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에게는 시간이 많다. 사람이 홀로 있으면 시간은 양 쪽으로 창이 난 방이 되어, 한쪽으로는 과거를, 다른 쪽으로는 미래를 들여다보게 된다. 역사가를 유혹하는 것은 불확실한 과거 포착하기, 과거를 사건과 시기와 시대로 나누어 담기, 시종여일하게 이야기를 정리하고 말하기, 그 동기와 결과 목록을 찾아내고 만들기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각자는 당연히 제 삶의 역사가이다. 반면에 미래는 우리의 예언과 환상에 끝없는 기회를 제공한다. 시간이 미지 속으로 펼쳐지는 카펫이라도 되는 듯이, 앞으로 올 날들을 계획함으로써 우리는 낙관주의를 탐닉할 수 있다. 과거와 미래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 P52
나는 차례차례 거리를 지나 아무 걱정 없이 길을 잃으며 도시의 주름 속으로 걸어 돌아왔다. 이 도시에서 태어나는 기분은 어떨까? 궁금했다. 그리고 여기서 죽는 기분은 어떨까? 어느 도시를 가든 이 쌍둥이 질문이 따라왔다. 나는 이 질문들을 이용하는 법을 배웠다. 이 질문들은 나의 사고 논리와 내가 어떤 장소와 관계 맺는 방식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절대 잊지 않고, 또 내가 얼마나 자주 그걸 잊고 싶어 하는지도 잊지 않는다. - P53
그 옆에는 ‘인내‘, 그러고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나른하게 기대앉은 ‘평화‘가 있다. 평화는 그 그림을 설명하면서 그림에 중심을, 시선이 멈출 곳을 제공한다. 그 덕분에 이 방, 살라 데이 노베는 살라 델라 파체(Sala della Pace), 즉 ‘평화의 방‘이라고도 알려졌다. 이제 드러났듯이, 평화가 바로 구성 원리다. 프레스코화에 드러난 다른 활동들은 물론, 그 함의로써 제시되는 통치 체제에서도 말이다. 한편으로는 로렌체티가 그녀를 배치해 놓은 위치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의 표정 때문이다. 기다림, 관찰, 듣기, 그녀의 손은 우리 쪽을 향해 열린 귀를 받치고 있다. 검은 꾸러미들이 팔을 걸친 쿠션 밑에도 숨어 있고, 발밑에도 있다. 그것들이 평화가 있는 곳에는 전투가 필요 없다는 걸 나타내는 갑옷 조각이라는 걸 깨닫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모순적이다. 보호와 은폐에 쓰이는 물건인 갑옷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딴청을 부리는 평화에게는 슬랩스틱 익살극 같은 뭔가가 있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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