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언덕 위의 참나무 아래 혼자 있게 되자마자, 1초 1초가 부풀어 오르고 속이 차서, 절대로 흩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 시간들은 가장 이상하고 다양한 물체로 자신들을 채웠다. 왜냐하면 올랜도는 지금까지 가장 현명한 현자들마저 괴롭혔던 문제들, 이를테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우정이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따위의 문제에 스스로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이런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자마자 터무니없이 길고 다양하게 생각되었던 그의 과거 전부가 흩어지는 시간 속으로 돌진해 들어가, 그것을 본래 크기의 12배로 부풀리고, 갖가지 색으로 채색하고, 우주의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채워놓았기 때문이다. - P89

그는 잔디는 푸르고, 하늘은 파랗다고 말해, 비록 아주 멀어지기는 했으나,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엄격한 시의 정신을 달래보려고 했다. "하늘은 파랗고, 잔디는 푸르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늘은 그와 반대로 마치 천 명의 마돈나가 그들의 머리칼을 늘어뜨린 베일과 같았고, 풀은 마법의 숲에서 털투성이의 호색한 사티로스 신의 포옹에서 도망친 소녀들처럼 어두워지다 사라진다. - P91

"명성이란 말하자면"이라고 그가 말했다(이제 닉 그린의 만류도 없고 보니, 그는 마음 놓고 이미지를 차례로 주워섬겼는데, 그중 얌전한 것으로 한두 개 예를 들면) "사지의 자유로운 운신을 방해하는 끈 장식이 달린 코트, 가슴을 옥죄는 은 재킷, 허수아비를 가리는 색칠한 방패다" 등등. 그가 하려는 말의 요점은, 명성은 우리를 방해하고 구속하는데 비해, 무명은 우리를 안개처럼 둘러싸며, 무명은 어둡고, 넉넉하며, 자유롭다는 것이다. 무명은 우리로 하여금 갈 길을 거침없이 가게 해준다. 무명인의 머리 위에는 어둠의 자비가 풍족하게 내린다. 그가 어디로 가고 오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는 진리를 탐구하고,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만이 자유롭고, 그만이 진실되며, 그만이 평화롭다. 그리하여 그는 참나무 아래서 조용한 기분에 잦아들 수 있었으며, 땅 위로 노출된 참나무의 단단한 뿌리가 그에게는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 P93

그는 오랫동안 깊은 바다로 되돌아오는 파도처럼,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것의 가치와 무명의 즐거움에 대해 생각했다. 무명은 인간의 시샘과 앙심의 짐을 벗겨주고, 우리의 혈관 속으로 관용과 아량이 자유롭게 흘러넘치게 하며, 고맙다는 말이나 칭찬하는 말없이도 주고받는 것을 가능케 해준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모든 위대한 시인들이 틀림없이 그처럼 살아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비록 그의 그리스어 지식이 이를 뒷받침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셰익스피어가 틀림없이 그렇게 작품을 썼을 것이고, 교회를 짓는 사람들도 그렇게 지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모르게, 고맙다는 말을 듣거나, 이름이 알려질 필요도 없이, 오로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아마도 약간의 맥주를 마시고–"얼마나 멋진 인생인가"라고 그는 참나무 아래서 사지를 뻗으면서 생각했다. "그렇다면 당장 이런 생활을 즐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라는 생각이 총알처럼 그의 머리를 스쳤다. 야망은 다림추처럼 떨어져나갔다. 사랑이 배신당하고, 허영심이 비난당했을 때의 쓰린 가슴을 비롯해서, 그가 명성에 대한 야망으로 들떠 있을 때, 그를 찌르고 괴롭혔던 인생의 쐐기풀 묘판- 영광 따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더 이상 괴롭힐 수 없는–이 사라지자, 올랜도는 눈을 크게 뜨고–눈은 줄곧 크게 뜨고 있었으나, 생각만을 바라다보고 있었는데–발밑의 우묵한 곳에 놓여 있는 그의 집을 내려다 보았다. - P94

이때보다 더 이 집이 고상하고 인정미 있어 보인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는 왜 그들보다 앞서려고 했던 것일까? 지금은 사라진 무명의 사람들이 힘들여 이루어 놓은 창조물을 능가하려고 애쓰는 것은 극도로 허망하고 교만하게 보였다. 유성처럼 빛나고, 먼지 하나 남기지 않는 것보다 무명인채로 살고, 뒤에 아치문 하나 남기거나, 헛간을 하나 남기거나, 복숭아가 영그는 담 하나를 남기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는 발아래 잔디밭에 자리 잡고 있는 집을 내려다보면서, 결국 저기 살았던 무명의 영주와 귀부인들은 자손들을 위해, 비가 샐지도 모를 지붕을 위해, 쓰러질지도 모를 나무를 위해 뭔가 남겨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부엌에는 늘 나이 든 양치기를 위한 따뜻한 모퉁이가 마련돼 있었고,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서는 언제나 먹을 것이 있었다. 그들의 술잔은 그들이 병들어 누워 있을 때도 반들거리게 닦여 있었고, 그들이 죽어가고 있을 때에도 창엔 불이 켜져 있었다. 영주이면서 그들은 두더지잡이나 석공들하고 어울려 무명으로 살아가는 것에 만족했다. 무명의 귀족들이여, 잊혀진 건축가들이여–라고 올랜도가 그들을 불렀다. 그 목소리는 올랜도를 냉정하다, 무관심하다, 게으르다고 했던 비평가를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었다(사실 사람의 품성이란 우리가 찾는 반대편에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이처럼 그는 그의 집과 혈족을 더할 나위 없이 감동적으로 유창하게 불렀다. - P96

‘사랑‘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어, 하나는 희고 다른 하나는 까맣다. ‘사랑‘은 몸도 두 개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는 매끄럽고, 다른 하나는 털투성이다. 또 손도 둘이고, 발도 둘이고, 발톱도 둘이다. 사실 모든 기관이 둘이고, 각각은 정확하게 상대방의 정반대이다. 그러나 철저하게 연결돼 있어, 서로 떼어놓을 수 없다. - P1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