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닭 모를 무거운 침묵이 지속되자, 나는 혹시 출발 전 돈을 깎은 일로 어르신의 기분이 상한 건 아닌지 신경이 쓰인다. 100밧이면 우리 돈으로 대략 3300원. 이곳의 생활 물가를 감안해도 적은 금액이기에 도리어 기분이 나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돈이 아닌 기분을 홍정한 셈인데, 그 돈이 왠지 모를 이 싸한 침묵을 감수해야 할 만큼 내게 꼭 필요 했던 것인가 생각해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그냥 깎지 말 걸 하는 후회가 뒤늦게 미치는 걸 보면 역시 나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싶기도 하고. - P11

처음부터 500밧을 약속했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택시에서 내릴 채비를 하며 생각한다. 어쩌면 어르신은 오늘 밤 일이 수월하게 풀린다는 느낌에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을까. 우리에게 립서비스를 한답시고 자꾸 말을 걸어왔을 것이고, 그렇게 시답지도 않은 대화를 이어가다 보면 졸음이 약간은 가시지 않았을까. - P14

하지만 잠시 후 캐리어를 꺼내주겠다며 차에서 내린 어르신을 똑바로 마주하고 나니 이런 생각이야 말로 오만의 소산이구나 싶어서 면구스러워진다. 나무껍질 같은 주름으로 뒤덮인 얼굴과 무거운 것을 짊어진 듯한 구부정한 자세는 어르신의 고단함이라는 게 고작 몇 푼으로 무마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보여주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오랜 세월 성실하게 쌓아 올린 견고하고 육중한 철옹성 같은 피곤이다. 내가 함부로 재단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종류의 피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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