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에는 집단 매장이라는 개념을 생각하지 않기가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생각보다 집단 매장이 흔하다는 사실도 밝혀지고 있다. 집단 매장이 편의주의적 발상인 것은 분명하다. […] 하지만 다량의 시체 안치 또는 처리의 역사는 어째선지 땅을 선호해 왔다. 아마 거기엔 단순한 편의 이상의 무언가가 있으리라. 어쩌면 그 단어 자체가 매혹적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묻기‘는 부정하기, 무언가가 사라지도록 애쓰기이니까. 한 개인은 존엄한 장례와 멋진 묘석으로 기려질 수 있겠지만, 스물이나 백 같은 큰 숫자가 개입된다면, 또는 1996년 6월 29일 카다피 독재 정권의 명령에 따라 불과 몇 분 사이에 천이백칠십 명의 정치범이 처형당한 뒤, 쓰러진 바로 그 자리, 교도소 땅에 묻힌 트리폴리의 아부 살림 교도소 같은 경우라면, 상황은 복잡해진다. 그렇다면 집단 매장 행위는 적어도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목적, 즉 증거를 보이지 않게 만들려는 목적뿐만 아니라 증거를 한곳에 모음으로써 더 유효하게 만들고 그 성취의 규모를 증대시키려는 목적의 달성에도 관련된다. 그리고 아마 그 순간 생존자이기도 한 사형 집행인의 마음속에서 취약하나마 여전히 타오르고 있을 도덕성 같은 것은 서로 얽힌 채 쌓인 그 무질서한 시체들이 적어도 홀로 깊은 곳에 들어가지는 않는다는 사실에서 기묘한 위안을 받으리라. - P124

유럽에서 일부는 정말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에게 갑작스럽고 설명할 수 없는 이 역병의 지배는 신이 선하지도 자비롭지도 않다는 최종적인 증거였다. 그들은 "신속하게 얻을 수 있고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쾌락을 생에서 얻겠다"고 맹세하면서 투키디데스를 안내인으로 내세웠다. 그들은 술에 취해 필요한 것을 훔치고 절제 없이 마구잡이로 사통했다. 런던의 어느 보고자는 "한 집에서 죽음의 격통 아래 울부짖는 소리와 바로 옆에서 술을 퍼마시고 창녀와 관계하며 신에 대한 불경을 지껄이는 소리를 동시에 들을 수 있다"고 썼다. 여기서부터 유럽의 기독교 세계와 문화는 바뀌었다. 마치 유럽이 잠에서 깨어나 자신이 내내 죽음의 왕국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은 듯했다. 유럽은 그 깨달음이 예술로 표현되기를 원했다. 유럽은 망각을 두려워했다. 유럽은 그 공포를 믿었고, 그 공포를 소통하며 후세에 전하고자 했다. 역병은 상상력에 외상을 입혔다. 모든 것이 죄로 물들었다. - P125

무슬림 세계에서도 비슷한 쾌락주의와 영적 유책성 반응이 일어났으나 주변부에만 머물렀다. 주된 반응은 결정론적인 것이었다. 무슬림들은 그 유행병을 폭풍이나 홍수와 다를 것 없는 재난이자 저항하고 견뎌내야 할 것으로 보았다. 그 병은 분노한 신이 아니라 세상의 질서를 관장하는 운명의 명을 받고 왔다.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이븐 바투타가 쓴 다마스쿠스 기록에서 보듯이,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연대 속에서 안정과 위안을 찾곤 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인간이 자신의 미래를 어느 정도까지 형성할 수 있는지에 관한 의심이 자라났다. 죽음의 참상에 직면하고서 아랍과 유럽 사회 모두가 운명론에 더 취약해졌다. 상상력과 가치 구조 자체가 변했다. - P126

알베르 카뮈가 그 역병에 관심을 가진 이유가 그래서였다. 그는 역병의 극단성을 신뢰했다. 그는 인간 본성을 조명하는 역병의 힘을, 인간 본성이라는 것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가면 쓴 인물이라도 되는 듯이, 그 인간 본성을 폭로하는 역병의 힘을 믿었다. 카뮈가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가장 끌렸던 것이 유토피아였다. 세계의 저주는 이상주의자들이라고, 그는 믿었다. 이상주의자는 역병만큼이나 설득하기가 어렵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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