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솔은 한참 입술을 움찔거리며 머뭇거리다 말았다. 도담은 답답하고 뭔지 궁금했지만 불편했기에 캐묻지는 않았다. 알 것 같았다. 해솔이 그날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자신을 보는 해솔의 투명한 눈동자를 바라보면 그 안에 슬픔이 있었다. 미안함이 있었다. 어쩌면 원망의 눈빛도······ - P130

평소 예지는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랑 예찬론자였다. 도담은 예지가 그렇게 사랑을 최고로 생각할 수 있는 건 아직 사랑에 충분히 당하지 않아서라고 믿었다. 도담은 불행의 크기를 다이아몬드라도 되는 양 자신의 것과 남의 것을 비교했다. 도담에게는 여전히 자신이 가진 불행이 가장 크고 가장 값졌다. - P135

"사랑을 믿는다는 게 대체 뭔데. 변하지 않는다는 거야?"
"내 말은, 음······ 사랑이 무엇보다 큰 힘을 가졌다는 거야." 그 큰 힘이 아빠를 정신도 못 차리게 바보로 만들어 급류에 휩쓸리게 했나. 오직 사랑만이 최고라고 조금의 의심도 없이 말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사랑은 종교나 다름없었다. 언제나 사랑만이 답이라는 허술한 교리를 가진. 사람을 믿지 못하고 사랑을 믿지 않는 나 같은 사람은 사랑스럽지 않겠지. 도담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아끼고 위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고 그 모습이 아름답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그렇지만 도담에게는 하늘을 나는 빗자루만큼 현실과 먼 판타지처럼 느껴졌다. - P136

"배신감보다도 관계를 잃었다는 게 더 괴롭더라고요. 그 이후로 다시는 그런 아픔을 겪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런 과거 때문에 연애는 안 하고 애매모호한 만남만 한다고요? 에이, 핑계 좋네요." 어쩐지 도담의 입에서는 냉소적인 말이 튀어나왔다. 승주가 사랑에 대한 책임감이 없는 남자이면서 그런 자신을 잘 포장한 것 같았다.
"그런가요?"
승주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반문했다. 도담은 아차, 싶었다. 무례했다. 어쩌면 승주는 자신의 가장 어려운 문제를 이야기한 걸 수도 있었다. 자신이 겪은 일과 비교하며 남의 상처를 가볍게 치부하는 냉소적인 태도는 20대 내내 도담이 극복하려 했던 것이었다. 상처를 자랑처럼 내세우는 사람은 얼마나 가난한가. 나는 한 치도 변하지 않았구나. 도담은 익숙한 자기혐오에 휩싸였다. 왜 그랬을까. 상처를 받고 위험을 피하려는 승주의 모습이 나와 비슷해서 싫었을까. 아니면 나도 모르게 승주에게 다른 뭔가를 기대했던 걸까. - P195

선화가 걱정할까 봐 말하지는 않았지만 민재가 느끼기에도 해솔은 문제가 있었다. 이번 일도 막말로 운이 좋았던 거지, 거의 자살 행위였다고 동료들 사이에서도 말들이 많았다. 끔찍한 현장을 계속 겪으면서 사람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처음엔 우울증이나 PTSD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것과 다른 뭔가가, 직업적 사명감과도 다른 종류의 무언가가 해솔에게 있었다. 동료들 모두 위험을 무릅쓰고 이 일을 하지만 해솔은 정말 목숨을 던질 기세였다. 다른 사람을 구조하는 데는 이상할 정도로 필사적이면서 자신을 구하는 데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동료로서 존경스럽기도 했지만 걱정이 더 컸다. 누군가는 해솔을 말려야 했다. - P206

해솔과 얽힌 사연 때문에 연상되는 슬픔. 같은 상처를 가진 동질감. 연민이다. 우리가 보통 지독한 인연은 아니지. 해솔과의 재회에 운명 같은 단어가 연상되는 건 우연에도 인과를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의 습성 때문이다. 추억 때문이다. 좋았던 날들에 대한 반가움과 지나가 버린 한때에 대한 슬픔일 수도. 이성에 대한 열정? 호르몬 작용은 진작 끝났다. 소식이 궁금하고 그리워하는 마음. 걱정하고 애타게 보고 싶은 마음. 꽉 끌어안고 안기고 싶은 마음. 그런 때도 분명히 있었다. 마음의 불씨는 전부 사그라져 버렸다. 완전한 전소. 남은 거라고는 그을린 시커먼 자국과 탄내 가득한 폐허. - P226

도담은 감정에 솔직하다는 핑계로 대책 없이 저지르는 사람들을 경계했다. 자신의 수영 실력도 모른 채, 구명조끼도 없이 수심도 파고도 모르는 물에 무모하게 뛰어드는 것 같았다. - P227

"도담 씨, 그런 얘기 들어 본 적 없어? 7년인가 지나면 사람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세포가 교체된대. 10년이면 도담 씨 온몸의 세포가 교체된 거야. 그러면 이제 도담 씨도 그 사람도 그때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지 않을까?" - P227

"너 때문이 아니야. 나는 출동을 나가서 매일 사고 현장을 목격해. 부주의 때문에 일어나는 사고도 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일들도 많이 일어나. 자다가 말벌에 쏘여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처참한 교통사고 현장에서 음주운전을 한 운전자는 살아남고, 아무 잘못 없는 가족이 사망하는 부조리한 일들이 벌어져. 그런 현장을 수두룩하게 겪다 보면 세상에는 정말 신도 없고 인과응보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이 느껴져.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무도 바라지 않은 일이 었다는 걸, 뜻밖의 사고였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야."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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