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오후의 햇살과 정적, 멀리서 메아리치는 총성이 이따금 그 정적을 깨트리고 있는 마치니 거리는 공허하고 황량하고 손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한시 반부터 머리에 신문지 베레모를 쓰고 조그마한 비계에 올라 유대교 회당 정면, 먼지 가득한 벽돌에 이 미터 높이로 고정시켜야 하는 대리석판 옆에서 일하는 젊은 노동자에게도 그렇게 보였다. 원래 농부였다가 전쟁 때문에 도시로 이주해 미장이 일을 해야 했던 그의 존재는 곧바로 햇살 속에 사라졌고, 곧이어 자기 자신도 그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을 무력화시키는 8월의 태양에 어떤 방식으로든 맞서려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뒤이어 다양한 몸짓과 색깔로 그의 등뒤에서 돌 포장길 한쪽을 뒤덮은 약 간의 행인들 무리도 마찬가지였다. - P109
공포나 증오가 있으면 합리적인 생각을 못하는 법이다. - P117
대로변 쪽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문 앞에는 한가로이 노닥거리며 파르티잔 십여 명이, 입구의 계단에 앉아 있거나, 맨 다리 사이에 기관총을 걸치고 있거나, 맞은편 방대하고 풍성한 정원의 경계선을 이루며 길게 뻗은 높은 담장에 바짝 대놓은 지프차 의자에 누워 있거나 했다. 하지만 그들 외에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일부는 두꺼운 서류뭉치들을 팔로 안아서 옮기느라 모두 활력적이고 단호한 표정으로 계속 오고 가곤 했다. 절반은 그늘지고 절반은 햇살이 비치는 거리와 오래된 귀족 저택의 열린 현관 입구 사이에서, 요컨대 위 아래로 강렬하고 생생하고 즐겁기까지한 분주한 활동이 이어졌고, 도로의 자갈 포장을 스치듯이 낮게 나는 제비들의 지저귐 소리가, 일층의 철창 두른 대형 창문들을 타고 끊임없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타자기의 탁탁거리는 소리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 P118
그는 부헨발트에 있었고, 유일하게 거기서 돌아왔다! 수많은 신체적 정신적 고문을 견뎌내고, 수많은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후에. 그리고 그들은 거기에, 그의 처분을 기다리며 모두 경청하기 위해 귀를 곤두세우고 있었다. 만약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지치지 않고 그 이야기를 들어줬을 것이며(그렇게 늦게야 그를 알아 보고, 실제로는 또다시 그를 거부하고 배제하려고 했던 것에 대해 용서받기 위해서라도), 심지어 머리 위 데스테 성의 시계가 두 번 울리면서 벌써 부르고 있는 점심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자신들의 선의를 증명하고, 그 끔찍하고 결정적인 기간 동안 자신들의 관념이 겪은 변화를 뒷받침하려는 듯, 조잡한 천으로 만든 바지, 소매를 걷어올린 널찍한 겉옷, 넥타이 흔적도 없이 목 위로 열린 옷깃, 꼼꼼하게 광택을 내지 않은 신발, 샌들 신은 맨발, 그리고 당연히 수염, 그들 모두가 기르고 있는 수염을 과시하면서 모두가 다같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자네, 많이 바뀌었군? 세상에나 이제 완전히 어른이 됐어, 이렇게 살도 쪘고! 하지만 봐, 우리도 바뀌었지. 세월은 우리도 뚫고 지나갔어······‘ 그러면서 의심할 바 없이 진지하게 제오의 검토와 판단에 자신을 맡겼고, 또 진지하게 그의 굽힐 줄 모르는 거부에 괴로워했다. […] 말하자면 좋든 나쁘든 바로 그때부터 새로운 시대가, 무서운 악몽들로 가득한 오랜 잠처럼 이제 핏속에서 끝나가는 시대하고는 다른, 비할 바 없이 더 나은 시대가 시작되려고 한다는 확신이었다. - P126
파자마 바람인데도 땀에 푹 젖은 제레미아 타베트는 검은색 대형 식탁 한쪽에 앉아서, 또다시 미심쩍고 당황한 듯 손가락 끝으로 잿빛 수염을 비틀었다. 파시스트 행동대원의 고전적인 염소수염은 페라라의 늙은 파시스트 중 그 혼자만 하고 있었다. 그게 만용인지 경솔함인지, 아니면 적정선의 타협에서 나온 교활함인지 아무도 몰랐지만 말이다. 제오는 그 염소 수염과 퉁퉁한 손이 시선을 모았기에, 그가 건네는 권유는 옅은 웃음과 함께 머리를 가로저어 피하면서, 광적인 집착으로 파란 눈을 고정시켰다. - P133
진실로 낮의 햇살은 권태, 정신의 완고한 잠,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권태로운 쾌락"이다." 하지만 마침내 황혼의 시간이, 평온한 5월 황혼의 빛과 그림자에 똑같이 젖어드는 시간이 내려오면, 조금 전까지 완전히 일상적이고 무관심하게 보였던 사람들과 사물들이, 갑자기 여러분에게 진정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갑자기 난생처음 자기 자신과 여러분에게 말을 걸어올 수도 있다(그리고 그 순간에 여러분은 마치 섬광에 얻어맞은 것 같을 수도 있다). - P153
여러 건축물이 모여 있고 드넓기 그지없는 페라라 시립 공동묘지를 아름답다고, 위안을 줄 만큼 아름답다고 규정한다면, 우리로선 이탈리아에서는 애도하지 않고 죽음을 다룰 수 있다고 하는 그런 말에 대응할 만반의 태세가 돼 있다는 듯이, 어쩔 수 없이 찜찜해하면서 습관적으로 웃음 짓게 될 위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바로 뻗은 작은 길인 보르소 거리, 길 양쪽에 대리석 공방들과 꽃가게들이 모여 있고 나란히 자리한 두 커다란 개인 정원의 울창한 나뭇잎들이 길게 뒤덮고 있는 그 거리 끝에 다다르면, 갑작스레 나타나는 체르토사 수도원과 바로 옆 공동묘지의 전경이 언제나 축제와도 같은 즐거운 인상을 준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 P157
그런데 그녀는 누굴까? 누구 딸이지? 갑자기, 돌발적으로 아가씨의 머리를 묶은 붉은 리본에 마음을 빼앗긴 브루노는 계속 생각했다. 자신이 소년이었고 그녀는 어린아이였을 그 전쟁 시절이 그녀에게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을 수 있을까? 이제 이탈리아 어디에서 든 청소년들이 미국 잡지 화보에 나오는 아무것도 모르는 틴에이저 같을 수 있는 것일까? - P168
그러니까 등뒤에 남기고 떠났던 낡고 조그마한 세상이 저기 그대로 있구나라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마치 밀랍으로 복제한 듯 저기 모두 똑같은 모습으로 있구나. 하지만 클렐리아 트로티는? - P170
로비가티는 신발 밑창에서 잘라낸 가죽처럼 단단한 손바닥으로 노끈을 둘둘 감아 정확하게 힘을 주어 잡아당겼다. 입안에는 언제나 작은 못을 한 움큼 담고 있었고, 그의 혀와 입술은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고 정확하게 필요에 따라 밖으로 하나씩 내밀었다. 신발 한 짝을 무릎 사이에 바이스처럼 아주 단단하게 조인 채 지칠 줄 모르는 자동 동작으로 거기에 망치질을 해댔다······ 정말 훌륭하고 대단해! 브루노는 이렇게 생각했다. 로비가티의 힘과 자의식은 바로 그런 손의 노고에서 생겨나는 것이리라! 그의 크고 검은 손, 믿을 수 없을 만큼 거친 그 손의 분주한 움직임은 대화할 때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단 한 번의 망치질로 두꺼운 가죽에 박히는 못이 때로는 어떤 대화보다 그에게 더 유용한 것 같았다. - P180
자기가 하는 일이 아주 초라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누구보다 내가 그렇게 확신하는데 어쩌겠어요. 하지만 그 직업 덕택에 어렸을 때부터 그럭저럭 생계를 꾸려갈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독재기간 내내 전혀 굴종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지요. 그런데 브루노 씨, 구두장이 일은 흥미로운 측면이 없다고 생각해요? 모든 인간 활동에는 흥미로운 측면이 있어요. 열정적으로 수행하고, 그 비밀을 파악할 수 있으면 돼요. 가시가 돋친 말은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브루노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슬픔을 조금씩 잊었고 결국 거의 행복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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