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 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Barrow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 P11

가끔 펄롱은 딸들이 사소하지만 필요한 일을 하는 걸 보며–예배당에서 무릎 절을 하거나 상점에서 거스름을 받으며 고맙다고 말하는 걸 보면서–이 애들이 자기 자식이라는 사실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한 기쁨을 느끼곤 했다. - P20

"그 사람들 중에는 스스로 제 무덤 판 사람도 있는 거 알지?"
"애 잘못은 아니잖아."
"화요일 날 시노트가 술에 취해서 공중전화 부스에 있는 걸 봤어."
"불쌍한 사람, 뭐가 그렇게 괴로울까." 펄롱이 말했다.
"술 때문에 괴로운 거야. 눈곱만큼이라도 자기 애들 생각을 한다면 그러고 돌아다니진 않겠지. 딱 끊고 정신 차렸겠지."
"그러고 싶어도 못 그럴 수도 있어."
"그렇겠지." 아일린이 손을 뻗고 한숨을 쉬며 불을 껐다.
"어디든 운 나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니까." - P21

가끔 펄롱은 이렇게 아일린 곁에 누워 이런 작은 일들을 생각했다. 어떤 때는, 종일 무거운 짐을 날랐거나 타이어가 펑크 나서 길에서 시간을 버렸거나 비를 만나 흠뻑 젖었거나 한 날에는, 집에 와서 밥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한밤중에 깨어 아일린이 곁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걸 느끼며 누워 있다 보면 생각이 빙빙 맴돌며 마음을 어지럽혀 결국 아래층으로 내려가 주전자를 불에 올리고 차를 끓여야 했다. 펄롱은 찻잔을 손에 들고 창가에 서서 거리를 내려다보고 멀리 보이는 강을 바라보고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일을 구경했다. 떠돌이 개가 쓰레기통을 뒤져 음식물을 찾고, 튀김 봉지와 빈 깡통이 비바람에 이리저리 날려 구르고, 느지막이 술집에서 나온 남자들이 비틀비틀 집으로 걸어갔다. 비틀거리며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때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와 웃음소리가 터질 때면 펄롱은 긴장했다. 펄롱은 자기 딸들이 자라 어른이 되어 남자들의 세계로 나가는 상상을 했다. 벌써 길에서 딸들한테 눈길을 주는 남자들이 있었다. 펄롱은 마음 한편이 공연히 긴장될 때가 많았다. 왜인지는 몰랐다. - P21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멀리 가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돌아 다녔고 시내에서, 시 외곽에서 운 없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실업수당을 받으려는 사람들 줄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고 전기 요금을 내지 못해 창고보다도 추운 집에서 지내며 외투를 입고 자는 사람도 있었다. 여자들은 매달 첫째 금요일에 아동수당을 받으려고 장바구니를 들고 우체국에서 줄을 섰다. 시골로 가면 젖을 짜달라고 우는 젖소들이 있었다. 젖소를 돌보던 사람들이 갑자기 다 때려치우고 배를 타고 영국으로 떠나버린 탓이었다. 한번은 세인트멀린스에 사는 남자가 차를 얻어 타고 시내로 요금을 내러 왔는데, 그 사람 말이 지프를 팔아야 했다고, 빚을 생각하면, 은행에서 압류가 들어올 걸 생각하면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어느 이른 아침 펄롱은 사제관 뒤 쪽에서 어린 남자아이가 고양이 밥그릇에 담긴 우유를 마시는 걸 봤다. - P22

길 저편에서 나타난 덩치 크고 뚱뚱한 산타를 보고 로레타는 뒤로 물러섰고 겁먹은 듯 울음을 터뜨렸다.
"무서울 것 없어." 펄롱이 달랬다. "그냥 아빠 같은 사람이야. 의상만 입은 거지."
다른 아이들은 작은 동굴 같은 곳에 자리 잡은 산타에게 선물을 받으려고 줄을 섰지만 로레타는 바싹 긴장한 채 펄롱의 손에 매달렸다.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아가." 펄롱이 말했다. "아빠랑 같이 있자."
말은 그렇게 했지만 펄롱은 다른 아이들이 그토록 반기는 것을 겁내는 자기 아이를 보니 마음이 아팠고 이 아이가 용감하게 세상에 맞서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P27

"너희 지금 산타 할아버지한테 편지 쓰지 그러니?"
늘 이렇지,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버터와 설탕을 섞어 크림을 만들면서도 펄롱의 생각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일요일, 아내와 딸들과 함께 있는 지금 여기가 아니라 내일, 그리고 누구한테 받을 돈이 얼마인지, 주문받은 물건을 언제 어떻게 배달할지, 누구한테 무슨 일을 맡길지, 받을 돈을 어디에서 어떻게 받을지에 닿아 있었다. 내일이 저물 때도 생각이 비슷하게 흘러가면서 또다시 다음 날 일에 골몰하리란 걸 펄롱은 알았다. - P29

내 아버지는 어디에 있을까? 가끔 펄롱은 자기도 모르게 나이 많은 남자를 쳐다보면서 닮은 구석이 있는지 찾거나 사람들이 하는 말에서 힌트를 얻으려고 했다. 동네 사람 중에 분명 펄롱의 아비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었다. 아버지가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 또 사람들은 말을 하다 보면 반드시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뭘 아는지를 드러내기 마련이니, 누군가는 펄롱 앞에서 무언가 한마디라도 흘릴 것 같았다. - P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