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천사가 그녀 앞에 나타났었고, 그 천사의 조언대로 그녀는 한 토목공을 유혹 했노라고. 그리고 가진 돈을 털어 전원에 땅을 샀는데, 토목공이 그녀와 함께 텐트에서 밤을 보내며 낮에는 이 땅에 집을 지을 기초공사를 했다고. 하지만 그녀는 이 토목공을 차버리고 석수와 살았고, 이 석수 역시 텐트 아래서 그녀와 사랑을 나누며 사방 벽을 쌓았다고. 뒤이어 그녀는 목수와 살았는데, 그는 이미 그녀의 방과 침대를 함께 썼다고. 그다음은 배관공이자 아연공인 남자의 차례였는데 해당 작업이 마무리되자마자 이 남자 역시 차버렸고, 그다음으로 함께 살게 된 기와공이 시멘트 기와지붕을 올려주었다고. 그다음엔 화가가 그녀와 밤을 함께하며 천장과 벽에 칠을 하고 집 정면에 초벽을 발라주었고, 마지막엔 소목장이가 그녀에게 가구를 만들어주었다고. 그렇게 만차는 사랑과 온전한 의지로 자신의 집을 가졌고, 노예술가까지 덤으로 얻게 된 것이었다. 정신적인 열정으로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 신의 작업을 이어가며 그녀를 천사의 모습에 담아 조각하는 남자였다. 우리는 이렇게 만차의 삶을 한 바퀴 돌아본 뒤 정원으로 되돌아왔다. - P102

만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상도 하 지 않았던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평생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멀리까지 간 사람이 만차였다. 책들에 둘러싸인 나는 책에서 쉴새없이 표징을 구했으나 하늘로부터 단 한 줄의 메시지도 받지 못한 채 오히려 책들이 단합해 내게 맞섰는데 말이다. 반면 책을 혐오한 만차는 영원토록 그녀에게 예정된 운명대로 글쓰기에 영감을 불어넣는 여인이 되어 있었고, 심지어 돌로 된 날개를 퍼덕이며 비상했다. 깊은 밤 환히 불밝혀진 왕성의 두 창문처럼 부드러운 빛을 발하는 날개였다. 리본과 장식 줄, 황금산 산등성이에 자리한 레너 호텔 앞에서 그녀가 신고 있던 스키를 장식한 똥, 그 모든 사연이 담긴 우리의 러브 스토리를 그 날개는 멀리멀리 사라지게 만들었다. - P104

소장은 나더러 마당에 나가 비질을 하라고 했다. 일손이 필요한 곳에 가서 거들든지, 그것도 내키지 않으면 아무 일 안 해도 좋다고. 다음 주면 나도 그곳을 떠나 멜란트리흐 인쇄소 지하실에서 백지를 꾸리도록 되어 있다고.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삼십오 년을 잉크와 얼룩 속에서 일해온 내가, 더럽고 냄새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선물과도 같은 멋진 책 한 권을 찾아낼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매 순간을 살아온 내가, 이제 비인간적인 백색 꾸러미들을 만들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다니! 이런 통고를 받자 나는 평정심을 잃고 벌렁 나자빠졌다. 흐느적대는 꼭두각시처럼 계단 맨 아랫단에 주저앉았다. 소장의 통고에 마음이 몹시 갑갑해졌고, 입가에는 실성한 미소가 떠올라 사라질 줄 몰랐다. - P106

난데없이 철학 교수가 곁에 와 섰다. 그가 낀 안경알이 두 개의 유리 재떨이처럼 햇빛에 반짝였다. 그는 늘 들고 다니는 가방을 손에 든 채 얼빠진 사람처럼 내 앞에 남아 있었다. "젊은이는 잘 있나요?" 내가 모자를 쓰고 있을 때면 그가 어김 없이 하는 질문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해본 뒤, 젊은이는 없다고 대답했다. "이런, 그래도 아픈 건 아니겠죠?" 그가 놀란 표정으로 받았다. "네, 아픈 건 아니죠." 내가 모자를 벗으며 말했다. "아픈 건 아닙니다. 그래도 솔직히 말씀드려야겠군요. 이젠 끝장입니다. 루테의 기사도, 엥겔뮐러의 비평도 말이죠." 교수는 깜짝 놀라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당신이 그 영감이고 그 젊은이군!" 나는 모자를 다시 눈 위까지 당겨 쓴 뒤 가시 돋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국내 정치』 지난 호도, 『국가 소식』도 끝장입니다. 그 사람들이 나를 지하실에서 내쫓았어요. 아시겠어요?" - P112

나는 이웃집까지, 지난 삼십 오 년간 뼈빠지게 일해온 작업장 입구까지 걸어 갔다. 곁에서 교수가 겅중겅중 걸어오며 내 옷소매를 잡아당겨 손안에 10코루나짜리 지폐를 밀어 넣더니 다시 5코루나짜리 지폐를 쥐여주었다. 그 지폐를 내려다보며 나는 서글프게 물었다. "더 잘 찾아보라고요?" 그는 내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두꺼운 안경알 너머로 말처럼 휘둥그레진 눈을 뜨고 안경을 만지작거리면서 말을 더듬었다. "그렇소. 더 잘 찾아보라고······"
"찾으라니." 내가 받았다. "대체 무얼 말이죠?" 그러자 그는 알아듣기 힘든 소리로 중얼거렸다.
"또다른 기회를, 다른 데서." 그는 몸을 숙여 인사한 뒤 뒷걸음치며 돌아서서 불행의 본거지를 막 벗어난 사람처럼 사라져갔다. - P112

카페 ‘검은 양조장‘ 카운터에 기대앉아 나는 맥주 한 잔을 마신다. 이봐, 오늘부터 넌 혼자야. 홀로 세상에 맞서야 해. 마음이 안 내키더라도 사람들을 보러 나가 즐기고 연기를 해야 할 거야. 이 땅에 발붙이고 있는 동안은 말이야. 오늘부터는 수심에 찬 원들만 소용돌이치는군······ 전진이 곧 후퇴인 셈이지. 그래, 프로그레스 아드 오리기넴과 레그레수스 아드 푸투룸은 같은 말이야. 너의 뇌는 압축기에 짓이겨진 한 꾸러미의 사고에 불과하지. - P119

하지만 나는 한 발짝도 떼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렇다, 난 아무데도 가지 않을 것이다. 계속 술을 마신다. 참담했던 그 보라색 양말 사건이 있고 이십 년이 지난 뒤 스테틴의 변두리 동네와 벼룩시장이 열린 골목길을 성큼성큼 걷고 있는 내 모습이 다시 보인다. 맨 끝자리에 앉은 초라한 행상인의 좌판에 오른쪽 샌들과 보라색 양말 한 짝이 놓여 있다. 틀림없는 내 샌들, 내 양말이었다. 발 치수도 41, 내 치수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불가사의한 출현을 목격한 사람처럼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 고물상은 세상 어딘가에 발 치수가 41인 외다리 남자가 존재할 거라 믿었을 뿐 아니라, 이 남자가 멋을 내려고 스테틴까지 와서 오른발에 신을 샌들과 보라색 양말 한 짝을 살 거라 믿었던 것이다! 그 놀라운 장사꾼 옆에서 한 노파가 월계수 잎 두 장을 손에 들고 사라고 졸라댔다. 나는 망연자실했다.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내 샌들과 보라색 양말이 세상의 수많은 고장을 보고 난 뒤 어느 날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질책하듯 내 길을 막아서며.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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