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관님은 관심 없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어요. ‘인간에게는 언제나 세 가지가 필요할 거야. 음식, 이동 수단, 그리고 장례식이지.‘ 그래서 저는 장의사가 됐고, 여기서 제 업무는 종료된 노동자들과 많지는 않지만 아프거나 재-업로드된 뒤 남겨진 몸뚱이들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 P40

나는 초록색 싹 하나만 빼고 모조리 말라비틀어져 버렸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식물 같은 거예요. 그 싹은 내 몸과 정신이고, 내 정신은 손과 같아서 생각을 하기보다는 접촉을 하죠. - P41

세상의 중심에 내가 존재하나요? 그곳에서 내가 의미가 있나요? 아니면 난 그저 수많은 무더기에 끼어있는 말랑한 알들 중 하나일 뿐인가요? - P45

그 물체들에는 뭔가 친숙한 구석이 있어요. 그전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도요. 마치 언어가 없는 기억처럼 우리 꿈속에서 나왔거나, 마음 깊이 파묻혀 있던 먼 과거 같아요. 아메바나 단세포 유기체로 살았던 기억, 아니면 코와 입이 생겨나고 생식기처럼 노출된 열린 점막만 있는 따뜻한 액체 속에 떠 있던 무게도 없는 배아 시절의 기억처럼요. - P46

인간이 아니라는 게 그렇게 끔찍한 일인가요? 그건 죽지 않는다는 뜻이잖아요? 아직까지 내가 내 인간성에 자부심을 느끼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 그래서 그 물체들이 나쁘냐고 묻는 건가요? 우리가 그것들을 공감 능력도 없다고 비난하냐고요? 그 돌덩이가 그래서 슬픔을 느끼냐고요? 나한테 그런 질문을 하는 건 당신도 확신이 없어서란 거, 당신 얼굴을 보면 알아요. 감금하고 있는 어떤 대상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니 조직에는 위험하죠. 의문이 생기잖아요. 예를 들면, 우리가 가둬 놓은 이 물체들에게 법적인 권리가 있을까? 이것들이 만약 물체가 아닌 자아를 지닌 주체라면 우리는 살인으로 유죄인가? 그런 질문이요. - P48

08이 지구에 대한 갈망을 느낀다면, 저는 인간이 되고픈 갈망을 느낍니다. 마치 제가 예전에는 인간이었다가 그 능력을 잃은 것처럼요. 저는 인간형일 뿐이고 똑같지 않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저는 인간처럼 보이고,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느낍니다. 인간과 같은 성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쩌면 가지고 계신 서류에서 제 신분만 바꾸면 될지도 모르지요. 그건 ‘이름‘의 문제일까요? 당신이 저를 인간이라고 부른다면 저는 인간이 될까요? - P55

내가 이 제 복을 입고, 두피에 이런 부드러운 털을 붙이고, 훌륭하다는 소리를 듣는 이 동그란 뺨과 근육질의 두 팔을 가져야 한다는 건 누가 결정한 거야?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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