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조부가 열아홉 살이었고 혼담이 오고갈 때였다. 증조부는 고조부에게 혼인할 사람이 따로 있다고 말했다. 그 상대가 백정 집 자식이라는 걸 알고 고조부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기만 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웃을 일이 아니었다. 증조부는 교회당 지붕 아래에서 인간의 귀함과 천함은 타고나는 데 있지 않고 그가 하는 행동에 달려 있다고 배워왔던 것이다. 백정 집 여자애가 개나 말보다 못한 취급을 받던 시절에.
어떻게 백정의 자식과 혼인을 할 수 있느냐는 고조부의 말에 증조부는 백정도 천주의 자식이며 인간은 귀천이 없다는 것을 교회에서 배워 알았다고 되받아쳤다. - P33

– 같이 가자.
고조모가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잡으며 말했다.
– 나도 데리고 가라.
병자에게 무슨 힘이 있었는지, 중조모는 치맛자락에서 고조모의 손을 떼어내기가 어려웠다. 그녀가 겨우 손을 떼어내자 고조모는 한 동안 침묵하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기래, 가라. 내레 다음 생에선 네 딸로 태어날 테니. 네 딸로 다시 태어나서 에미일 때 못다 해준 걸 마저 해줄 테니. 그때 만나자. 그 때 다시 만나자.
증조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왔다. 잠시라도 뒤돌아보면 떠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십칠 년 동안 살던 집, 누린내가 가시지 않던 집, 똥지게꾼도 상대해주지 않아 스스로 오물을 퍼내야 했던 집. 해질녘 구석에 핀 꽃이 예뻐 바라보다 아무 이유도 없이 날아온 돌에 머리를 맞아야 했던, 무엇 하나 좋은 기억이 없던 집. 그 집을 떠나 기차역으로 가는데 그 짧은 길이 천릿길 같았고, 걸음걸음이 무거워 납으로 만든 신발을 신은 것 같았다. - P34

할머니는 증조부가 중조모에게 왜 미쳤었는지 조금은 이해한다고 말했다. 증조모의 눈 속에는 아이들에게서나 보일 법한 호기심과 장난기가 있었다. 타고난 기질이 그랬다. 백정 딸 주제에 뭐가 당당하고 즐거워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그런 이유로 어린 시절에는 맞기도 했다. 고개 숙이고 걸어. 감히 양민과 눈을 마주치려 해?
그러나 증조모는 고개를 숙이고 걸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숙이려다가도 저절로 머리를 들게 됐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무리 지어 날아가는 하늘의 새들을 쳐다보느라 넋을 놓았다. 만사를 궁금해했다. 세상이 궁금하고 사람이 궁금했다. - P34

증조부는 처음 열차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달리는 모습에 어지러울 지경이었고 가슴이 뛰었다. 멀리서 울려오는 경적과 바퀴가 철로의 이음매에 닿아 덜컹거리는 소리를 그는 사랑했다.
기회가 될 때마다 그는 동네에서부터 두 시간을 걸어 역사까지 갔고 철로를 따라 걸었다.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리면 가만히 서서 열차를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자리를 피했다. 열차는 귀청을 찢을 듯한 천둥소리 같은 핑음을 내며 지나갔고, 그 진동이 땅을 타고 그의 몸에 전해졌다. - P36

이 철길은 몇 리나 이어지는 기라요? 그때, 이상하게도 그는 그 순간을 이전에도 경험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분명, 그곳에서 그렇게, 얼굴이 검붉게 탄 여자애와 서 있었는데, 이어서 기적 소리가 들리고 까치 한 마리가 서쪽으로 날아갔던 것 같은데······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정말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려오고 마른 까치가 하늘을 날았다. 철길 아래로 내려가면서 그에게 내려오라고 손짓하는 그녀를 보며 그는 그 순간이 순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이상한 직감이었다. - P36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는 그 여자애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떻게 백정 여자아이가 양민 남자에게 태연하게 말을 걸 수 있는지,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볼 수 있는지, 어떻게 양민이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을 수 있는지, 어째서 그에게 그 순간이 처음이 아니었는지, 어째서 붉은 볼의 여자애가 그를 바라보던 그때 기적이 울리고 까치가 날았는지, 왜 그 순간이 마지막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던 건지. 그애는 백정의 자식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그는 어쩐지 괴로워졌다. 백정의 자식이라는 말에 그애의 존재를 구겨 넣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백정의 자식이라는 말로 자신이 그애에게서 받았던 모든 느낌을 부정하려 했다는 사실에 그는 한없이 쓸쓸해졌다. - P37

그녀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다. 바람을 가르며 넓은 보폭으로 걸어가는 모습에 그는 눈길을 빼앗겼다. 억울하고 창피한 기분이 들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어쩐지 그저 슬프기만 했다. 그녀에게는 자신이 위협적인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대체 어떤 일들을 겪었을까, 저애는. 그는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에 빠졌다. - P39

그와 헤어지고 집에 가니 일본 군인 한 사람과 동네 아저씨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동네 아저씨가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일본 사람들이 운영하는 공장에 취직을 시켜주겠다고. 가면 돈도 많이 벌고, 그 돈으로 호강하며 살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고 했다. 그제야 그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세상은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곳이 아니었다. 양민들의 껍데기까지 벗겨 먹는 일제가 인간 취급도 못 받는 자신에게 그런 좋은 기회를 줄 리 없었다.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나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 어마이가 아프시니, 두고 갈 수 없십니다.
그러자 아저씨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그녀에게 다른 선택은 없으며, 나흘 뒤에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말했다. 그날 그녀는 잠들 수가 없었다. 역사 앞에서 사람들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녀는 살고 싶었다. 걷고 싶으면 걷고, 노래 부르고 싶으면 노래 부르고, 웃고 싶으면 웃고, 울고 싶으면 펑펑 울고 싶었다. 백정의 표지 따위는 집어던 져버리고 세상을 보고 싶었다. - P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