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 P9

사실 내 독서는 딱히 읽는 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 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그런 식으로 나는 단 한 달 만에 2톤의 책을 압축한다. - P9

이제는 내 뇌가 압축기가 만들어놓은 수많은 사고로 형성되어 있다는 걸 깨닫는다. 머리털이 모두 빠져버린 내 머리는 알리바바의 동굴이다. 모든 사고가 오로지 인간의 기억 속에만 각인되어 있던 시절은 지금보다 훨씬 근사했을 것이다. 그 시절엔 책을 압축하는 대신 인간의 머리를 짜내야 했겠지. 하지만 그래봐야 부질없는 건, 진정한 생각들은 바깥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국수 그릇처럼 여기, 우리 곁에 놓여 있다. 세상의 종교재판관들이 책을 태우는 것도 헛일이다. 가치 있는 무언가가 담긴 책이라면 분서의 화염 속에서도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진정한 책이라면 어김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다른 무언가를 가리킬 것이다. - P10

진정한 책에 내 눈길이 멎어 거기 인쇄된 단 어들을 지우고 나면, 남는 것은 대기 속에서 파닥이다 대기 중에 내려앉는 비물질적인 사고들뿐이다. 대기에서 자양분을 얻고 다시 대기로 돌아가는 사고들. 면병 속에 있으면서도 없는 성혈처럼 만사는 결국 공기에 불과하니까. - P11

고상한 정신의 소유자가 반드시 신사이거나 살인자일 필요는 없다는 헤겔의 생각에 나 역시 동의하기 때문이다. 나라면, 내가 글을 쓸 줄 안다면, 사람들의 지극한 불행과 지극한 행복에 대한 책을 쓰겠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책을 통해, 책에서 배워 안다. 사고하는 인간 역시 인간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것도.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고라는 행위 자체가 상식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 P12

곤경에 처한 소장이 이따금 갈퀴로 폐지 사이에 길을 내고는 화가 나 벌게진 얼굴을 뚜껑 문 안으로 들이밀며 나를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탸. 거기 있나? 맙소사, 책에 한눈팔지 말고 좀 움직여봐! 마당이 종이로 뒤덮였는데 자넨 밑에서 바보 같은 짓거리에나 빠져 있긴가!" 그러면 종이 더미 발치에 있던 나는 손에 책을 든 채 수풀 속에 숨은 아담처럼 몸을 잔뜩 움츠리고 겁에 질린 시선으로 낯선 주변 세계를 둘러본다. 한 번 책에 빠지면 완전히 다른 세계에, 책 속에 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일이지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 순간 나는 내 꿈속의 더 아름다운 세계로 떠나 진실 한복판에 가닿게 된다. 날이면 날마다. 하루에도 열 번씩 나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소외된 이방인이 되어 묵묵히 집으로 돌아온다. - P16

몸에서 맥주와 오물 냄새가 나도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건, 가방에 책들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녁이면 내가 아직 모르는 나 자신에 대해 일깨워줄 책들. - P16

이제 나는 집으로 돌아와 어슴푸레한 여명 속에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의자에 앉아 있다. 무릎을 스치는 축축한 내 입술이 느껴진다. 그런 식으로만 나는 잠들 수 있다. 그렇게 자정까지 몸을 웅크린 채 있기도 한다. 잠에서 깨어 머리를 들면 바지의 무릎 부위가 침에 축축이 젖어 있다. 단단히 사리고 똬리를 튼 내 몸은 겨울철의 새끼 고양이나 흔들의자 나무를 같다. 한 번도 진짜로 버림받아본 기억이 없는지라 그렇게 나 자신을 방기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 P18

기차가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내 안에는 이미 불행을 냉정하게 응시하고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자리했다. 그렇게 나는 파괴 행위에 깃든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른열차의 차량들에도 화물을 실었고, 수많은 열차가 킬로그램당 1코루나에 팔릴 짐을 싣고 서방으로 떠나갔다! 나는 가로등에 기대서서 마지막 차량의 후미등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 광경을 응시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자신의 기마상을 산산조각내려고 총을 겨눈 프랑스 군인들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이 순간의 나처럼 다빈치 역시 거기 남아 그 끔찍한 광경을 주의깊고 만족스러운 시선으로 지켜보았겠지. 하늘은 전혀 인간적이지 않고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 P23

장의사 인부가 뼈를 추려 곱게 갈아서 어머니의 마지막 유해를 철제 상자에 담았다.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았다. 기차가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에서 킬로그램당 1코루나에 팔릴 굉장한 화물을 싣고 떠났을 때처럼. 그 순간 머릿속에는 칼 샌드버그의 시구만 맴돌았다. 사람에게서 남는 건 성냥 한 갑을 만들 만큼의 인과, 사형수 한 명을 목매달 못 정도 되는 철이 전부라는.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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