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또 생각했다. 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사랑에 관한 한 유행가가 옳다. 인생의 진리는 모르지만 사랑의 진리는 유행가가 맞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시 이 노래는 나의 노래가 아니다······. - P253
아버지는 시체처럼 잠들어있었다. 호흡이 아니라면 살아있다 말할 만한 어떤 활기도 찾을 수 없었다. 어머니 말이 맞았다. 무참하게 무너진 이 노인은 내 아버지가 아니었다. 몇 달에 한 번, 혹은 몇 년에 한 번 집에 돌아오던 아버지는 저런 모습이 아니었다. 슬픈 일몰의 시간에 어둠을 등에 지고 들어오던 아버지의 쓸쓸한 귀가는, 그 풍경 속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매혹이 있었다. 저녁 바람에 날리던 검은 머리칼, 깊숙한 곳에서 형형하게 빛나고 있는 검은 눈동자, 구겨진 바지 주름 사이에 숨어있다 아버지가 움직일 때마다 아슴아슴 풍겨져 나오던 저 먼 곳의 냄새······. - P261
"아까 내가 짜증낸 것 때문에 그러는 거지요? 미안해요. 그렇다고 이렇게 막말하는 것 아니에요. 이제 보니 진진씨 나쁜 사람이네. 그러지 말고 아버지 병환에 차도가 있을 때 만나서 이야기해요. 순간적인 감정에 휘말리지 말고. 알았지요? 전화 끊읍시다!" 그리고 정말 전화가 끊어졌다. 간단없이 들려오는 통화중 신호음이 다음 말을 잇기 위해 아직도 멍하니 입 벌리고 있는 나를 비웃었다. 자기에게 나쁜 소식은 이런 식으로 막아내면 되는구나. 어이없게도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채우는 생각은 그런 것이었다. 나는 정녕 모르고 있었던 삶의 기교였다. - P268
행방불명으로 먼 세상을 떠돌던 한 인간이 속세로 귀향하기에 이만한 날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이런 말을 알고 있다. 인생은 짧다고, 그러나 삶 속의 온갖 괴로움이 인생을 길게 만든다고. 아버지는 참으로 긴긴 인생을 살았다. 그것이 진정 아버지가 원했던 삶이었을까. - P268
나는 울었다. 추억 속의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절정에 다 다랐을 때 현실 속의 내 아버지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내 추억을 희롱했다. 이럴 수는 없었다. 여태 기다렸는데, 이건 부당한 일이었다. - P270
너무 특별한 사랑은 위험한 법이었다. 너무 특별한 사랑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만 다른 길로 달아나버린 내 아버지처럼. 김장우에게도 알지 못하는 생의 다른 길이 운명적으로 예비되어 있을지 몰랐다. 지금은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알아도 어떻게 할 수 없겠지만, 사랑조차도 넘쳐버리면 차라리 모자란 것보다 못한 일인 것을. - P277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냐고 묻는다면 참 할 말이 없구나. 그것이 나의 불행인가봐. 나는 정말 힘들었는데, 그 힘들었던 내 인생에 대해 할 말이 없다는 것 말야. 어려서도 평탄했고, 자라서도 평탄했으며,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한 이후에는 더욱 평탄해서 도무지 결핍이라곤 경험하지 못하게 철저히 가로막힌 이 지리멸렬한 삶. - P283
나도 그렇게 사는 것처럼 살고 싶었어. 무덤 속처럼 평온하게 말고. - P284
그것은 결코 과장법이 아니었다. 지금은 너무나 달라서 선명하지 않지만, 생각해보면 어머니와 이모는 한 몸이었다. 한 몸의 두 사람이 이렇게도 살고 저렇게도 살았던 것이었다. 한 쪽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 나는 어머니의 슬픔을 이해했다. - P287
나도 세월을 따라 살아갔다. 살아봐야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직 나는 그 모순을 이해할 수 없지만 받아들일 수는 있다. 삶과 죽음은 결국 한통속이다. 속지 말아야 한다. - P291
살아있는 사람들의 사소한 이야기는 계속된다. 죽기 전에는 아무도 인생의 보잘것없는 삽화들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우리는 크고 작은 액자 안에 우리의 지나간 시간들을 걸어놓으며 앞으로 앞으로 걸어간다. - P291
어머니는 여전히 행복했다. 이젠 완전히 누운 채로 대소변을 받아내게 하고 쉴 새 없이 헛소리를 해대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지루하지 않게 했다. 면회를 갈 때마다 도무지 철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아들도 어머니의 삶을 지리멸렬한 것으로 떨어뜨리지 않게 도왔다. 부쩍 말수가 줄고 홀로 처박혀 있기를 좋아하는 나, 안진진의 우울도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준다. […] 어머니는 더욱 바빠졌고 나날이 생기를 더해갔다. 아, 어머니의 불행하고도 행복한 삶······. - P291
슬픈 일몰을 이야기하고 아름다운 비밀 반쪽을 나에게 나누어 주던 아버지는 사라졌다. 나는 그것을 확인했다. 아버지 손과 내 손을 맞춰보았지만 맞지 않았던 것이었다. 병과 늙음이 아버지의 손을 축소시켜 놓았다. 아버지의 뼈만 남은 야윈 손가락을 힘들여 펴서 손바닥을 포개봤더니 두께는 고사하고 길이도 반 마디나 내가 컸다. 그래서 아버지는 지금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우리는 영영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헤어질 것이다. 왜 사랑하는 우리를 멀리하고 떠돌아야만 했는지 묻지도 못한 채 나는 아버지와 헤어질 것이었다. 어쩌면 바로 그것이 아버지가 내게 물려주고 싶었던 중요한 인생의 비밀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 P294
옛날, 창과 방패를 만들어 파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이 창은 모든 방패를 뚫는다. 그리고 그는 또 말했다. 이 방패는 모든 창을 막아낸다. 그러자 사람들이 물었다.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는가. 창과 방패를 파는 사람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 P294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것이다. […]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보였던 이모의 삶이 스스로에겐 한없는 불행이었다면,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에게 불행하게 비쳤던 어머니의 삶이 이모에게는 행복이었다면, 남은 것은 어떤 종류의 불행과 행복을 택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문제뿐이었다. - P295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 P296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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