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투른 영어는 한때 부끄러움의 원천이었지만, 이제 나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서투른 영어는 나의 유산이다. 나는 완벽한 영어에서 일부러 멀어질 것을 외치는 작가들과 영어를 탈취해 도망자의 언어로 비틂으로써 영어를 어지럽히고, 뒤흔들고, 난도질하고, 괴랄하게 만들고, 타자화하는 작가들과 – 문학적 계보를 공유한다. 영어를 타자화하는 것은 듣는 사람이 그 언어에 박힌 제국주의 권력을 알아차리도록 하는 것이며, 영어를 절개하여 그 어두운 역사가 비어져 나오게 하는 것이다.
시인 너새니얼 매키는 에세이 「타자: 명사에서 동사로」에서 타자라는 명사는 사회적 의미를 띠고, 타자화하다라는 동사는 예술적 의미를 띠는 것으로 구분한다.

<예술적 타자화는 문화적 건실성과 다양성 증진의 기반인 혁신, 발명, 변화와 관계 있다. 사회적 타자화는 권력, 배제, 특권과 관계 있다. 즉 한 명사를 중심에 놓고 그것을 기준으로 타자성을 측정, 배분, 주변화하는 것이다. 나는 후자에 예속되는 사람들에 의한 전자의 실천에 초점을 둔다.> - P136

시인으로서 나는 지금까지 시종일관 영어를 권력 투쟁을 위한 무기로 취급해왔고, 나보다 더 힘센 자를 상대로 그 무기를 휘둘렀다. 그래서 영어로 애정 표현을 하는 데에 서투르다. 집에서 나는 소리가 바깥에 들리지 않도록 늘 조심하다 보니 바깥에서 나는 소리를 안으로 들이는 법을 알지 못한다. 나는 고통과 불가분하게 뒤얽힌 사랑으로 양육된 나머지, 그 사랑을 공기 중에 일단 노출해버리면 그것이 산화되어 괜히 내가 영어로 내 가족을 배신하는 꼴이 될까 봐 두렵다. - P140

우리가 시나 소설에서 영감을 얻을 때 느끼는 인간적인 충동은 그것을 남들과 공유하여, 루이스 하이드의 표현처럼 "그에 따라 서로 연결된 관계"의 자취를 남기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경제에서 예술은 상품이어서 유포가 차단되고 개별적으로 보관된다. 영리를 목적으로 예술작품을 유통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수익을 챙기는 것은 백인 저작자들이다. 이 주제와 관련해 아미리 바라카가 귀중한 인용구를 선사한다. "모든 문화는 서로 배운다. 문제는 뭐냐 하면 비틀스는 자기들이 아는 모든 것을 블라인드 윌리에게 배웠다는데 왜 블라인드 윌리는 아직도 미시시피 잭슨시에서 승강기 운전원으로 일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 P142

영화감독 트린 T. 민하는 내 체험 바깥에 있는 문화에 "관해 말하기"(speaking about)보다 그 "근처에서 말하기"(speaking nearby)를 제안한다. 『아트포럼』과의 인터뷰에서 트린은 이렇게 말한다.

<무엇에 관해 말하기보다 근처에서 말하기로 했을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신과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놓인 잠재적 간격을 인정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대표성의 공간을 남겨두는 거죠. 그리하여 당신이 대상자와 아주 가깝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대표하거나, 대신하거나, 그 위에 군림하여 발언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오직 근처에서, 즉 가까운 거리에서 말할 수 있을 뿐이며(그 타자가 물리적으로 현존하든 부재하든), 그러려면 의미 규정을 의도적으로 멈추어 의미가 간단히 봉쇄되지 않게 하고 의미가 형성되는 과정에 여백을 남겨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타자가 그리로 들어와 그 자리를 원하는 방식으로 메울 수 있게 됩니다. 이 접근 방식은 양자 모두에게 자유를 주며, 아마 이런 이유에서 이 방식의 강력한 윤리적 견지를 알아본 영화인들이 이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권위자의 위치를 점하려고 시도하지 않음으로써, 전지전능의 주장과 지식의 위계에 따라 생성되는 무수한 판단 기준으로부터 당신은 사실상 자유로워집니다.> - P142

서투른 영어는 잘 트윗 되지 않는다. 내 시에서 한 구절을 트윗 하면 아마 납으로 만든 풍선처럼 가라앉을 것이다. 서투른 영어는 오프라인으로, 책이나 라이브 공연으로 공유하는 것이 가장 좋다. 서투른 영어는 소리 내서 읽어야만 이해되는 대화형 어휘이지만, 혹시 잘 이해가 안 되더라도 그 질겅거리는 음절들은 어떤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든 상관없이 내게 익숙하게 느껴지고, 바로 그래서 서투른 영어는 백인 이외의 인종 집단들을 한자리에 모아놓는다. 그러나 서투른 영어는 멸종되어가는 예술이다. 인터넷이 우리에게 화면 스크롤 절반 정도면 끝나는 길이로 명료하고 간결한 시를 쓸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억양이 들어간 영어로 누가 말하는 것을 진정으로 알아듣고 싶다면, 속도를 늦추고 온몸으로 들어야 한다. 귀를 훈련하고 온전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인터넷은 그럴 시간을 주지 않는다. - P145

2016년 대통령 선거 이후로, 나는 노는 것도 저항의 한 형태일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트랜스젠더의 삶이 지닌 불안정성도 드러내야 하지만, 그들의 흥청거리는 삶에 담긴 체제 전복성도 알려져야만 한다. 『이상향을 유람하다:퀴어한 미래의 바로 그 순간』에서 호세 에스테반 무뇨스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새롭고 더 나은 유흥을 벌이고, 다른 방식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기를 실행해야 한다. 퀴어스러움은 현재 우리가 겪는 비관과 고역의 낭만을 넘어 전진하도록 추동하는 어떤 열망이다." 예술은 이처럼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상태를 잠시라도 꿈꾸는 일이다. 그렇지만 소셜미디어가 그런 비밀스러운 유토피아를 거의 즉시 뿌리 뽑아 표면에 드러내고 첨단기술 기업의 알고리즘이 예술과 시가 공유되는 영역을 감독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 감춰진 세계를 창조할 수 있을까? - P149

내가 자랄 때 흑인 아이, 갈색 아이들은 별생각 없이 인종을 차별했다. 한국 아이들 역시 별생각 없이 인종을 차별했다. 비백인 아이들이 내게 찢어진 눈 어쩌고 해도 별로 상처받지 않았던 것은 나도 맞받아치며 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중에 흠 없는 피해자는 찾기 어렵다. 그렇지만 우리가 다 똑같은 처지였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저 ‘너의 서투른 영어 곁에서 나의 서투른 영어에 관해‘ 쓰기만 할 수는 없다. 근처에서 말하고자 노력할 때는 우리 사이의 간격도 직시해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일단 나 자신을 연루시키면, 그렇게 연루시키는 일을 도저히 적정한 선에서 멈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이의 간격은 계급이다. 한인 타운에서 한국인은 앞에 나와 손님을 상대하고 멕시코인은 뒤에서 보조하는 일을 한다. 한번은 내가 친구를 사귀었는데 엄마가 그 아이와 놀면 안 된다고 해서 왜냐고 묻자, 엄마는 그 아이가 멕시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경악할 일은 내가 친구에게 그 얘기를 했다는 것이다. "네가 멕시코 사람이라서 너랑 놀면 안 된대." 그러자 걔가 말했다. "나는 푸에르토리코 사람이야."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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