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심의 힘이 얼마나 센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는 순교자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사람이었다. 가진 모든 것을, 목숨까지도 버려 천주에 대한 사랑을 지키려 했던 그들의 이야기에 감화를 받았다. 그는 증조모를 알게 되면서, 그녀가 사는 모습을 보고서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준비를 했다. 너를 구하기 위해 내 인생을 희생하겠다는 마음이었다. 그 결과로 그는 평생을 억울함과 울화와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했다. 자기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부모를 떠날 때만 해도 몰랐던 것이다. 아니, 그는 평생을 몰랐다. 자기가 얼마나 작은 손해에도 예민하고 속이 좁은 사람인지. 자신은 부모를 떠날 만큼 용기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저 충동일 뿐이었다. 떠나고 싶은 충동. 그는 그가 누릴 수 있는 인생을 그녀가 빼앗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P60
자신이 잃은 그만큼을 아내는 보상해야 했다. 그런데 아내는 자신의 기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감사하는 마음은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무슨 여자가 저렇게 뻣뻣하지? 그는 생각했다. 아내에 대한 애정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자신과 달리 당당하고 강인한 그녀를 동경하면서도 두려워했다. 남편으로서의 일말의 권위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예감했고, 아내가 속으로 자신을 비웃고 있지는 않을까 염려했다. 나는 너를 돕기 위해 모든 걸 버렸는데, 왜 그만큼의 대접을 안 해주고 내 기분을 맞춰주지 않는 거지? 그는 의아했고 아내에게 속은 기분이 들었다. 아내는 그저 자기 할일에만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부터 양민이었던 것처럼 굴었다. 백정인 주제에 말이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는 아내를 그렇게 바라봤다. 본데없이 자라서 남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모른다고. 늘 고개를 빳빳이 드는 모습에 그는 옅은 노여움을 느꼈다. 그런 일로 노여워했다는 걸 인정하려 하지는 않았지만. - P61
– 맛이 좋아요. 아즈마이. 새비 아주머니가 그런 증조모를 보고 말했다. 자기가 한 밥을 먹고 맛있다고 말해준 사람도 증조모에게는 새비 아주머니가 처음이었다. 증조모는 그 아이 같은 얼굴을 오래 보고 있기가 어려웠다. 증조모의 마음이 새비 아주머니에게로 기울어서, 그 곳으로 기쁨도 슬픔도 안타까움도 모두 흘러갈 듯한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그렇게 기운 마음으로 뒤뚱거리며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증조모는 새비 아주머니를 잘 알지 못했던 그때부터도 새비 아주머니를 잃을까봐 덜컥 겁이 났다. 언젠가 새비 아주머니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더이상 그 말간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얼어붙은 얼굴로 자신에게 실망했다며 등을 돌린다면 숨쉬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 P64
‘사람들은 원래 기래.‘ 고조모가 증조모의 마음속에서 말했다. ‘사람한테 기대하지 말라우.‘ ‘어마이, 나는 사람들한테 기대하는 기 아니라요.‘ 증조모는 생각했다. ‘나는 새비한테 기대하는 기야.‘ 언젠가부터 증조모는 마음속으로 고조모와 이야기를 했다. 혼자 집에 있을 때는 소리 내어 고조모에게 말했다. 너무 외로워서 누구라도 붙잡고 이야기하고 싶던 때였다. ‘새비도 사람이라. 걔라고 무에 다를 기 있나? 내는 너가 상처받을 까봐 걱정된다이. 말이 승한 사람, 무조건 믿지 말라우.‘ 고조모가 말했다. ‘말 때문이 아니야, 어마이. 새비는 달라.‘ 증조모가 답했다. - P65
"읽기 많이 어려우세요?" "또 구차한 이야기 하게 되네. 눈이 잘 안 보이잖아. 편지는 책보다 더 심해. 종이며 잉크가 바랬으니까 돋보기를 써도 잘 보이지가 않아. 영 뿌옇기만 하구······" "제가 읽어드릴까요?" "괜찮아, 괜찮아." 할머니가 손을 휘휘 저었다. "내일 출근해야지." "제가 읽어드리는 게 불편해서 그러세요?" "그런 게 아니야. 네가 자꾸 나한테 뭘 해주면, 내가 되돌려줄 게 없어서 문제가 생겨." "할머니는 이야기해주시잖아요." "네가 들어주는 거지." "아닌데요." 나는 그 순간 할머니에게 서운함을 느꼈고, 서운함을 느꼈다는 사실에 놀랐다. 몇 번이나 만났다고 이 사람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걸까. - P72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원하든 그러지 않든 그것이 인간의 최종 결말이기도 했다. 지구가 수명을 다하고,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순간이 오면 시간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때 인간은 그들이 잠시 우주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도 기억되지 못하는 종족이 된다. 우주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곳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최종 결말이다. - P82
그 껍데기들을 다 치우고 나니 그제야 내가 보였다. 깊이 잠든 남편 옆에서 소리 죽여 울던 내 모습이, 논문이 잘 써지지 않으면 내 존재가 모두 부정되는 것만 같아서 누구보다도 잔인하게 나를 다그치던 내 모습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숨쉬듯 나를 비난하고 비웃던 내 모습이. […] 나는 항상 나를 몰아세우던 목소리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나만큼 나를 잔인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용인하는 일이. - P85
"명희 아줌마 말 진짜야?" "무슨 말?" "엄마가 아줌마 어머니 수술비 보탰다면서." "아." 엄마는 핸드폰 게임을 하면서 내 물음에 건성으로 답했다. "명희 언니라도 그렇게 했을걸. 멕시코 가기 전에 빌려준 돈도 다 갚고 그랬어, 언니가." "아직도 잊지 못하시는 것 같았어." 엄마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더니 휴지에 코를 한 번 풀고는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나는 엄마에게서 등을 돌리고 보조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았다. 엄마에게 명희 아줌마는 어떤 의미였을까. 엄마는 명희 아줌마가 멕시코로 떠난 일에 대해서 지나가듯 내게 이야기했었다. 그날의 기온을 말하듯이, 거스름돈이 얼마 나왔는지 말하듯이 아무 감정 없이 이야 기했었다. 나는 엄마를 알지 못했다. 명희 아줌마보다 더, 할머니보다 더, 그리고 어쩌면······ 아빠보다 더. - P88
"그런데 어른들이 할머니한테 나쁘게 했어요? 백정 딸이라고?" "사람마다 다 달랐는데, 자기 아이들이랑 어울리지 못하게 하던 사람들도 있었지." "증조할머니랑 중조할아버지는 가만히 있었어요?" "난 그런 걸 말하는 애가 아니었어." 할머니가 나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나는 할머니의 말을 정확히 이해했다. 나도 그랬으니까. 나는 바깥에서 슬픈 일을 겪었을 때 집에 와서 부모에게 이야기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울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한 뒤 집으로 가는 아이였다. 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방어할 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공격당하곤 하던 내 존재를 부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존심도 있었던 것 같다. - P94
"우리 아버지가 자기 엄마 아버지를 빼고서 사랑한 사람이 하나 있다면 그건 새비 아저씨였을 거야." "할머니는요. 할머니는 사랑하지 않으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날 사랑하지 않았느냐고?" 할머니는 입을 벌리고서 한동안 나를 골똘히 바라봤다. "얘, 나는 오래전 이야기를 하고 있어. 그래, 아마도 어쩌면······" 그렇게 말하다가 할머니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그날 할머니와 나는 목성을 봤다. 목성의 흐린 줄무늬를 봤다. 할머니는 아이처럼 감탄하면서 접안렌즈에서 오래도록 시선을 떼지 못 했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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