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지론은, 콕 집어 이름 붙이기 어려운 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식이었다. 그러니 겉모습이 유지되고 있는 한 굳이 파고들 필요가 없었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 P52

스물네 살의 오빠는 이미 과묵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이 되어 있었고, 그런 성격을 스스로 혐오스러워했다.
"나는 조숙한 노인이야." 그는 거울을 보며 면도를 하면서 역겨움에 중얼거렸다. 그는 별로 관심도 없는 데다 의구심이 생기기조차 하는 아버지의 사업을 여러 해 동안 보좌해 왔고, 자기가 몸담은 환경에서 마치 침입자가 된 기분으로 가라앉지 않고 떠 있으려고 애를 썼다. 자신과 같은 조건의 사람들과 관심사나 이상을 공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P59

오늘날은 모두가 실제보다 더 괜찮은 사람인 척하고, 실제보다 더 가진 게 많은 사람인 척한다. - P64

모든 인간이 법 앞에서 평등하다거나 신이 보기에 평등하다는 이야기는 사기란다, 카밀로. 나는 네가 그것을 믿지 않기를 바란다. 법도 하느님도 우리 모두를 똑같이 대하지 않는다. 이 나라에서는 그게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면 억양의 미세한 차이, 식탁에서 포크와 나이프를 쥐는 방식, 또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수많은 사회 계층 중 어느 계층에 속하는 사람인지 단 1초 만에 알아챌 수 있다. - P68

둘째 날에는 호세 안토니오와 다른 오빠들도 시위에 가담했다. 정치적인 신념 때문이라기보다는 좌절감을 쏟아내고 싶어서였다. 또 친구들이나 지인들도 시위에 같이하고 있으니 뒤로 물러나 있고 싶지 않았다. 넥타이에 모자를 쓴 관리들, 가난한 노동자들, 남루한 차림의 노숙자들이 하나가 되어 거리에 모여들었다. 그렇게 많은 군중이 나란히 행진하는 모습은 이전에 본 적이 없었다. 과거 실업이 최악이던 시기, 비참에 빠진 사람들은 시위행진을 하고 중산층과 상류층은 저택 발코니에서 내다보던 때와는 정말 달랐다. 감정을 잘 통제하고 정돈된 생활을 유지하는데 익숙한 호세 안토니오에게 그것은 자유로운 경험이었다. 몇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이 한 집단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조밀하게 붙어 대열을 만든 채 몽둥이와 총으로 대응하고 있는 무장 경찰대를 향해 고함을 지르며 자극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광기에 빠진 사람 같다는 걸 스스로 깨닫기는 쉽지 않았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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