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보스니아 작가 이제트 사라일리치(Izet Sarajlie)은 「2176년에 보내는 편지」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뭐라고? / 아직도 멘델스 존의 노래를 들어? / 아직도 데이지를 고르니? / 아직도 어린이날을 축하해? / 도로명을 아직도 시인의 이름을 따서 지어? / 2세기 전, 1970년대엔 아이들의 놀이, 별 헤기, 로스토브 씨 집에서 춤추기가 사라지듯이 시의 시대가 저물 것이라고 했는데. / 나는 바보같이 그걸 믿을 뻔했어!" - P404
책등이 지붕처럼 펼쳐지고, 책갈피가 없으면 쪽 모서리를 접어두고, 언어로 만든 석순처럼 세로로 쌓아두는 우리의 책은 약 2000년의 역사를 지녔다. 책은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는 익명의 발명품이다. - P404
문자가 발명된 이후로 우리의 선조들은 어떤 표면(돌, 홈, 나무껍질, 갈대, 가죽, 나무, 상아, 천, 금속 등)이 글자의 자취를 가장 잘 보존할 수 있는지 궁금해했다. 그들은 완벽하고 휴대 가능하며 내구성 있고 편안한 책을 만들어 망각의 힘에 맞서고자 했다. 중동과 유럽에서 이 초기 단계의 주인공은 파피루스나 양피지 두루마리, 견고한 서판이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종이가 발명되기 전까지 그들은 그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했다. - P404
우리는 코덱스를 발명한 누군지 모를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들 덕분에 텍스트의 기대 수명이 늘어났다. 새로운 방식의 제본은 두루마리보다 내구성이 강하고 훼손도 덜했다. 또 평평했기에 선반에 편리하게 보관할 수 있었다. 크기도 작고 운송도 편리했다. 게다가 각 시트의 양면을 사용할 수 있었다. 코덱스의 용량은 두루마리의 여섯 배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재료의 절약으로 가격이 조금이나마 낮춰졌으며 유연성 덕분에 오늘날의 작은 수첩의 모태가 만들어 질 수 있었으며 크기도 소형화되었다.(키케로는 호두 껍데기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본 적이 있다고 한다.) - P405
한밤중에 담요를 뒤집어쓰고 손전등을 켠 채 책을 읽다가 누군가 오는 것 같으면 불을 끄던 어린 시절의 우리는 그 은밀한 독자의 직계 후손이다.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형태의 책이 승리할 수 있었던 건 박해 속에서 은밀한 독서를 선호한 결과다. - P411
우리가 ‘긴‘ 책을 언급할 때,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두루마리를 지시하는 행위이다. 우리는 구어에서 코덱스를 라틴어의 volvo(돌다, 회전하다)에서 유래한 volumn(권, 책, 크기)이라고 부르고 있다. 더 이상 되감을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구어에서 지루한 무언가를, 절대 끝나지 않고 펼쳐지고 또 펼쳐지는 무언가를 rollo(장광설)라고 말한다. 오늘날 영어의 scroll은 마치 두루마리를 볼 때 그랬듯 화면 위의 글을 상하로 움직이는 동작을 일컫는다. 또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회사들은 사용하지 않을 때 말아서 보관할 수 있는 TV 스크린을 개발하고 있다. 형식의 변화사를 보면 하나의 형식은 다른 형식으로 대체되는 게 아니라 공존하고 전문화되었다. 최초의 책은 멸종되기를 거부했다. - P413
마틴 스코세이지는 「휴고」(2011)를 통해 그 같은 상황을 재현했다. 특히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alies) 영화의 셀룰로이드가 신발 뒷굽을 만드는 데 재사용되는 장면은 우울하기 그지없다. 영화를 개척한 사람들의 마음에 깃들어 있던 아름다움이 결국엔 빗이나 힐로 재활용되었다. 1920년대, 익명의 사람들이 예술 작품 위를 밟고 지나갔다. 그들은 예술 작품을 신고 길 위의 물웅덩이를 디뎠다. 예술 작품으로 머리를 빗었다. 그 위에 머리 비듬이 붙었다. 자신이 쓰고 있는 도구들이 실은 조그만 무덤이라는 것, 파괴의 일상적인 추모비라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 P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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