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고독이 밀려왔다‘라는 표현을 흔히 사용하지만, 고독은 어쩌다가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독이 가끔 밀려오는 것이 아니고, 고독하지 않다는 착각의 시간들이 가끔 밀려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텅 빈 (사실은 고독으로 가득 찬) 푸른 방에 제아무리 살림살이를 들여놔도 그 방의 빈틈을 완전히 채울 수는 없으리라. 사랑에는 증오라는 반대말이 있지만 고독에는 그 정도로 명확한 반대말이 없다. 공기처럼 늘 확실히 존재하는 어떤 것에는 반대말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일까. - P291
어떤 분이 나에게 물었다. 행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하고. 그래서 나는 행복은 그저 "불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대답했다. 행복은 우리가 불행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그 모든 시간의 이름이거나, 혹은 내가 불행해진 뒤에, 불행하지 않았던 시간들이 뒤늦게 얻는 이름이라고. 그래서 아도르노는 《미니마 모랄리아》(1951)에서 이렇게 말했을까.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 나는 행복 했었다고 말하는 사람만이 행복에 대해 신의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 P292
비판이 비평의 사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판은, 비판을 할 때 만족감을 느끼는 비평가들의, 사명이다. 훌륭한 사명이지만 모두의 사명일 수는 없다. - P324
26세의 칼 마르크스는 《경제학·철학 수고(手稿)》(1844)에서, 돈이 인간관계를 비틀어놓지 않은 상태를 가정해보라고, 그때의 교환은 어떨지를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인간이 인간일 때, 그리고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가 인간적인 것일 때, 그럴 때 당신은 사랑을 사랑과만, 신뢰를 오직 신뢰와만 교환할 수 있다. 당신이 예술을 향유하기를 바란다면 당신은 예술적인 소양을 쌓은 인간이어야 한다.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현실적으로 고무하고 장려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인간이어야만 한다. - P344
어떤 이를 비판할 때 해서는 안 되는 일 중 하나는 상대방을 ‘비판하기 쉬운 존재로 만드는‘ 일이다. 그에 대한 나의 비판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가 그의 다른 글에 이미 존재할 때, 그것을 못 본 척해서는 안 된다. 그런 비판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비판당하는 적은 황당한 불쾌감을, 비판하는 나는 얄팍한 우월감을 느끼게 될 뿐, 그 이후 둘은 ‘이전보다 더 자기 자신인‘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 P350
얼굴에서 음성으로, 음성에서 글자로, 당신은 축소 조정돼왔다. 그러면서 당신은 쉬워졌다. 이 변화의 와중에 당신이 뭔가를 점점 잃어왔기 때문이다. 아, 이 사람은 나와 다르구나, 하면서 느끼게 되는 바로 그것, 그 ‘다름‘ 말이다. 철학 책에 자주 나오는 용어대로라면, 타자의 타자성(他者性, otherness) 말이다. 기술의 발달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타자의 타자성을 본의 아니게 점차 축소하는 방식으로 진행돼온 것처럼 보인다. 이제 나는 당신을 만날 필요가 없다. 당신의 음성조차 듣지 않아도 된다. 당신이라는 글자와 대화를 나누면 되는 것이다. - P353
아름답게 고유한 이야기들이지만, 공통점을 억지로라도 말해 볼까. 못 하는 일이 하나씩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우리‘(이 말의 폭력성을 용서해주길)에게 더 큰 무능력이 있음을 알려주는 이야기다. 동전치기를 잘 못하고(두한), 한글을 못 읽고(봉구), 총을 못 든다(선재), 다시 강조하자.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동전치기를 잘 못하는 두한이 자책하자 철웅이 소리를 지른다. "원래 그런 건데, 네가 뭐가 미안해!" 그래, 미안해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다.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사람들. 귀가 있는데도 듣지 않는 사람들이 세 이야기 모두에 나온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길을 묻는 두한을 사람들은 외면한다. "미안해, 못 알아듣겠네." 봉구가 자신의 무죄를 해명할 때 경찰은 잘 안 듣는다. "이 양반, 치매인가?" 선재의 경우는 아예 말할 엄두조차 못 낸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이 세상은 ‘얼음 강‘이어서 귀가 없기 때문이다. - P367
이 세상에서 가장 열기 어려운 것은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의 문이다. - P367
물속에 살고 있으면서 정작 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물고기. 우리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물)이라는 것은 그 대부분이 엇비슷한 일상과 그것의 권태로운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익숙하고 진부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가 가장 어려운 대상이라는 것.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그것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상과 그 반복이야말로 우리 인생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면, 그것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느냐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닌가? - P369
흔히 인문학은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들 하는데, 월리스에 따르면 그것은 곧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대해 ‘선택‘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방법이란 곧 선택하는 방법이라는 것. 어떤 현실과 맞닥뜨렸을 때 이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다른 생각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늘 같은 방식으로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 P370
컴퓨터가 그렇듯이 인간에게도 초기설정이라는 것이 있다.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자기중심적인 본성과 자신이라는 렌즈로 만물을 보며 해석하도록 되어 있는 경향"이 그것. 타인의 생각이나 감정은 특별히 노력하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반면 나 자신의 생각과 감정은 언제나 생생하고 절박하며 현실적이다. 그래서 대체로 우리는 나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해석한다. - P370
삶은 그 자체로 가치 있거나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어느 쪽이 될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아주 심각한 이야기다. - P371
고갈되지 않는 열정은 의지의 산물이 아니다. - P374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이는 가르칠 ‘필요‘가 없고, 곤란을 겪고도 배우지 않는 이는 가르칠 ‘도리‘가 없다. 그래서 〈양화(陽貨)〉 편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오직 가장 지혜로운 사람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만은 변화시킬 수 없다." 물론 최악의 경우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자신을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 믿고 변화를 거부할 때일 것이다. - P375
지혜와 명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뢰라는 것. 나를 잘 아는, 내 편인, 그런 사람만이 나를 진정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 - P378
과연 우리 사회에서는 ‘정의로운‘ 분배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아니, 그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있기는 한가? 다들 그 불공정한 피라미드의 윗자리에 올라가기만 바라고 있지는 않은가? 김두식 교수의 책 《불편해도 괜찮아〉(창비, 2010)에 따르면, 국립대 교수들이 모여 앉아서 "철도공사 직원들이 우리보다 월급을 많이 받는다니 기가 막히지 않냐?"(194쪽)라며 한탄했다 한다. 저자의 반문이다. "철도공사 직원이 국립대 교수보다 월급을 많이 받는 게 도대체 뭐가 잘못된 일일까?" 그리고 덧붙인다. 그게 그렇게 불만이라면, 우리나라 최대기업 등기이사들의 평균 연봉이 78억이라는 사실에는 왜 분개하지 않는가. - P380
그렇다면 시간과 관련해서는 이런 일을 해야 하리라. 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 변해가는 것을 받아들이고, 변하지 않으면 좋을 것들이 변하지 않도록 지켜내고, 변해야 마땅한데 변하지 않고 있는 것들이 변할 수 있도록 다그치기. - P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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