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여기저기 기운 기다란 천 모양으로 내려앉았다. 구불구불한 도로에 차를 돌릴 만한 공간이 없어서 펄롱은 우회전을 해서 샛길로 들어갔다. 그 길로 가다가 또 우회전 했더니 길이 더 좁아졌다. 또 한 번 우회전을 해서 전에 지나간 적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지 않은 건초 창고를 지나다가 짧은 목끈을 질질 끌며 돌아다니는 숫염소 한 마리를 보았고 곧이어 조끼를 입은 노인이 길가에 죽은 엉겅퀴를 낫으로 쳐내는 모습이 보였다.
펄롱은 차를 세우고 노인에게 인사를 했다.
"이 길로 가면 어디가 나오는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이 길?" 노인은 낫으로 땅을 짚고 손잡이에 기댄 채 펄롱을 빤히 보았다.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 P53

"오늘 뭣 때문에 화난 거야?"
"아무것도 아냐. 그냥 당신이 모르는 거 같아서. 당신은 딱히 어려움을 모르고 컸잖아."
"무슨 어려움 말야?"
"그게, 세상에는 사고를 치는 여자들이 있어. 당신도 그건 잘 알겠지."
강한 타격은 아니었으나, 그때까지 아일린과 같이 살면서 그런 말을 들어보기는 처음이었다. 뭔가 작지만 단단한 것이 목구멍에 맺혔고 애를 써보았지만 그걸 말로 꺼낼 수도 삼킬 수도 없었다. 끝내 펄롱은 두 사람 사이에 생긴 것을 그냥 넘기지도 말로 풀어내지도 못했다. - P56

다음 날 아침 펄롱이 일어나서 커튼을 걷었을 때 하늘이 이상하게 가까워 보였고 흐릿한 별 몇 개가 떠 있었다. 거리에서 개 한 마리가 깡통을 핥으며 코로 밀었고 얼어붙은 보도 위로 구르는 깡통이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벌써 까마귀들이 나와 줄줄이 앉아서 쉰 목소리로 짧게 악악거리거나 길고 유려하게 까아아아 울며 세상이 못마땅하다는 티를 냈다. 한 마리는 피자 상자를 뜯고 있었다. 종이 상자를 한 발로 누르고 미심쩍은 듯 쪼아대더니 피자 테두리를 부리로 물고 날개를 퍼덕여 후다닥 날아갔다. 어떤 녀석들은 말쑥하게 보였다. 날개를 접고 성큼성큼 돌아다니면서 땅 바닥과 주위를 살피는 모습이 뒷짐을 지고 시내를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젊은 보좌신부와 닮아 보였다. - P61

펄롱은 소박한 방의 평화로운 분위기에 젖은 채 잠시 서서 머릿속 한편이 여기 이 집에서 저 사람을 아내로 삼아 사는 삶은 어떨까 하는 상상으로 흘러가도록 두었다. 최근에 펄롱은 가끔 다른 삶, 다른 곳을 상상했고 혹시 그런 기질이 자기 핏속에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자기 아버지도, 갑자기 불쑥 영국행 배를 타고 떠나버린 건 아니었을까? 삶에서 그토록 많은 부분이 운에 따라 결정된다는 게 그럴 만하면서도 동시에 심히 부당하게 느껴졌다. - P64

이 위는 이렇게 고요한데 왜 평화로운 느낌이 들지 않는 걸까? 아직 동이 트기 전이었고 펄롱은 검게 반짝이는 강을 내려다보았다. 강 표면에 불 켜진 마을이 똑같은 모습으로 반사되었다. 거리를 두고 멀리서 보면 훨씬 좋아 보이는 게 참 많았다. 펄롱은 마을의 모습과 물에 비친 그림자 중 에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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