶었으나 신이 자기에게는 말을 걸어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고, 그래서 시인이 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신이 자기를 통해서 말을 한다면 어떤 말을 할지 상상해보려고 노력했다. 아주 꼼꼼히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이 바로 산문(소설) 쓰기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정의에 의하면, 시인은 신이 말을 걸어주는 자이고, 소설가는 신이 자기를 통해 할말이 무엇인지 찾으려고 애쓰는 자이다. 시인은 영감의 사람이고, 소설가는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풀어도 될 것이다. 일하듯 쓰는 사람이 소설가 라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아니,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이 소설가이다. 사르트르는 시인을 언어에 봉사하는 사람으로, 소설가를 언어를 이용하는 사람으로 구분했다. 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물을 때 문제삼은 ‘문학‘은 소설(산문)이지 시가 아니었다. 시는 문학이 아니라 예술이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여 일하는 자이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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