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봐도 빤했다. 큰돈 한번 만져보니 욕심이 나는 거겠지. 이 바닥에는 경제적 예속을 빌미로 아이를 극악하게 굴리고 후에는 더 큰 돈을 요구하고 갈취하는 부모들이 더러 있었다. 내 어머니도 그랬다. 시장서 두부값 깎는 것도 죄스러워하던 그 여린 분이 돈맛을 보자 어찌나 그악스러워지던지, 종국에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이틀간 잠도 못 자고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손님을 받은 적도 있었다. 어린 마음에 밤에는 신령님들과 영통할 수 없다고 거짓말하자 어머니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호통치셨다. 얘, 신령들은 시간 정해서 온다니? - P265
친구는 있을까. 있어도 일상을 공유하거나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낄낄대기는 힘들 것이다. 우리가 얻은 생은 여느 평범한 이들의 삶과는 다르니까. 저 나이에 나는 평범한 삶을 살고 범상한 몸을 가질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했는데, 한 번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저주처럼 여겼는데 저애도 비슷할까. 신애기는 음료에 기포를 만들며 오후를 보낸다. 평범하게. 나도 몰래 그것을 따라해본다. 볼에 바람을 불어넣으며. 보글보글 보글보글. - P270
네가 그렇게 되고 싶어하던 문화재. 그거 나 하게 해준다고. 할멈이 넌 너무 늙었다네. 늙은 게 야심만 가득해 흉하다고. 신애기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웃는다. 큭큭큭큭, 큭큭큭. 손가락 사이로 기분 나쁜 웃음이 새어나온다. 온몸의 피가 머리로 쏠린다. 종아리가 풀리고 손이 저려온다. 모르겠다. 지금 나를 향해 조소하는 것이 할멈인지 저애인지, 허깨비인지 인간인지,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일렁인다. 그 불길에 저애에게 잠시 가졌던 연민이며 동질감, 할멈을 향한 애증과 경외심도 모조리 타버린다. - P274
말씀해보세요. 말씀 좀 해보세요! 중언부언하며 악을 지르는데도 할멈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계속되는 침묵에 분이 가시지 않아 할멈상을 들어올리다, 흠칫한다. 한 번도 인지한 적 없었는데, 너무 가볍다. 원래 이랬던가. 이게…… 원래 이렇게 가벼웠나. 할멈상을 벽에 던진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할멈상이 바닥에 나뒹군다. 텅, 텅, 텅……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온다. 큭, 큭큭 큭큭큭. 큭큭큭. 큭큭큭. 멈춰보려 해도 딸꾹질처럼 웃음이 계속해 터진다. 큭큭큭, 큭큭큭큭. - P275
구름도 다 사라진 땡볕 아래서 판수도, 악사들도 점점 지쳐가는 와중에 기세가 누그러지지 않는 이는 오직 나뿐이다. 피범벅에 몰골도 흉하겠으나 시야가 환하고 입가엔 미소까지 드리워진다. 신령 근처에라도 가닿은 것처럼 몸이 가뿐하고 신명이 난다. 장단이 빨라질수록 나는 고조된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삼십 년 박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살을 풀고 명을 비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 - P280
룸 미러를 통해 볼 수 있는 부분은 승객의 하관과 어깨선 정도였다. 얼굴 전체가 보이는 때도 있기는 했다. 만취해서 좌석에 몸을 푹 파묻은 사람을 태우면 그랬다. 술에 취한 사람은 얼굴에 드러나는 사연이 모호했다. 얼굴만 봐서는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술에 취하면 진심이 드러난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대개는 진심 속에 숨어 있던 야만성이 드러나곤 했다.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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