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선 제게 자연스러운 것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거대한 질문처럼 느껴지는 데다가, 모든 얼굴이 공백이에요. - P91

이걸 ‘조종‘이라고 생각하게 되진 않네요. 여기에서 우리는 하늘 아래를 나는 게 아니라, 잠들어 있는 무한의 공간을 통과하잖아요. - P94

‘제가 꺼졌을 때 제 안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어떻게 확신해요? 꺼진다는 건 저와 같은 부류의 죽음에 해당하도록 당신들이 발명해 낸 개념이죠. 의식이 없는 상태 말이에요.‘ - P95

이제 나는 상급 직원이 아니라 그냥 늙은 직원이라서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데, 그건 극도의 해방감을 맛볼 수 있는 경험이기도 해. 마음속으로는 언덕 위에 사는 거지. - P101

기억나는 건 이런 것들이야. 목욕탕에 비누가 하나 있는데 갈라졌어. 갈라진 데가 어찌나 깊이 파였는지 속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야. 그 패턴을 보니 몸서리가 났어. 사실은 이상하게 화가 좀 나기도 했어. 아무 법칙도 없는 패턴이었거든. 부엌 찬장을 기어올라 유리병에서 흐른 과일시럽에 모여들던 개미들이 기억나. 바닥에 떨어지면서 좌라락 소리를 내던 구슬들도 기억나. 똑같은 형태야. 법칙 없는 패턴으로 반복되거나, 내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법칙으로 반복되는 형태. 가끔은 그냥 기분이 나아지기 위해 그 비누를 쪼개버리고 싶었어. 아니면 흩어진 구슬 사이로 발을 움직이거나, 과일시럽 병을 싱크대에 처박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지. 전부 출발 이전 시기에 대한 기억이야. - P101

가끔 인간형들은 아주 조용해져요. 식당에서 그것들끼리 모여 앉기 시작했는데, 한 줄로 앉아서 영양분을 섭취해요. 그럴 땐 조용히 하기로 다 같이 합의라도 한 것 같아요. 멍청이들이나 그 침묵이 좋은 의미라고 믿을 겁니다. 그것들이 침묵을 지키는 게 기꺼이 봉사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무슨 음모를 꾸미는 것 같단 말입니다. 그래요, 맞아요. 난 그게 불안해요. - P107

인간형 승무원들이 업데이트를 받는 아침이면 우리 인간들은 식당 여기저기에 앉아서 수군거려요. 우리는 서로의 불행에 끌리고, 그 불행은 우리를 깔때기처럼 서로 끌어 내리죠. 그 깔때기 밑으로 떨어진 우리는 앉아서 수군거려요. - P108

나한테 아직 심장이 있긴 한지 모르겠어요. - P109

우리 중 누구도 그저 물건은 아닙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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