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겹다. 그만해라. 전시회를 본 동기는 그런 문자를 보내왔다. 또다른 동기는 변태라는 두 글자만 보냈다. 그나마 지도교수는 정중한 편이었다. 조금 더 가려보세요, 김군. 다 드러내는 건 결코 아름답지 않아. 동기들은 내 그림을 아무도 사지 않을 거라 했다. 전업 작가로 살겠다는 내 의지를 비웃었다. 그 비웃음에서 악의를 압도하는 혐오감이 느껴졌다. 손님 없는 밤길을 달리다보면, 그들의 말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그럴 때는 헤어날 수 없을 만큼 쓸쓸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 P301
"몇 시간 동안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요. 몸과 정신이 완전히 분리되는 기분이에요. 그러니까 타인처럼 내 몸을 볼 수 있죠. 그 기분이 반복되면, 다른 사람을 볼 때도 몸이 아닌 영혼이 보여요." "나는 어떤가요?" "당신은......." 당신은 한참 뜸을 들이다가 답했다. "기괴해요." 나는 일부러 소리 내어 웃었다. 당신은 웃는 나를 말없이 지켜 보았다. 상처받았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그 마음조차 들킨 것 같았다. - P304
"눈이 계속 올까요?" 당신이 물었다. 내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이번에도 당신은 기다리지 않고 다음 말을 이어갔다. 당신의 질문은 혼잣 말이어서 굳이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청한동은요. 눈이 쌓이면 차가 꼼짝할 수 없어요. 운전기사를 둔 사람들도 죄다 걸어야 하죠. 누가 그랬어요. 눈은 비랑 다르다고. 모두에게 공평하다고요." - P308
나는 처음부터 당신이 좋았다. 당신은 분명 미인에 속했다. 그러나 모든 미인이 괜찮은 그림의 모델이 되는 건 아니었다. 모델에게는 결핍이 필요했다. 그것이 그림에 자연스러움을 더했다. 당신은 목이 굽고 양쪽 어깨 비대칭이 심했다. 지치고 피곤한 상태를 자세가 그대로 보여주었다. 물론 그런 모습 때문에 당신에게 매력을 느낀 건 아니었다. 내가 주목한 건 당신의 눈, 피곤을 견디려고 부릅뜬 두 눈이었다. 당신의 동공은 부엉이와 닮았다. 노랗고 투명했다. 크로키를 하는 동안, 나는 당신의 두 눈에 야만성을 담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당신이 배반하길 바랐다. 자신을 지치게 하는 일과 그 일에 품은 열망을. - P309
"언덕길에 가로등이 별로 없거든요. 혼자 올라가기 무섭네요." 고개를 끄덕였지만 무시당하는 기분이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당신에게 묻고 싶어졌다. 나는 무섭지 않나요? 사람을 해칠 만큼 힘이 세 보이지 않아요? 왜소한 몸과 짧은 팔다리로는 어떤 위협도 가할 수 없다고 생각하나요? 왜죠? - P314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다니까요. 말할 필요도 없어요. 같이 밥 먹을 의무도 없고요.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 돼요. 책 읽고, 영화 보고." 그렇게만 하면 돈을 준다고 했다. 처음에는 의심스럽고 눈치도 보였지만, 이제는 편하게 쉬다 오는 기분이 든다고도 했다. 돈은 월급처럼 받는다고 했다. 매달 말일이 되면 당신은 오만원권 칠 십 장이 담긴 흰색 봉투를 받았다. 노부인은 그 돈을 작품 대여비라고 불렀다. 나는 불쾌한 기분 탓에 얼굴이 굳었다. 그 일이 편하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무방비 상태로 타인의 시선을 받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 P315
"세상엔 돈으로도 구할 수 없는 게 참 많아요." 당신 말이 맞았다. 나는 그제야 당신이 언덕을 오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도시 어디에도 없는, 그러나 청한동 언덕에는 존재하는 것들을 당신은 열망했다. 어쩌면 그 열망이 당신을 지치게 하는지도 몰랐다. 나는 상기된 당신의 얼굴을 외면했다. 종이컵을 손으로 꽉 쥐었더니, 남은 커피가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당신은 결코 제 발로 노부인의 집을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었다.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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