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가고 나서 나는 핸드폰을 꺼내 새비 아주머니의 사진을 보았다. 두 달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남편을 기다리다 그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을까. 두번째 삶을 선물받은 기분이었을까. 두려울 정도로 행복했을까. 꿈이라고 의심하진 않았을까. - P99
내가 새비 아주머니의 입장이었더라도, 나는 남편을 위해 그만큼 울었을 것이고 남편을 다시 만나서도 그만큼 행복했을 것이다. 전남편이 저버린 것은 그런 내 사랑이었다. 내가 잃은 것은 기만을 버리지 못한 인간이었지만, 그가 잃은 건 그런 사랑이었다. 누가 더 많은 것을 잃었는지 경쟁하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경쟁에서 나는 패자가 아니었다. - P99
지우를 배웅하고 오는 길에 나는 문득 불안함을 느꼈다. 지우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 엉망이지 않았을까 두려워서였다. 눈에 띌 정도로 야위고 머리카락이 많이 빠진 꼴로 친구에게 괜찮아, 나는 괜찮아, 라는 말만 반복하던 나의 모습이. - P106
"재미있었어. 옛날에."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지연이 너는 기억 못할 수도 있지만, 열 살 때 네가 우리집에 와서 며칠 있었을 때 말야. 같이 바다도 가고." "저도 기억나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많이 웃었던 것 같아요. 할머니가 좋았어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내가 누군가를 좋아했다고 고백한 게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널 다시는 못 볼 줄 알았어." 할머니가 말했다. "네가 날 영영 잊은 줄 알았지." "할머니." "어쩔 수 없었던 거 알아. 미선이랑 나랑 사이가 그러니까. 그래도 가끔은, 너를 볼 수 없었던 시간이 원망스럽기도 했어. 그래, 미선이에게 그런 마음이 들었어." "그럴 만해요." 내가 답했다. "엄마에게는 엄마만의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래. 그랬을 거야." - P109
하루는 학교에서 백정의 딸이라는 놀림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할머니는 길모퉁이에서 울다가 새비 아저씨를 만났다. 당황해서 눈물을 닦는데 아저씨가 집으로 같이 가자고 했다. 아저씨는 할머니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걸으면서 할머니가 태어났을 때 얼마나 귀엽고 소중했는지, 할머니의 엄마가 얼마나 용기 있고 사랑이 많은 사람인지 이야기해주었다. 예전에는 부모가 누구인지에 따라 귀한지 천한지를 갈랐다고 아저씨는 말했다. 그러다 일본인들이 조선에 들어온 뒤 조선인들은 양반이고 상민이고 간에 그저 천한 취급을 당하게 되었다고 했다. – 사람들은 기런 걸 좋아한단다. 아저씨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영옥이 너는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천하다고 생각하니? 할머니가 고개를 젓자 아저씨는 진짜 천함은 인간을 그런 식으로 천하다고 말하는 바로 그 입에 있다고 했다. - P111
봄이 끝날 무렵에 마당에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들어왔다. 누런 털에 꼬리에는 검은 털이 조금 섞인 날씬한 수캐였다. 중조모는 개의 이름을 봄이라고 지었다. 봄이는 그 누구보다도 증조모를 잘 따랐다. 섬돌 위에 놓인 증조모의 신에 턱을 괴고 잠이 들었고, 증조모가 밖으로 나가면 겅중대면서 그 옆에서 뛰었다. 증조모는 귀찮다는 듯이 봄이를 옆으로 밀치면서도 결국에는 자리에 앉아서 봄이의 머리를 한참 동안 쓰다듬었다. 증조모가 집을 오래 비울 때면 봄이는 동구 밖가지 가서 기다리다가 돌아오는 증조모를 향해 달려갔다. ‘너는 내가 왜 좋아?‘ 의아한 표정으로 봄이의 등을 쓰다듬는 증조모의 얼굴에는 늘 작은 서글픔이 서렸다. 자기에게 달라붙는 봄이에게 그러지 말라고 투정하듯 말하는 중조모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누군가에게 그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증조모에게는 평범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 P112
새비 아주머니를 떠나보내야 했던 증조모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살면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와 영영 헤어져야 하는 마음이 어떤 것일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준 사람과 어쩔 수 없이 떨어져야 하는 심정이 어떤 것일지 짐작할 수 없었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던 편이 나았을까요." "그게 무슨 뜻이니." "헤어졌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하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차라리 증조할머니랑 새비 아주머니가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서로를 모르는 채로 살았다면."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가만히 차를 마셨다. 내가 진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끝이 슬프면 그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구나." - P115
"새비 아주머니는 엄마의 상처였어. 그렇지만 자랑이기도 했지. 엄마를 크게 넘어뜨렸지만, 매번 털고 일어날 힘이 되어주기도 했으니까. 엄마가 새비 아주머니를 떠올리며 가장 많이 했던 얘기는 이거였어. 새비가 나를 얼마나 귀애해줬는지 몰라, 새비가 나를 얼마나 애지 중지했는지 몰라.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 아픈 일이 많았는데도, 새비 아주머니를 기억하는 엄마의 표정은 늘 환했어. 꼭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 말이야.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상처 같은 거 받지 않아도 됐겠지만 그래도 엄마는······"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는 삶을 택하셨겠네요." "그래. 그게 우리 엄마야." 할머니는 나를 보며 웃었다. - P116
어쩌면······ 희자 아바이를 생각하면 그게 나았을지도 몰라. 차라리 순간이었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희자 아바이가 이렇게 아플 일이 없었을 텐데. 그러면서두, 이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내 욕심이라고 욕해도 좋다. 희자 아바이 말고 내 위주로 생각한다고 욕해도 좋다. 그래두 난 희자 아바이가 살아 돌아오고, 그렇게 살아서 나랑 희자랑 같이 지냈던 시간이 좋았더랬어. 희자 아바이가 히로시마에서 죽었다면 내가 무얼 빌었을까 생각해보면 말이야······ 고저 하루라도, 아니 한 시간이라도, 십 분이라도 희자 아바이를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안아보는 거, 내 기걸 원했을 것 같아. 돌아와 고작 몇 년 살아보지도 못하고 떠나보낸다고, 마음만 더 아픈 거 아니냐고 말하는 동무들도 있었지. 그런데 삼천아 봐봐라, 한 시간, 한 순간에 비한다면 이 몇 년은 참으루 긴 시간 아니갔어. 나, 희자 아바이가 참 귀해. 기래, 얼마 있으면 희자 아바이가 가겠지. 내 기걸 생각하면 제정신이 아니야. 그런데두 난 이쪽이 더 좋다. 희자 아바이가 어떤 모습이어두 내 곁에 있잖아. - P120
삼천아, 새비에는 지금 진달래가 한창이야. 개성도 그렇니. 너랑 같이 꽃을 뽑아다가 꿀을 먹던 게 생각나. 그걸 따다가 전을 부쳐 먹던 것두, 같이 쑥을 캐다가 떡을 만들어 먹던 것도. 인제 나는 꽃을 봐도 풀을 봐도 네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됐어. 별을 봐도 달을 봐도 그걸 올려다보던 삼천이 네 얼굴만 떠올라. 새비야, 참 희한하지 않아? 밤하늘을 보면서 그리 말하던 네가 떠올라. 이것도 희한하구 저것도 희한한 우리 삼천이가 생각나누나. - P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