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은 흙이요, 명성은 수증기이며, 종말은 잿더미로다. - P121

로멜리는 추기경들을 둘러보았다. 의자는 넓게 네 줄로 나뉘었다. 현명한 표정, 따분한 표정, 종교적 열정이 가득한 표정······. 추기경 한 명은 아예 잠이 들었다. 아마도 옛 공화국 시절, 토가 차림의 고대 로마 원로들이 이런 모습이었으리라. 여기저기 유력 후보들도 눈에 띄었다. 벨리니, 테데스코, 아데예미, 트람블레이······. 서로 떨어져 앉았지만 다들 자기 생각에 몰두한 듯 보였다. 문득 콘클라베가 너무 부족하고 자의적인 도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껏 인간이 만든 제도가 아니던가? 성서 어디에도 근거가 없었다. 성서를 아무리 읽어도 주께서 추기경을 만들었다는 구절은 보지 못했다. 성 바오로가 주님의 교회를 생명체로 묘사했는데, 저들이 어떻게 그 안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 - P127

성모 교회에 봉사하는 동안, 제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죄는 바로 확신입니다. 확신은 통합의 강력한 적입니다. 확신은 포용의 치명적인 적입니다. 그리스도조차 종국에는 확신을 두려워하시지 않았던가요?
‘주여, 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El, Eli, lama sabachtani).‘ 십자가에서 9시간을 매달리신 후 고통 속에서 그렇게 외쳤죠. 우리 신앙이 살아있는 까닭은 정확히 의심과 손을 잡고 걷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확신만 있고 의심이 없다면 신비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신앙도 필요가 없겠죠. - P132

나를 적으로부터 지키소서(Munire digneris me) - P146

바로 옆방에서 우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이따금 웃음소리도 들렸다. 지금은 확실해졌다. 옆방 주인은 분명 아데예미다. 콘클라베의 어느 누구도 목소리가 그렇게 깊지 못했다. 소리로 보아 지금은 지지자들과 만나는 중인가 보았다. 이따금 커다란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로멜리는 거부감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정말로 교황 자리가 손안에 들어왔다고 믿는다면, 저렇게 기대감에 들떠 있는 대신 지금쯤 두려움에 떨면서 어둠 속에 누워 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자신의 오만함을 나무라기도 했다. 최초의 흑인 교황은 분명 세계적으로 대역사가 될 것이다. 주님께서 역사의 도구로 쓰신다는 데 그 기쁨을 드러낸다 한들 누가 나무랄 수 있단 말인가? - P175

"스스로 가치가 없다고 믿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가치 있는 사람이죠. 예하께서도 설교하실 때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의심이 없으면 신념도 없다고? 저도 경험한 바가 있어 감명이 깊었는걸요. 정말 아프리카에서 저처럼 지냈더라면 누구든 주님의 자비를 의심했을 겁니다." - P182

폰티피컬 라테란 대학에서 교회법 박사 과정을 공부할 때 카네티의 《군중과 권력》을 읽었다. 당시 배운 내용이 군중을 다양한 범주로 나누는 일이었다. 겁에 질린 군중, 의욕을 잃은 군중, 반항하는 군중 등등. 사실 성직자 그룹에도 유용한 기술이다. 이 세속적 기술을 적용한다면 콘클라베는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군중으로 읽힐 수 있다. 성령의 집단 충동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니 왜 아니겠는가? 라칭거를 선출했을 당시에도 그랬듯 콘클라베는 소심하게 변화를 거부할 수 있다. 어떤 콘클라베는 무모해서 보이티와 같은 인물을 교황으로 선출하기도 했다. 이번 콘클라베와 관련해 로멜리가 걱정하는 바는, 카네티의 소위 분열하는 군중으로 점차 변질되는 것이다. 혼란스럽고 불안정해 쉽게 유혹에 휘둘리는 것이다. 이 경우 언제 어느 방향으로 튈지 알 수가 없다. - P235

"오명 하나 없는 후보가 어디 있어야죠. 어떤 교황은 과거 히틀러 유겐트 일원으로 나치를 위해 싸우고, 공산주의자, 파시스트와 결탁 했다고 비난받은 교황들도 있었죠. 끔찍한 성 추문 보고서를 감춘 적도 있고······. 그렇게 따지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만일 단장 예하께서 교황청 소속이라면 분명 누군가 슬쩍 추문을 흘렸을 겁니다. 대주교라면 한두 번 실수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우리도 사람이기에 약점은 있습니다. 이상을 추구하지만 늘 이상적일 수는 없죠." - P249

다른 추기경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판유리 문 너머 근위병 하나가 수녀들의 신분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아침식사 준비를 위해 출근하는 길이겠지만 아직 어스름 녘이라 얼굴을 알아보기는 불가능했다. 그저 움직이는 그림자가 길게 줄을 선 것만 같았다. 그 시간이라면 세계 어디서나 볼 법한 광경이 아닐까? 어느 곳이나 가난한 이들이 아침을 여는 법이니까? - P293

시간문제일 뿐 비밀이 다 그렇지 않은가. 루카 복음서에 나와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직접 예견하신 바 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 P296

"내가 올바른 일을 했을까요, 엑토르? 추기경 생각은 어때요?"
"양심을 따르는 이는 절대 잘못하지 않습니다, 예하. 결과가 생각과 다를 수 있고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겠죠. 그렇다고 잘못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누군가의 행동을 이끄는 이정표는 당연히 양심이어야죠. 주님의 목소리를 제일 잘 듣는 곳이 바로 양심이니까요." - P300

이제는 모두들 더 잘 알게 되었다. 약점과 결점까지 모두. 칸트의 얘기 한 줄이 문득 떠올랐다. ‘심성이 비뚤 어지면 올곧은 행위는 불가능하다.’ 교회는 비틀린 재목으로 만들었다. 어찌 아니겠는가? 하지만 다행히 주님의 은혜 덕에 재목은 자리를 잡고 2000년을 버텨냈다. 필요하다면 교황 없이 2주일은 더 버틸 수 있다. 문득 동료들을 향한 근본적이고도 기이한 애정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저들의 약점까지도 사랑스러웠다. - P313

투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전혀 기억이 없다. 전날 밤 사건이 많았던 터라 자리에 앉자마자 지쳐 잠들어버린 것이다. 바로 앞에서 펄럭거리는 소리에 화들짝 깼더니 벌써 한 시간이 지나고 그는 턱을 책상에 대고 있었다. 메모지 하나가 접힌 채 책상에 놓여 있었다. ‘그 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마태오 8장 24절.‘ 뒤돌아보니 벨리니가 상체를 숙인 채 지켜보고 있었다. 문득 사람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웠으나 정작 신경 쓰는 사람은 없는 듯 보였다. 맞은편 추기경들도 성서를 읽거나 멍하니 앞만 바라보았다. 검표원들이 제단 앞에서 테이블을 세팅하는 것으로 보아 투표도 끝난 모양이었다. 로멜리는 펜을 들어 인용문 아래, ‘자리에 들면 자나 깨나 여호와께서 이 몸을 붙들어주십니다. 시편 3장‘이라고 휘갈겨 적은 후 다시 돌려주었다. 벨리니는 그 글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로멜리가 그레고리안의 옛 제자이고 대답을 잘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 P315

‘주여, 가능하다면 다른 이에게 성배를 넘기소서.’ 그런데 기도는 외면당하고 독배가 주어지면? 그 경우 거절하기로 각오는 했다. 1978년 천 번째 콘클라베에서 루치아니도 그렇게 했다. 십자가의 길을 거부하는 것 또한 이기심과 비겁이라는 중죄에 해당하기에 결국 루치아니도 동료들의 간원을 받아들였으나 로멜리는 끝까지 버틸 심산이었다. 주께서 자기인식의 재능을 허락하셨다면 당연히 사용할 의무도 있지 않을까? 교황으로서의 고독과 고통과 고난이라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건 교황이 성스럽지 못하다는 데 있다. 성스럽지 않은 교황이라니, 불경도 이만저만한 불경이 아니리라. - P321

일곱 번째 투표는 상서로워야 했다. 일곱은 성취와 완성의 숫자가 아니던가. 주께서 세상을 창조하고 휴식을 취한 날. 아시아의 일곱 교회도 그리스도의 완벽한 신체를 상징한다고 했다. - P329

"힘내게나, 레이. 이 엄청난 걸작을 봐. 기막히게 예언적이지 않은가? 그림 끝에 어둠의 장막 보이지? 예전엔 그저 구름이라고 여겼는데, 지금 보니까 연기가 틀림없구먼. 어딘가에 불이 났어. 가시권 너머일 텐데 미켈란젤로가 감추려 한 걸 보니······ 폭력, 전쟁, 갈등의 상징일까? 그리고 베드로가 고개를 똑바로 들려고 애쓰는데······ 자네도 보이지? 지금 거꾸로 처박힐 지경인데 왜 저러고 있을까? 지금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에 굴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야. 안간힘을 써서 자신의 신앙과 존엄성을 보이려는 게지. 세상은 문자 그대로 뒤집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정을 유지하고 싶은 걸세." - P338

로멜리는 의자에 기대앉아 생각지도 못한 일을 고민했다. 그런데 마태오 10장 16절에 이렇게 적혀 있지 않던가? ‘뱀처럼 현명하고 비둘기처럼 순수하라······.‘ - P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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