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스턴에 따르면 인종적 순수란 단순히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아는 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상태"로서 "음, 나는 인종이 문제라고 보지 않는데"와 같은 언급 속에 엉켜 있으며, 여기서 ‘나‘는 보는 일을 가로막고 있다. 순수는 하나의 특권이자 인지 장애, 즉 잘 보호된 무지의 상태이며, 일단 이것이 성인기까지 오래 이어지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로 굳어진다. 순수는 성적인 것만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굳이 특정해서 "표시되지 않으며"(unmarked) "자유롭게 본연의 너와 나가 될 수 있다"라는 신념에 기대 사회경제적 위계 속에 놓인 자신의 지위를 외면하는 것이다. 이런 순수가 초래한 아이러니한 결과는 백인이 "자신들이 구축한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학자 찰스 밀스는 말한다. 따라서 아이들이 인종적 서열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집요하게 상기당하고 그 위치 때문에 심지어 범죄자가 되면 순수할 자격을 박탈당한다. 리처드 프라이어가 농담한 대로다. "나는 여덟 살 때까지 아이였어요. 그 후 깜둥이가 되었지요." - P108
수치심을 일으킨 공격자가 내 삶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도, 나는 계속 존재한다고 상상하고 내 그림자를 그자로 착각하여 몸을 움츠린다. 수치심은 파블로프의 조건 반사 같아서, 집 밖으로 잠깐 나왔다는 이유만으로도 수용체가 자극받아 나는 반응한다. 체면을 잃는 것과는 다르다. 수치심은 내 얼굴을 깔고 앉아버린다. - P109
사람들은 흔히 수치심을 아시아적인 속성과 유교적인 명예 체계, 그리고 그와 관련된 불가해한 수치심의 의례와 연결 짓지만, 내가 말하는 수치심은 그 수치심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수치심은 문화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상호 관계에 영향을 주는 권력의 역학을 뼈아프게 인식하는 것이며, 그 서열에서 내가 피해자 – 또는 가해자 – 로서 점하는 위치를 깨닫고 몸이 오그라들도록 느끼는 치욕이다. - P109
수치심은 나 자신을 1인칭과 3인칭으로 분리하는 능력을 부여한다. 사르트르가 쓴 대로 "타자가 나를 보는 대로" 나를 인식하는 능력이다. 다 자란 지금에야 나는 어렸던 내가 의도치 않게 저지른 불복종에서 유머를 발견한다. - P111
인종주의의 한 가지 특징은 아동을 성인처럼 취급하고 성인을 아동처럼 취급한다는 점이다. 부모가 아이처럼 굴욕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깊은 수치심을 유발한다. 우리 부모가 백인 성인에게 무시당하거나 놀림당하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그런 일이 너무 관행처럼 발생해서, 엄마가 어떤 식으로든 백인 성인과 상대할 때면 나는 늘 바짝 경계하면서 중간에 끼어들거나 엄마를 옆으로 잡아끌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국에서 아시아인으로 자란다는 것은 권위 있는 사람이어야 할 부모의 굴욕을 목격한다는 것, 그리고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는 것을 뜻한다. 부모가 아이를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 P111
백인의 공포 정치는 눈에 보이지 않고 누적적이며, 자기혐오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사람의 자존감을 갉아먹는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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